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독서실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거슬리는 소리가 가끔 근무시간에 내 고막을 자극하는 일이 있다.
나는 귀가 밝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이 특정 소리가 한 번 들리기 시작하면(보통 이런 상황을 '귀가 트였다'라고 표현함), 'listening'이 아니라 'hearing'을 거부하고 싶어도 당최 거부할 수가 없다!
탑티어 소음공해는 바로 '슬리퍼 끄는 소리'이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적어도 6시간 이상은 실내에 있어야 해서, 보통 대부분의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슬리퍼를 신는다. 그런데 이 슬리퍼를 신고 유독 신발 끄는 소리를 많이 내는 사람들이 있다. 스윽 사악하는 소리가 있는가 하면, 딸깍딸깍 하는 소리도 있다. 소리의 종류 또한 각양각색이다.
슬리퍼 공해의 피해자 몇몇 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의 결론은, 이 상황은 슬리퍼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의 같은 종류의 신발을 신어도 소리를 내는 사람만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음공해의 원인제공자들은 슬프게도 본인의 소리가 얼마나 괴로움을 주는지 모른다. 우리 피해자들(?)은 소리가 고막을 뚫고 뇌 속 어딘가 까지 도달해서 미간을 자극하게 되는 순간마다, 눈빛을 교환하며 눈으로 말한다.
'저 슬리퍼 창문 밖에 던져버릴까...'
그 순간의 고비가 넘어가고 소리가 나지를 않으면 금방 그 괴로움을 잊고 다시 업무에 집중이 되긴 한다. 그렇지만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는 조건이 달라지지 않으면, 거의 매일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매일 한 번씩은 눈을 감고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크게 들숨과 날숨을 쉬며 고비를 넘겨본다.
'아... 메신저로 조심해달라고 말을 할까?'
직접 말을 할지, 메신저로 말을 할지, 고민하는 수준까지 오게 되는 날은 눈을 질끈 감고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나의 사회생활을 망치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그 공간에서 잠시 떠나기도 한다. 탕비실에 가서 물을 한잔 마신다거나,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거나.
웃프게도 어디론가 떠나려고 엉덩이를 떼면, 나와 같은 피해자를 종종 마주친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아 역시 너도...'라는 마음속의 하이파이브를 외친다. 그 자리에서 계속 남아있다가는 분노가 급발진해버려서 소리라도 지를 것 같기에, 우리는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 잠시 대피한다.
그러다가 한 번은 피해자 중 1인이 더 참지를 못 하고 직접 이야기를 했었다.
유독 심하게 바닥을 청소하는 소리가 울렸던 그날. 피해자 경은미 선임이 제1의 원인제공자에게 직접 메신저를 했다고 말했다.
"저 있잖아요... 결국 제가 참지 못 하고 메신저로 진태윤 선임한테 슬리퍼 소리 좀 조심해달라고 말했어요..."
"진짜요??? 대박이다! 진선임이 뭐라고 했어요???"
"대답은 멀쩡하게 왔어요. '아, 죄송합니다. 신경 쓰겠습니다.'라고요."
"뭐야... 그런데 왜 달라진 게 없지? ㅎㅎㅎㅎ"
"그러니까요.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각자 잘 버팁시다 우리..."
정확한 문장으로 메시지를 보냈고, 그에 대한 시정조치를 약속받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직도 여전히 사무실에서 그의 슬리퍼 소리는 청량하게 여러 개의 고막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나도 아직도 가끔은 '저 슬리퍼 바닥에다가 밤에 몰래 와서 본드를 붙여놓을까', '퇴근하고 나면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까'하는 상상을 한다. 그만큼 그 순간이 오면 견디기가 쉽지가 않고 매 순간이 고비이다.
그리고 나는 주변에 소음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신발도 체크하게 되었다. 남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영역인가 보다. 진선임님이 슬리퍼 질질 끌면서 여기저기 활보하며 일할 때는, 피해자 모임이 비공식적으로 자연스럽게 결성이 된다. 다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대피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국 이후로 도입한 재택근무 제도로,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근무를 하는 날이 오면 기분이 너무 좋다. 왜냐? 듣고 싶지 않은 슬리퍼 소리를 안 듣고 내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서 너무 신나기 때문이다.
나도 내가 슬리퍼 소리 때문에 이렇게 괴로워하고 도를 닦는 기분으로 위기의 순간을 넘기게 될지 몰랐었다. 언제쯤 내 고막이 편안하게 사무실 생활을 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