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견례 날이었다.
인생은 고비고비를 넘는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에게 상견례 역시 그 고비 중에 하나였다.
정우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애가 장손이니 제기 세트를 해 오면 좋겠어요."
엄마는 정우 아버지의 요구에 적잖이 당황했다.
딸 가진 엄마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제사를 일찍 줄려고 저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구를 하는구나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상견례 자리에서 시댁이 요구하는 것을 단박에 거절할 수 없었던 내 부모님은 언짢은 티를 내며 제기 세트를 사서 보내겠다고 했다.
다음으로 엄마가 입을 뗐다.
"우리 집은 돈이 없어서 많이 못 챙겨 줍니다."
나와 정우는 당황했다. 엄마는 상견례 자리에서 굳이 왜 저런 말을 할까?
정우와 정우의 부모님 역시 엄마의 돈 없어 드립에 난감해했고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그 당시 아빠가 다단계에 빠져 현금을 많이 날리긴 했어도 심하게 없이 살진 않았다. 암만 생각해도 정우 집 보다 우리 집 형편이 나은 것 같은데 엄마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엄포를 놓듯 돈 없어를 시전 했다.
제기 세트와 돈 없어로 각 집에 한방씩 원투 펀치를 날린 상견례는 그렇게 끝이 나고 부모님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상견례는 어색함을 넘어 불편했고 불쾌했다. 하지만 나와 정우는 철없이 좋았다. 이제 한고비 넘은 것 같아 안도했다.
엄마는 결혼 날을 잡기 위해 용한 점집을 찾았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명리학은 믿어도 신점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는 사주니 신점이니 하는 모든 것이 무서웠기에 당연히 결혼식 날짜를 잡는 것은 엄마에게 맡겨 두었다. 엄마가 점집을 가는 것을 그냥 조용히 뒷짐 지고 보기만 했다.
그리고 엄마가 받아온 그 결혼식 날짜 때문에 일생일대의 사달이 났다.
사실 정우의 아버지는 정우가 군대를 간 사이 정우 새엄마와 재혼을 했다.
내 시어머니 되실 분은 바로 정우의 새엄마였다.
정우 아버지는 아들도 모르는 사이 아들에게 서프라이즈 선물로 새엄마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나 역시 정우 부모가 정우의 학창 시절에 이혼을 했고 지금의 엄마가 정우의 새엄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삶은 각자의 것이다.
아주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부모든 자식이든 서로를 구속할 의무도 구속시킬 의무도 없다.
보고하거나 상의 따위도 필요 없다. 정우 아버지는 말 그대로 신흥 모던 패밀리 그 이상의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던 걸까... 내가 새사람과 미래를 꿈꾸겠다는데 자식들이 뭔 상관이야? 뭐 이런 거..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식이 부모 인생을 책임져 줄 수는 없다.
정우는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던 사람일까?
정우의 유년 시절을 나는 그저 끼워 맞추기식으로 상상하곤 했다. 아마도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으로 상처가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우산 없이 내리는 비를 맞듯 상처를 몸으로 받아 내며 무기력한 유년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어차피 고향을 떠나 지내는 정우였기에 마주칠 일도 잘 없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뜻밖의 새엄마의 존재도 그냥 내리는 비처럼 그렇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도 그랬다. 새엄만데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엄마는 내 시어머니 될 사람이 새엄마라는 사실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제기 세트 요구에 기분이 상한 것도 새엄마이기 때문에 제사를 빨리 물려 줄거라 미루어 지레 짐작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결혼 날짜가 잡혔다.
엄마가 잡아 온 결혼 날짜를 시댁에 알렸다. 그리고 그날 결혼식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엄마는 정우에게 물었다.
"그날이 좋다는데 안 되는 이유는 뭔가?"
정우의 입에서 드라마 보다 더 드라마 같은 대답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