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겨울 대비 피할 수 없다면 껴 입자
내 나이 46, 작년부터였다. 특히 고기 종류를 먹고 나면 절대 아껴 두고 싶지 않은 고기 살점들이 어금니 사이사이 끼기 시작했다. 고기뿐만 아니다. 야채 종류도 매한가지니 커피 빼고 다 낀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가방에 파우더와 립스틱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 화장품 대신 치실이 내 필수품이 되었다.
철없던 시절, 식사 후 이쑤시개로 마구마구 이를 청소하고 계신 어른들을 볼 때면 자동으로 미간이 구겨지곤 했다. 지금 내 입장이 그 시절 본 어른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야 이해되는 '눈이 시리다.'
나이가 들면 눈물샘 기능이 떨어져 눈물 분비가 줄고 눈물막이 얇아진다. 바람맞으면 바로 말라서 시림이 증가하는데 지금처럼 찬 바람에 더 그렇다. 안구가 빨리 건조해지나 보다.
치실에 이어 눈물 닦는 용도로 손수건까지 챙겨 다녀야 할 판이다. 야외 활동 시 눈이 시리고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겉보기 등급은 감성 충만 중년이 되었다. 바람만 불어도 안구가 촉촉해지니 바람이 그렇게 내 심금을 울릴지 몰랐다.
내복 없이 겨울을 보낼 수 있을까?
10대 20대 때 나는 한겨울 스타킹을 신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갑갑하게 조이는 느낌을 싫어하기 때문도 있지만 엄동설한 따윈 문제 될 것 없던 청춘의 혈기는 스타킹도 내복도 전혀 필요치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이제 내복 없이 추운 계절을 나기 힘들어졌다. 내복은 내 동절기 필수 의복이 되었다. 11월 초 추위가 몰려오던 그때 나는 이미 내복을 개시했다. 하지만 내게도 아직은 청춘이고 싶은 마지막 패기는 남아 있었다. "절대로 하의는 내복을 입지 않으리"라는 고집이었다. 나는 상의만 내복을 입고 오랜 세월 버텨왔다. 바지 내복을 입지 않는 건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가을 추위는 어느새 누그러졌지만 난 내복을 벗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발목이 아슬아슬 보이는 바지에 덧양말을 신고 출근길에 나섰다. 그날 최고 날씨는 16도였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불어오는 바람이 발목을 스치는데 그 느낌이 얼마나 냉하던지 마치 발목만 냉장고 안에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길거리 초중등은 맨날에 슬리퍼를 신고도 잘도 다니는데 이게 뭐람?
바깥 온도 16도에 발목이 시릴 일인지...
세월의 야속함과 몸뚱이의 부실함이 조화를 이루니 이렇게 서러울 수 없었다.
나는 세월 앞에 내 자존심을 버리고 결국 히트텍 하의를 꺼내 입었다. 양말도 발목을 덮는 것으로 신었다.
세월과 함께 오는 신체적 변화를 받아들이는 용기
우리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명언처럼 들으며 산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나이는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이에 얽매이지 말고 뭐든 해 보라는 하지만 내 몸은 나이라는 숫자를 한해 한해 자동 갱신 해 주는 것 같다. 정직하고 편한 신체 자동 갱신 서비스에 매우 불쾌하기만 하다. 하지만 발목을 스치는 찬바람을 방한 내복이 막아 주니 참 따뜻했다. 중년 이후 또래 친구들의 관심사 역시 건강이다. 소화가 잘 되는지? 갱년기가 왔는지? 콜레스테롤은 괜찮은지? 등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추위를 견디는 역치도 모두 낮아져 울산보다 더 추운 서울에서나 입는다는 초강력 보온 파카를 구입한 지인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신체적 변화는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임을 깨닫는다. 신체가 변화니 정신도 덩달아 변하는 것 같다. 젊음을 붙잡으려 애쓰고 싶지만 세월과 함께 찾아오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젠가 지금보다 더한 변화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찾아올 것이다. 이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과정이니 부정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인정하는 마음을 가질 준비를 해야겠다.
오늘도 16도다. 근데 바람이 차다. 한 겨울 오기 전에 위아래로 중무장했는데 기분 탓인지 스산했다. 차가운 쫄면은 사 먹을 용기가 나지 않아 순대 국밥 집으로 들어갔다. 뜨끈한 순대 국밥 한 그릇 먹고 있으니 따뜻하긴 한데 괜히 슬펐다.
어쨌든 월동 준비는 이미 다 된 것 같다. 어른들 말씀이 뼈에 바람이 들면 답도 없다더라. 내가 이제 젊은 애들에게 저 말을 하고 다닐 나이가 된 듯하다. 한 겨울 롱 코트 안에 반팔 티와 맨다리로 번화가를 누비던 그 옛날 나는 없다. 아래위 내복(히트텍)을 입고 한치의 찬기운도 몸에 스미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중무장 정신을 장착한 중년이 되었다.
멋이고 뭐고 목숨부지 차원에서 몸이 둔해 굴러 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껴입고 보는 생존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