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시 내가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리고 그 사람이 준영씨 같은 사람이어서 행복했다. 나는 그가 좋은 사람이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이미 내 마음에 들어온 그가 건강한 사람이길,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길 바란다.
최이현. 준영씨의 아이 이름이다.
이현이는 초등학교 3학년으로 엄마 아빠의 이혼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아빠에게 종종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아빠가 행복한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며 아빠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아빠도 아빠 자신으로서 행복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예쁜 이모와 사랑을 하길 바란다고.
아빠를 애정하는 마음이 깊은 어여쁜 아이다.
어떻게 이런 깊은 마음을 가진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이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음과 동시에 나는 이현이를 이토록 건강하고 바르게 키워낸 준영씨가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말 그대로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렸을 때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던 이 문장을 아이를 키우며 매일 실감하고 있다. 나의 행동과 나의 말투,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흡수해 버리는 지한이를 보며 나는 항상 같은 말을 되뇐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자. 내가 먼저 더 멋진 사람이 되자. 지한이를 위해 이것이 옳은 일이다,라고.
나는 앞으로 감당해야 할 숙제가 많은 사람이다. 지한이에게 엄마아빠의 이혼 사실을 밝히는 것을 시작으로 그 사실을 받아낼 아이의 혼란을 케어하고,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른 가정의 모양으로써 비롯될 지한이의 사춘기를 또 잘 버텨내야 한다.
나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이 모든 일이 무섭고 아득하다. 이런 단계단계를 나 혼자 겪어내야 한다는 게 매일 온몸으로 두렵지만, 나는 동시에 하나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나는 남의 도움 없이 대부분의 일을 혼자서 잘 해내가는 편이다. 그리고 이 또한 내가 이혼을 마음먹으면서 나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여긴 일이었다. 무서운 일이고 혼자 하기 버거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못할 일도 아니다. 다만 그 무게가 다소 짐작이 안된다. 앞으로 상상이 불가한 일들이 나와 지한이 앞에 펼쳐질 것이다.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한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나의 아이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혼자서 키워나갈 수 있을까.
아이가 그 작은 눈으로 나만을 바라보며 나를 믿고 나의 길을 따라와 줄까.
앞을 알 수 없기에, 도저히 가늠할 수 없기에 내게 이혼이란 이토록 참으로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 결단하기 두려운 일이었다.
다들 한 번쯤은 꿈꿨을만한 지옥 같은 일,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과 원수가 되어가는 일,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내 존재를 짓누르는 일.
'이모님, 저는 가끔 무서워요.'
'왜 뭐가 무서워. 지한이 키우는 것 때문에 그래?'
'네 그냥 제가 모든 걸 혼자 할 수 있을까 무섭고 걱정이 되고 그래요.
엄마아빠의 이혼도 사춘기도 지한이가 잘 소화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할 수 있지.
그리고 엄마잖아. 엄마가 해내야 하는 일이지.
내가 여태 가만히 지켜봤잖아.
지한이 엄마는 참 요란하지 않아.
속이 깊고 단단해. 추진력도 있고.
그래서 뭐든 잘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
그렇게 느껴져.'
그날 밤 나는 이불속에서 지한이를 재우며 속으로 읊조렸다.
이모님, 사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운명같이 만나게 된 사람이에요.
이 사람과 지한이를 같이 사랑할 수 있을까요.
제 시간은 유한한데 이 시간을 나눠서 지한이와 그 사람에게 사랑을 줘야 해요.
제가 이것까지 잘 해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