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용 Feb 17. 2021

고마워 코로나야.

코로나 반백수 아빠의 육아

 처음에는 우한 바이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타나 우리 인생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가 우리 곁에서 서성거린 지 거의 일 년이 되어간다.

 

외출할 때 혹시나 잊어버리고 나갈까 걱정돼 습관처럼 매일 같이 지갑과 차키를 놓아두던 그 자리 옆에는 언제나 마스크가 자리를 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그나마 간간히 즐기던 취미는 이제 손에서 놓은 지 오래고, 한 달이면 몇 번씩 찾아가던 단골 식당 역시 못 간 지 오래다.

 


뭐 이렇게 이야기하면 소위 말하는 '무너져버린 일상'에 엄청나게 힘들어하는 것 같지만 나는 그런 것에는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애당초 어떤 것에 깊게 푹 빠지는 스타일도 아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그런 자리를 자주 만들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코로나와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인간관계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책, 강연들도 많이 보이고 그에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서 반대로 더 편해진 점도 있다. 뭔가 내 삶의 방식이 인정 받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실 코로나가 나를 제일 고통스럽게 하는 부분은 내 일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난 지금의 사태로 인해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사업을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꼬박 일 년째 반백수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일거리가 없어진 것과는 별개로 어느 시점까지는 직원들의 월급이라든지, 사무실 임대료라던지 고정 비용이 계속 나갔기 때문에 생각보다 큰 돈을 손해 보게 되었다.

이런 돈과 관련된 부분도 당연히 스트레스였지만 실제로 더 크게 다가온 부분은 일을 못 한다는 사실이었다.

 

바쁘게 출장다닐 때가 있었는데...


  이는 내가 대단히 부지런한 워커홀릭이라서가 아니다.

  이는 자존감과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직업이나 직책, 연봉, 그보다 더 노골적으로는 옷차림이나 타고 다니는 차 등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다들 말한다. 하지만 내 경험상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서 서로의 심상을 알아내는 건 꽤나 큰 노력을 필요로 할뿐더러 종종 불가능한 경우도 많다. 그럴 필요조차 없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많고... 나 역시도 이런 방법만큼 더 간단하고 편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소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기에 누군가에게 스스로를 드러낼 때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성과를 은연중에 가볍게 흘리곤 했다.(옷차림이나 차에는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걸로는 날 드러내기가 쉽지 않다... 내가 똑같은 티셔츠와 바지를 여러 벌 가지고 돌려 입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간혹 더 신기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호기심 역시 번거롭다.) 


 그리고 내 직업과 연봉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대단하게 보든 아니면 하찮게 보든 관계없이, 내가 그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부심에 얼추 비례한 적당한 바람막이가 되어 줬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은 결과가 나쁘지 않다는 전제하에 적당히 포장을 하면, 열심히 일하면 열심히 일하는대로 슬렁슬렁 일하면 슬렁슬렁 일하는대로 괜찮은 평을 받기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만큼 이뤄놓고도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런 느낌으로 극단적인 건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정도)'으로 슬렁슬렁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시간에 비해 굉장히 효율성이 높은 사람(이 쪽으로는 타이탄의 도구들의 팀 페리스 정도)'으로 보이는 것 말이다.


 2018년에서 2019년의 나는 전자를 1, 후자를 10으로 표현한다고 하면 한 6~6.5 정도에 걸쳐 있는 사람이었고 가능하면 조금씩 조금씩 10으로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일을 해야 할 때는 며칠이고 연속으로 하루에 18~20시간 가까이 일하기도 하면서, 반대로 급하고 중요한 일이 정리되면 어떨 때는 거의 보름 또는 그 이상을 하루에 1~2시간만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냈다. 이러다 보니 내 자세한 생활 패턴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아빠하고 엄마가 둘 다 맨날 애랑 붙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곤 했다.


 이 정도의 일과 삶의 균형이 나의 자존감과 자존심의 바탕이었다.

 나쁘지 않은 수입을 유지할 수 있으면서 아이와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빠이자 남편

 개인적으로 내가 어렸을 때부터 꿈꿔 왔던 멋진 남자, 진짜 남자라는 건 이런 모습이었다.

 이런 남자는 어느 한 면에서 특별한 능력이나 성과가 필요하지도 않고, 노력을 한다면 누구가 다가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허황된 꿈이라거나 겉멋에 가득 찬 말도 안 되는 이상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상향을 향해 가는 길을 따라 열심히 나아갔고,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 자체가 내 자존감과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그 길이 끊겨버렸다.

내비게이션을 보며 천천히 차를 운전해 목적지로 순조롭게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고래에 차가 부딪힌 느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사고를 당한 느낌.

어찌어찌 차를 고치면 다시 나아갈 수는 있겠지만 제대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시 길을 나아가지 못할 거란 생각이 몸을 감쌌다. 내가 타고 있던 그 차는 우리 가족에게는 딱 맞는 편안한 차였기에 적당한 속도로 가면 이 여정 자체가 그리 나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예상 도착 시간보다 훨씬 일찍 목적지에 도착해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며 주변 구경을 할 수 있을 정도였고, 아니면 중간에 휴게소 몇 군데 거쳐 맛있는 명물들 하나씩 맛보면서 느긋하게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차가 내가 고치거나 그게 안 된다면 끌고 가야 할 너무나 무거운 쇠덩이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고장 난 차 안에서 에어컨도 히터도 켜지 못한 채 날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아이가 있었다.

내가 정해놓은 목표로 가는 길은 커다란 장애물에 막혀 바로 다음 표지판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나를 비롯해 누구 하나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없었다. 이런 상황이 날 좌절하게 만들었고, 끊긴 길과 함께 내 자존감과 자신감의 원천 역시도 끊겨버린 것 같았다.

이런 코로나 사태가 터지고 몇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처음에는 이 사태가 여름이나 가을쯤이면 끝날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기도 했고, 한편으로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지금은 다들 알고 있듯 이 건 누구도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또 하루아침에 끝날 그런 부분도 아니었다. 아마 난 지난 6~7월 경에 '그 고래'가 앞으로 1~2년은 길을 터주지 않겠다는 걸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정해두었던 목표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겉으론 는 아무렇지 않은 듯 지냈지만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냈다고 생각하지만 아내는 내가 그 기간에 굉장히 예민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바닥을 친 것인지 모든 걸 내려놓고 주변을 조금 더 보기 시작했다.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져버리면서 모든 것이 다 엎질러졌다고 생각했는데, 천천히 살펴보니 일은 무너졌지만 삶의 영역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건강했고 통장에 잔고가 넉넉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는 버틸 수 있을만한 정도의 돈도 있었다. 그리고 일을 다 뺏겨버리자 시간이 너무 많아졌고, 여전히 그 시간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 일이이라는 것도 내가 원래 하던 그 '일'에 한정해 당장 경제적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빼고 나면 후일을 위해 공부를 할 수도 있었고 운동을 할 수도 있었으며 다른 일들 준비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다 제처 놓더라도 무엇보다 하루 종일 집에 있는 나를 신나서 똘똘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 딸이 있었다.

이제 만 2살 남짓 된 아이에게 코로나가 준 세상의 우울함은 굉장히 간단했다.

자주 만나던 친구들을 못 만나고 놀이터를 못 가고 매주 가던 문화센터와 짐보리에서 신나게 뛰어놀지 못하는 것과 밖에 나갈 때마다 갑갑한 마스크를 써야 한다는 것들 뿐이었다.

그런데 친구보다 훨씬 더 재밌으면서, 두 팔과 두 다리가 놀이기구 몇 개쯤은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고(들고 스쿼트 = 자이로드롭, 안고뛰기 = 아틀란티스, 이불에 앉혀서 끌어주기 = 후룸라이드 등등, 내 놀이들이 이런 놀이기구와 정도의 스릴을 안겨줄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진심), 문화센터와 짐보리 커리큘럼에도 익숙해 얼추 비슷하게 흉내 내줄 수 있는, 거기에 애당초 아이에게 최고의 장난감인 아빠가 주체 못 하는 시간을 가지고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자 바닥으로 떨어지던 자존감은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여름에 거의 매일 같이 다니던 미니 텃밭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가 깔깔거리며 웃다가 뒤로 쓰러지게 만드는 것도, 둘 다 속옷만 입고 말도 안 되는 음과 가사로 춤을 추며 노는 것도, 욕조에 앉아서 비누 거품으로 욕실 벽에 구름과 달님과 해님을 만드는 것도, 다른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도 나만이 할 수 있거나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이전에도 물론 해왔던 것이지만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더 많은 둘만의 놀이를 만들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6개월 이상의 시간이 지난 지금 아이는 낮잠을 자던 엄마가 밖으로 나오면 아빠하고 둘이 놀고 싶다고 다시 방으로 엄마를 밀어 넣거나, 둘이 붕붕이 타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고 싶다고 아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거나, 오늘 밤 꿈에 겨울왕국에 가서 자기는 엘사와 놀 테니까 아빠는 안나랑 같이 놀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나는 생각한다. 안 그래도 이쁜 내 아이를, 그 아이가 커가면서 제일 사랑스럽다는 3살에서 4살의 그 짧은 시간을 오롯이 함께 보낼 수 있게 된 사실에 감사하자고...

난 지금 이 시간이 앞으로 아이와 내가 함께 지낼 시간을 이자까지 붙여서 더 끈끈하게 만들어주리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지난 일 년간 아무 일 안 하고 지낸 사람 같겠지만 나름 난 지난 일 년 365일 중에 355일 이상은 모든 식사를 내 아이와 아내와 함께 먹었고, 2일을 제외한 나머지 날은 아이의 목욕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자랑할 수 있는 남자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