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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꿈 Jan 26. 2024

세 번째 편지

나이가 들면 어때요?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산타클로스는 할머니, 순례씨

Y 선생님께

선생님 어제는 잘 가셨어요? 저는 아무도 없는 책방에서 어제 우리가 나눴던 정겨운 대화와 꽃망울 터지듯 퍼지던 웃음소리를 다시 떠올리고 있어요. 커트 머리에 장난끼 가득한 눈망울, 귀엽고 사랑스럽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모습도요.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사노 요코 작가의 그림책이 떠올랐어요. 사노 요코 작가의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선생님이 닮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책방에 오자마자 책을 한참 찾아봤지요. 그런데 선생님과 딱 맞는 캐릭터는 없었어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던 걸까요?  

   

그러다가 제가 사노 요코라는 작가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요. 에세이나 그림책을 보면서 느꼈던 사노 요코는 까칠하고 냉소적이고 솔직하고 따뜻하지만 여린 사람이었어요. 냉소를 빼고, 유쾌하고, 씩씩하고 잘 웃는 모습을 추가하면 선생님이지 않을까요? 편지를 쓰면서 보니 딱히 사노 요코랑 선생님은 닮은 것 같지도 않아요. 오늘은 뭔가 참 뒤죽박죽이네요.   

  

오늘 찾아본 그림책 중에는 사노 요코 작가의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가 있어요. 98살 할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 낚시 대신 나무 아래 의자에 앉아 맞게 콩꼬투리를 까다가 우연한 사고(?)로 5살이 되는 할머니지요. 5살이 되었다는 핑계를 대긴 하지만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을 하며 즐거워하는 할머니를 보면 응원하게 돼요. 할머니가 다음에는 또 뭘 해버릴까 기대되기도 하고요.   

  


작가의 다른 그림책 ‘산타클로스는 할머니’중에서도 남자들만 해 왔던 산타클로스에 지원하는 할머니가 나와요. 제일 성질 고약한 순록을 타고 가장 먼저 앞에서 달려 나가는 씩씩함과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다정함과 따뜻함을 가진 이 할머니에게 반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냥 우리 할머니 같은 ‘순례씨’도 있어요. 할머니가 툭툭 던지는 짧은 말 한마디와 깊게 팬 주름만으로도 우리는 할머니의 고단한 삶을 한 번에 다 이해하게 돼요. 무언가를 이루고 무언가가 되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삶 그 자체로 존경과 감동을 주지요. 저도 그렇게 순례씨처럼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겠다고 용기를 얻어요.     

이렇게 편지를 쓰다 보니 알겠어요. 선생님은 사노 요코의 모습도, 그림책 속 멋진 할머니들의 모습도 조금씩 다 가지고 계신 거 같아요. 그래서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서 선생님은 그 자체로 선생님만의 그림책에서 선생님만의 주인공이셨어요. 어제 선생님이 저에게 ‘선생님이 장르가 되면 되죠.’라고 하셨던 것처럼요.     


예전에 저는 7~80대 어르신들과 집단상담프로그램을 5년 정도 했었어요. 많은 어르신을 만나면서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 ‘어떻게 살아야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까?’ 이런 고민을 했어요. 나보다 먼저 50대, 60대를 맞이한 사람들을 어떤 일을 하고, 어떻게 여가를 보내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러다 닮고 싶은 인생 선배를 만나면 참 반갑고 좋았어요. 그분들의 삶은 그 자체로 저한테 방향이 되어 주었거든요. 선생님도 저한텐 그래요. 그림책 공부 다시 해보자고 주춤거리는 저를 끌어주시는 것도, 밀가루 음식 먹는다고 따끔하게 혼내주시는 것도, 이 추운 날 이 먼 길을 달려와서 다정하게 마음을 전해주시는 것도 다 배우고 싶고 따라 하고 싶은 모습이에요. 솔직하고 까칠하게 하고 싶은 말들을 하시는 것도요! 저는 속으로 구시렁거리기만 하거든요.     


‘나이가 들면 어때요?’하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참 좋아요. 선생님 근처에 살면서 일이 있을 때마다 쪼르르 달려가고 싶다고 했던 말은 진심이에요. 선생님 걱정하시지 않게 음식조절 잘하면서 남은 치료도 잘할게요. 선생님도 건강히, 지금처럼 멋지게 우리의 왕언니로 잘 지내고 계세요. 우리 또 만나요.   


2024년 1월 26일

그림이 글에게 책방지기 드림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

사노 요코 (지은이), 엄혜숙 (옮긴이), 상상스쿨, 2017-02-25 원제 : だってだってのおばあさん

산타클로스는 할머니

사노 요코 (지은이),이영미 (옮긴이), 어린이나무생각, 2021-11-11

순례씨

채소(지은이), 고래뱃속,2022-10-24

나이가 들면 어때요?

베티나 옵레히트 (지은이), 율리 푈크 (그림), 전은경 (옮긴이), 라임, 2023-02-28


본문에 사용된 그림책 이미지는 출판사 제공 이미지를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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