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기울이면
둘째가 중학교에 입학했다. 처음 보는 친구도 1시간이면 친구가 되는 사교성 좋은 둘째라 중학교라고 해도 크게 학교생활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입학 후 며칠 뒤 아이가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엄마 내 이야기 좀 들어줘.”하고 대화를 요청해왔다. 살짝 긴장하고 들은 아이의 이야기는 이랬다. 같은 반 친구 한 명이 입학한 첫날부터 “야 나 반장 할 거니까 너희들은 나오지 마. 다 나 찍어 줘.”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학급 임원과 전교 임원들 두루 다 하고, 명예욕(?)이라면 뒤지지 않는 둘째도 반장선거에 나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친구가 먼저 그렇게 말을 해버렸으니 반장선거에 나가기가 애매해졌다는 것이다. 자기가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반장선거에 나가면 그 친구에게 미움을 받을게 뻔하닌 싫다는 것이다. 게다가 수학 선생님 심부름으로 수업 자료를 나눠주는 둘째에게 “야 XXX, 우리 반 반장은 내가 할 거니까 너는 나대지 마.”라며 공개적으로 무안을 주는 말을 하거나, “어, 안물”이라며 둘째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여 기분이 상한다는 것이다. 그 친구도 반장 선거에 나갈만한 둘째를 알아채고 은근하게 경쟁하는 모양새 같았다.
둘째 이야기를 들으며 도움을 주고 싶어 이런 저런 방법들을 알려주었는데 둘째는 그 방법들이 다 신통찮은 듯했다. 도움을 주고 싶은 나도 답답하고, 도움이 도움이 되지 않는 둘째도 답답해 큰 애를 불러 물어보았다. 큰 애는 둘째의 걱정과 우려가 다 맞는 말이라며 둘째 손을 들어주었다. 아이고,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친구 관계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내가 하는 이야기는 죄다 꼰대스러운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결국 나는 이렇게 외치고 말았다. “엄만 도저히 모르겠어. 지금은 어떤 조언도 너한테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 엄마는 그냥 잘 들어 줄게.”
클로버는 숲속의 작은 농장에서 염소 수만큼 많은 언니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쉽게 말하는 언니 오빠들 앞에서 클로버는 우물쭈물한다. 하나만 고르는 것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숲에서 놀던 클로버는 염소 모란이를 발견하지만 모란이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모란이를 찾아 숲속으로 들어간 클로버는 매번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사춘기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은 내가 하는 이야기들에 수긍보다는 반감이나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게 많아졌다. 처음엔 서운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나에게 정답이었던 선택은 내 인생에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세상과 아이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다르고, 내가 경험했던 친구 관계와 아이들이 경험하는 친구 관계도 다르다. 서운함보다는 사실 내가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무력감이 먼저 들었고, 아이가 감당해야 하는 이런저런 어려움들이 안타까웠다.
둘째는 결국 반장 선거에 나갔고, 반장이 되었다. 반장이 되어 축하한다는 말보다 그 친구와 불편해질 일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의 말이 먼저 나갔다. 아이는 “알아, 그런 거 다 예상하고 나간 거야.”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이 책의 클로버처럼 아이는 스스로가 정답을 찾아 길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클로버도 큰 나무에게, 졸졸 흐르는 개울에게,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게 “귀 기울여 들을 테니 말해봐.”라며 도움을 청한다. 나무와 개울과 바람은 클로버에게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 주었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클로버가 길을 찾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이런 것이 아닐까. 나의 경험치로 아이들의 삶에 섣부른 조언을 하지 말고 가만히 들어주는 것, 아이가 부탁하면 곁에 있어 주는 것, 그래서 다시 힘을 내어 자신의 삶을 뚜벅뚜벅 걸어갈 때 믿고 응원해 주는 것 말이다.
내게 <귀를 기울이면>은 내면의 소리를 듣고 길을 찾아 떠나는 아이의 이야기면서, 그런 아이를 안아줄 커다란 품을 내어주는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