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맑음 Dec 15. 2020

나주선을 아시나요?

다가오는 연말선물 필수템

 네 살 어린 동생들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나주선이 어쩌고저쩌고했다. 곧 나에게 물었다. 첫 월급을 받는데 맥북을 살까, 말까요? 나는 사라고 했다. 몇 시간 뒤에 계속 고민하는 게 보였다. 맥북을 왜 사냐고 물었더니 나주선이라고 했다. 나에게 주는 선물의 준말이란다. 인터넷에 검색해봤는데 잘 안 나왔다. 얘네들은 가끔 자기들끼리 쓰는 말을 ‘인싸’용어처럼 쓴다. 연예인들이 유행어를 퍼트리는 것 마냥. 나는 겉으론 별걸 다 줄인다고 핀잔주며 집에 가서 나주선을 되뇐다. 나주선은 나에게 주는 선물. 참나. 별다줄.          


 어릴 적 할머니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집 앞마당을 쓸었다. 추웠던 기억이 있으니 가을이나 겨울의 오후 네다섯 시 경인 것 같다. 쓸다 보니 앞집, 그 옆집, 꽤 많이 쓸었다. 이 모습을 보면 할머니가 더 많이 칭찬해주시리라 생각했다. 할머니가 마침 집으로 돌아오시며 나를 봤다. 할머니! 하고 불렀고 할머니는 노발대발 화를 냈다. 코를 훌쩍이며 집을 돌아오니 할머니가 왜 남의 집 마당까지 쓰냐고 계속 화를 내셨다. 나는 뭐가 잘못된 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네가 마당쇠도 아니고 왜 남의 집 마당까지 쓸어, 하고 소리치셨고, 나는 왜 혼나는지도 모른 채 다락방에 가서 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속상하셨던 것 같다.          

 ‘응답하라 1988’을 보면 퇴근길 성동일(주인공 덕선의 아버지 역)이 항상 뭔가를 사 온다. 시장통에 있는 할마시가 나물을 다 못 팔아서 남은 것들을 사 오고, 친구가 파는 태교 테이프, 지하철에서 청년이 파는 잉크를 지울 수 있는 용액들을 사서 가져온다. 빚보증 때문에 반지하에서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아이들 수행여행비를 걱정하고 한 푼 한 푼 아끼며 사는 이일화(주인공 덕선의 어머니 역)는 왜 이런걸 사 오냐며 화를 낸다. 없는 살림에 부처님 나셨다고 소리를 지른다. 그 외침이 참 와닿았다.      


  나의 지난 인간관계 얘기를 하면 하나같이 한숨을 쉬거나 술을 마신다. 나는 퍼주는 걸 좋아했다. 내 돈과 시간을 다 써가며 퍼주고 뿌듯해했었다. 같은 칭찬도 나 자신이 나에게 하는 것보다 남들이 해주는 것이 훨씬 와닿았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보기엔 나도 성동일처럼 보였겠지. 이제 와 돌이켜보니 다들 곁에서 지켜보며 속이 타들어 가고, 답답했겠다 싶었다. 그 모습을 다 알고, 과거의 내 못난 모습을 호구라고 놀리지만, 아직 곁에 있어 주는 이들이 요새는 참 감사하게 느껴진다.     

 중학생 때 지하철에 파는 물건을 집에 사서 가져왔다가 엄마와 아빠한테 혼났던 기억이 났다. 한 면은 영어로 되어 있고, 한 면은 한글로 되어 있는 책이었다. 옆에서 사람이 보면 영어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노렸다. 호구는 또 그걸 샀고, 집에 가져왔다. 엄마는 지하철에서 물건을 사서도 팔아서도 안 된다고 가르쳤고, 동시에 아빠와 웃었다. 지금까지도 그런걸 사 왔었다고 놀린다.         

       

 올해는 선물을 많이 받았다. 연락을 잘 하지 않던 친구가 카톡으로 연락이 왔다. 원래 필요한 말 이외에는 잘 하지 않는 사이다. 역시 용건만 왔다. 그런데 상품권만 왔다. 상품권 메시지에는 은혜 갚은 까치라고 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금액을 보고 깜짝 놀라 전화를 했다. 원래 우리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사이라 갑작스러운 나의 전화에 친구가 어색한 듯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이게 뭐냐고 묻자 작년에 본인이 취업하지 못했을 때 내가 샀던 밥들이 고마워서 첫 월급을 받자마자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금액이 너무 많다고 하니 너도 많이 샀다며 끊으라고 했다. 지난주에는 막냇동생이 월급을 받은 기념으로 가족들에게 용돈을 줬다. 나와 동생에게까지 줘서 엄마가 무슨 언니들한테까지 주느냐고 했다. 이 정도면 진짜 호구는 아니다 싶다. 베푼 만큼 돌아오긴 한다. 나중에 막내는 언니, 내가 준 용돈으로 뭐 할 거야? 라고 물었는데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친구가 줬던 상품권도 두 달째 못 쓰고 있었다. 감동하여서,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써, 라기보단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밥을 사 먹거나 하기엔 좀 그렇고. 나한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한창이다. 호구는 할 게 없어졌다. 사람들을 만날 수 없으니 밥을 살 수도, 놀러 가서 문득 생각나는 사람의 선물을 사러 갈 수도 없다. 연말연시가 다가온다. 매년 친구의 별장에 가서 놀고, 선물도 주고받았는데 올해는 할 수 없겠네. 문득 나주선이 생각났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는 나주선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딱히 선물이 될 만한 게 없었다. 가끔 나에게 보상으로 뭔가 선물을 준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금방 머릿속에서 잊혀졌다. 평소에 필요한 밥을 사 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남들한테 밥 사는 건 안 아까우면서 내가 필요한 물건을 살 때는 고민한다. 베품으로서 돌아오는 기쁨이 나에게 정말 득이 될 수 있을까. 친절도 이기적이라는 말이 있던데 나는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인지, 내 마음이 편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내 주위에는 힘든 일을 끝내면 자신에게 선물을 주는 Y가 있다. 조언을 구했다. 나의 상황을 말하고 너는 나주선을 할 때 어떻게 그렇게 진심으로 해? 라고 묻자 몇 가지 팁을 주었다. 첫 번째로 평소에 살 수 있는 건 사지 말고 사치품을 한 번 사봐라. 그럼 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두 번째로는 너무 과소비하지는 말고, 우선순위로 모을 돈은 제외하고 사용해라. 사고 나서도 후회가 없고 선물을 받고 나서도 찝찝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선물을 주며 수고했다고, 정말 고생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면 된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고 내 경험치에 빗대보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물건을 산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왜 똑같이 적용이 안 됐을까? 아마 물건을 사기 위한 합리화라고 느껴진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나주선은, 꼭 보이는 것일 필요는 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도 나주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이런 행위들을 할 만큼 열심히 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기준점이 높아 당위성이 충족되지 않았다. 변명이나 자기 위안으로 느꼈던 것 같다.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선물도 받아 본 사람이 받을 줄 안다고, 나는 아직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에 익숙하지 않았다. Y는 어릴 때부터 돈을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도 습관적으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 작게나마 있었고, 자기 자신에게 감사하게 받을 줄 알았다. 나는 그게 잘 안되는 사람인가보다. 

    

 어렸을 때부터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지금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늘 그렇듯 처음엔 어색하더라도 나중엔 정말, 진심으로 나 자신이 수고했고 선물을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부터 나주선을 시작해보기로 했다. 올 한해 나는 정말 수고하긴 했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Y들의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