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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Nov 27. 2024

어깨가 옷걸이 모양이 된 까닭

불안한 사람이 사는 법

겁 많고 잘 울던 나는 엄마의 근심 걱정을 등에 지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국민학교였다. 그 당시 나는 분리 불안이 심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동네가 떠나갈 듯 울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 때였다.

엄마 손을 잡고 소풍을 같이 가던 시절이었다.

소풍 장소였던 어느 산속에 도착했고 담임 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 서서 계속 엄마를 찾았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가 누군가에게 잡혀 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걱정은 불안이 되어 늘 눈물샘을 건드리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는 물론 그런 일을 겪은 것이 그날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그런 날 있잖아 늘 참아오다 뚜껑이 열려 버리는 그런 날 말이다. 

엄마는 폭발하고 말았다. 속이 상했던 엄마는 그 길로 내 손을 거칠게 낚아채고 산속에서 내려와 버렸다.

내 국민학교 첫 소풍은 그때 언덕배기를 끌려 내려오며 생긴 흙먼지처럼 기분 나쁘게 났다.

눈물 콧물은 덤이었다. 


그 당시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는 인신매매라는 무서운 범죄를 종종 보도하던 때였다.

인신매매라는 무서운 범죄가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유서 깊은 나쁜 짓이라는 사실이 개탄스럽지만 여하튼 그 당시에 나는 엄마가 납치되어 험한 곳으로 끌려가 다시는 엄마를 못 볼까 봐 너무 무서웠다.

지나고 생각해 보면 우리 엄마가 나 때문에 참 속상하고 창피했을 것 같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는 나와 한 살 차이 나는 어린 동생을 낳느라 나를 외갓집에 맡겨놓고 사라졌다.

엄마가 가는 모습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던 나를 외할머니가 작두 펌프 물로 씻겨 주었다.  할머니의 거친 손바닥 아래 내 두눈에서 시골 작두 펌프 마냥 눈물이 쏟아졌다. 

그것이 분리불안의 원인이었을까? 잠재된 의식과 무의식 사이 그날의 기억

외갓집에 맡겨졌던 그때의 불안과 좌절이 내 분리 불안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 있었더라도 누구가는 나처럼 그렇게 불안감을 느끼지는 않을 수도 있다.


분리 불안은 아주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엄마가 집에 없다고 울었던 마지막 기억은 중학교 1학년 초였다. 그 후로는 엄마가 없어도 나는 울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 자연스럽게 엄마가 없다고 울지는 않게 되더라..


내게 분리 불안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남들은 하는지 아닌지 모를 온갖 걱정들을 굳이 해 가며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

전쟁이 날까 걱정했고, 건강 염려증을 옵션으로

666 바코드가 이마에 새겨질까?

휴거가 발생할까? 걱정했다.


그래도 공부는 곧 잘했다. 유치원은 다니지 않았고 사교육도 받지 않았지만 학교에 들어가서 한글을 떼고 학교 수업도 잘 따라갔다. 그리고 시험을 치면 올백이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올백 소녀였고 반 일등에게 주어지는 연필과 공책 포상을 받고 개선장군처럼 집으로 향하곤 했다. 엄마 선물도 있었다. 반 일등 엄마에게 봉투를 풀로 붙이는 수작업을 담임 선생님께서 부탁하셨다. 엄마는 풀로 A4지 보다 큰 서류 봉투를 월세방 바닥에 놓고 기분 좋게  붙이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들이 생겨났다. 

없는 걱정도 만들어 내던 나는 큰일이 생길 때마다 긍정회로를 돌리지 못했다. 부정적 생각하다 보니 인생의 벽들 앞에서 자주 좌절 하곤 했다. 불안은 늘 가슴 두근 거림, 초조함 등의 신체적 증상을 동반하게 되었다. 나 같은 아이를 당연히 처음 키워 보던 우리 부모님 역시 나를 데리고 병원 문턱이 닿도록 다니며 고생을 했다.

고3 시절에는 원인 모를 두통이 생겼다. 약도 통하지 않자 엄마는 부적을 써오기도 했고 집에서 5분 거리의 학교를 근처에 사시는 고모부가 늘 태워 다녔다. 그 역시 원인은 걱정과 불안  그런 심리적 요인들이었다.

수능은 망했지만 두통은 사라졌다.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불안 역시 너무나 자연스러운 방어기제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아지기 마련이다. 내 걱정은 늘 잡생각들로 이어졌고 불안을 재생산해 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걱정과 불안 앞에서 내가 찾은 것은 최선을 택하기보다 차선을 선택하는 방법이었다.

도전하기보다 늘 안전한 것을 택하며 살아왔다.


불혹의 반...

막연히 이 나이쯤 되면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당연히 내 생각은 틀렸고 여전히 나는 불안정하다.

삶은 어차피 다양한 문제들로 이뤄져 있고 하나가 해결되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게임기 속 장애물처럼 계속 해결해야 할 것들이 생겨 났다.


나는 내가 잡생각에 빠지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몸으로 태어난 것을 알고 있다.

얼마 전 한국사 시험에 도전했고 1급을 땄다.

그리고 계속 읽고 썼다. 본업 당연히 했다.

어딘가에 몰두하고 살아야 살아진다. 사람은 늘 어딘가에 미쳐 있어야 나아갈 수 있다.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최선이든 차선이든 뭐라도 하며 평생을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싫든 좋든 그냥 이렇게 태어난 것 같다.


잠을 설친 어느 날

멍하니 집에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에 버겁기 시작했다. 얼른 채비를 하고 출근을 위해 운전석에 앉았다.

주차장을 나오며 보이는 파란 하늘과 서늘한 공기에 어색할 만큼 기분이 나아졌다.

집에서 꽃꽂이나 하며 얌전하게 살기는 틀린 모양이다.



그래서 어깨가 왜 옷걸이 모양이냐고?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내가 교과서를 챙기지 못하고 학교에 가 선생님께 혼나는 상황이 두려웠다. 그때는 체벌이 만연하던 시절이었다. 공책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맞았으니 하물며 책을 집에 두고 오는 날이면 말해 뭣 하겠는가? 당연히 사물함이 없던 그 시절 나는 모든 교과서를 책가방 안에 다 넣고 매일매일 학교에 갔다. 어깨가 땅으로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난 끝까지 군장 같은 가방을 메고 행군을 하듯 학교를 다녔다


그때 내려앉은 어깨가 지금은 철제 옷걸이 모양으로 변해 버린 것 같다. 단지 내 추측일 수도 있다.

여하튼 제니의 직각 어깨를 나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이놈의 걱정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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