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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풍 Dec 02. 2020

눈만 뜨면 볼 수 있었던 풍경

1. 강릉 'OO해변'

4년 전, 남편과 함께 강원도의 작은 시골 마을에 가게 됐다. 사람도 별로 없고, 바다 물도 맑아서 수영을 좋아하는 남편이 자주 오는 곳이라고 했다. 남편이 물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거나 차에서 낮잠을 잤다. 바다에 와서 왜 바다를 즐기지 못하냐고 물으신다면, 나에겐 약간의 물 공포증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시절 저체중에 엄청난 몸치였던 나는 가족들과 바다에 놀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갈 뻔했다. 이후 약간의 물 공포증이 생긴 나는, 물속에서 발이 땅이 닿지 않고 둥둥 뜨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허리 정도 오는 물 속이라면 괜찮지만 그 이상으로 들어가는 건 영영 못할 줄 알았는데, 남편을 만나 자주 이 마을을 찾게 되면서, 바다에 들어가 노는 사람들을 보여 조금씩 용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편 손에 이끌려 바다에 들어가길 몇 번... 드디어 나는 보드에 누워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킥판을 잡고 물살을 가르며 수영 비슷한 것(?)도 할 수 있게 됐다. 브라보!


물에 대한 공포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인 4년. 4년 동안 이 마을에 올 때마다 '내일은 꼭 해야지' 생각만 하고 매번 실행하지 못한 게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일출 보기'였다. 숙소 바로 앞이 바다라 눈만 뜨고, 창문만 열면 볼 수 있는 것을 여태 보지 못한 것이다. 


핑계를 조금 하자면 차 막히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남편 덕에 평균 새벽 5시쯤 출발하는 여정이었기에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녹초가 되어 '5분만 더 잘게...'를 웅얼거리며 포기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워낙 자주 오는 곳이었기에 다음에 봐도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 한마디로 일출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간절함이 없었달까. 


그렇게 날려버린 수십 번의 일출 기회. 그런데 이날은 웬일인지 그냥 날려버리고 싶지 않았다. '눈만 뜨면 볼 수 있는데 대체 왜 못 보는 건데 왜!' 하는 자책 아닌 자책이 폭발해버린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림이 울리자마자 '5분만...'에 유혹에서 벗어나 창문을 벌컥 열었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지만 핑크빛으로 물든 하늘을 보니 거짓말처럼 잠이 사라졌다. 누군가 깨우지 않는다면 오후 2시까지 내리 잘 수 있는 슈퍼 잠탱이인 내가 말이다. 밖에 나가지 않아도 창문으로 충분히 일출을 볼 수 있지만 굳이 남편을 깨워 밖으로 나갔다. 핑크빛으로 물든 세상을 바라만 보는 게 아닌 그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새벽에 비가 내렸는지 촉촉하게 젖은 바닥에 핑크빛 햇살이 비췄다. 아무도 없는 새벽 바닷가에 남편과 둘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기분이 괜스레 몽글몽글해졌다. "너무 예쁘다! 온 세상이 핑크빛이야! 완전 예뻐!"를  거짓말 1도 보태지 않고 한 백번 정도 외쳤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서서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 빼꼼 얼굴을 내미는 태양을 보고 있자니 새삼 그동안 잠으로 날린 나의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사실 그동안 남들은 잠을 많이 자는 게 게으르고 나쁘다고 할지언정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몸이 약하고 체력이 안 좋다 보니 잠을 많이 자야 그나마 생활하는데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잠을 많이 자는 건 시간을 버리는 일이 아닌 재충전을 위한 투자였다. 


그런데 이 풍경을 보자마자 그동안 내가 너무 한 곳에 투자를 몰빵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충전도 좋지만 인생의 새로운 풍경을 볼 기회가 있을 때는 부지런히 움직여 '새로운 투자'를 해야 함을 깨달았달까. 덕분에 이날 나는 남편과 영원히 기억될 소중한 추억을 남겼고,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더 힘을 낼 수 있는 활력을 얻었다. 눈만 뜨면 볼 수 있었던 이 풍경 덕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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