4화. 느긋하다

서두르지 않는 마음의 온도

by 나무애

느긋하다

: 마음이 편안하고 서두르지 아니하다

: 속도보다 방향을, 성과보다 여백을 택하는 태도

: 나와 너의 호흡을 맞추는 다정한 느림



바쁜 시대를 오래 건너오며, 우리는 ‘빨리’가 능력이고 예의라고 배워왔다.

빠르게 답장하고, 빠르게 처리하고, 빠르게 잊는다.

그러다 보니 느긋함은 종종 게으름으로 오해된다.


하지만 느긋하다는 건 미루는 태도가 아니라 견디는 힘이다.

속도를 늦출 줄 알기에, 더 멀리 간다.

호흡을 맞출 줄 알기에, 함께 간다.

생각해보면, 느긋함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다.


내 안의 시계를 한 박자 늦추어,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귀를 기울이고,

내가 할 말의 가장자리들을 매만지는 일.

빠르게 정답을 내놓기보다

잠깐의 침묵을 허락하는 일.

그 잠깐의 여백에서 마음은 가라앉고,

말은 불필요한 각을 잃는다.


줄이 긴 카페 앞에서,

나는 가끔 일부러 느긋해진다.

내 차례가 왔는데 메뉴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등 뒤의 한숨을 등에 업지 않으려,

내가 먼저 한숨을 내려놓는다.

서두른다고 더 빨리 따뜻해지는 커피는 없고,

초조해진다고 더 달라지는 하루도 드물다.

그러니 한 걸음 물러서

“먼저 하세요” 하고 길을 비켜준다.

그 짧은 느긋함이 이상하게 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든다.


버스를 막 놓친 날이면,

이전의 나는 늘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생각을 바꾸었다.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나에게도 삶은 흐르고,

그 여분의 몇 분이

때로는 좋은 문장을 데려오고

때로는 잊고 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하니.

느긋함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pexels-mikebirdy-34583917.jpg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빠른 답이 성의라고 믿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상대의 말끝을 매번 서둘러 이어 붙였다.

하지만 어느 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조심스레 말끝을 찾을 때

굳이 해답을 서둘러 건네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의 침묵을 함께 앉아 있는 시간이

빠른 위로보다 더 오래 마음을 데워 주었다.

느긋함은 이해가 아니라 존중에서 비롯된다.

빨리 알아들었다고 해서

늘 더 깊이 이해한 것은 아니니까.


일을 할 때도 느긋함은 필요하다.

마감이 다가오면 초침이 커지지만,

모든 단추를 동시에 채울 수는 없다.

한 개씩, 단단히 채우는 편이

결국은 옷의 모양을 예쁘게 한다.


초조함은 실수를 만들고,

느긋함은 다시 읽고 고치는 시간을 준다.

그 사이 글자들이 자리를 찾고

생각은 불필요한 과장을 벗는다.


느긋함과 안일함은 다르다.

느긋함은 의지가 있는 느림이고,

안일함은 책임을 미루는 느림이다.

느긋함은 방향을 본다.

조금 늦어도, 괜찮은 방향을 택한다.

안일함은 시간만 보낸다.

제자리에서 늦어진다.

우리가 택해야 할 느림은 언제나 전자다.


아이와 걷다 보면 이 사실을 쉽게 배운다.

아이의 발걸음은 늘 관심이 향하는 곳을 따라간다.

돌멩이에 멈추고, 개미에게 멈추고, 하늘에 멈춘다.

나는 “빨리 가자”를 삼키고

그 멈춤에 서서히 몸을 맞춘다.

그때 보이는 풍경들이 있다.

놓치지 않아도 되는 작은 것들,

그러나 놓치기 쉬운 기쁨들.

느긋함은 기쁨을 발견하는 속도다.


우리는 종종 스스로에게도 잔인하다.

“왜 이것밖에 못 했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자책은 속도를 더 세게 밟게 만들고,

가끔은 길을 벗어나게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건

더 빠르게, 더 세게가 아니라 한 번의 감속이다.


pexels-nietjuhart-3036368.jpg

사랑에서도 느긋함은 온기가 된다.

문장 하나를 보낼 때,

상대가 읽을 시간을 함께 보낸다.

나의 속도로 재촉하지 않고,

그의 속도로 답장을 기다린다.

“괜찮아, 천천히 와.”

이 짧은 문장은

상대의 하루를 안전지대로 만든다.


느긋함은 함께 걷는 속도를 정한다.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면 되고,

멀리 가고 싶다면 느긋해져야 한다.


물론, 늘 느긋할 수만은 없다.

기차는 시간을 맞춰 떠나고

마감은 시간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하루 중 단 십 분이라도

내 마음의 호흡을 되찾는 시간은 필요하다.


느긋하다는 건,

세상이 시끄러워도 내 안에서 조용한 기준을 지키는 일이다.

빨리보다 바르게,

크기보다 깊이,

눈앞보다 끝을 본다.


그리고 그 기준을

사람에게도 적용한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내가 정한 속도에 끼워 넣지 않고,

그 사람의 호흡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

그게 느긋함의 다정이다.


오늘,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더 빨리? 아니면 잠깐의 느긋함?

아마 정답은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느긋함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을 함께 지킨다.

내가 나를 몰아붙이는 시간을 줄이고,

너를 나의 속도로 재촉하는 시간을 줄인다.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에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좋아하게 된다.



다정 한 줄

“당신의 속도에 맞출게요. 오늘은 느긋하게.”



이전 03화3화. 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