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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망고 Oct 22. 2020

사소한 친절

주말에 일이 있어서 종각 엘 갔었다.  


번잡한 도시는 여느 때처럼 소란스러웠고, 가을 햇살은 따사로웠다. 


거리의 가로수들은 누런 잎을 떨구며, 또 형형색색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일찌감치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가을바람을 느껴보려고 코를 흠흠거렸지만 코끝을 스치고 달아나는 건 진한 커피 향이었다. 나는 바람결에 다가오는 그 향기를 음미하며 발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친근한 카페가 보였다. 


나는 순전히 커피 향에 이끌려 몽유병 환자처럼 카페 쪽으로 걸어갔고, 의식이 몽롱한 상태로 카페 문을 힘껏 잡아당겼다. 문틈을 비집고 나왔던 익숙한 향기가, 쏟아지는 폭포처럼 와락 내 전신을 덮쳤다.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한 예의 그 커피 향과 카페를 점령한 재즈의 향연 속으로 나는 빨려 들어갔다. 


드문 드문 의자가 놓인 카페는 거의 빈자리가 없었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커피 분쇄하는 소리,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 등으로 산만했다. 그 속에서 나는 더 짙어진 커피 향과 재즈 선율에 내 영혼을 걸어놓고 잠시 흔들거렸다. 


나는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고 조금 기다리다가 빈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근처에 탑골 공원이 있어서인지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많이 보였다. 내 옆자리에도 깔끔한 옷차림에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새로 산 듯한 중절모를 쓴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는 손목의 시계를 두어 번 확인하시더니, 목을 쭉 빼고 출입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테이블 위는 깨끗했다. 


“할아버지…… 저 괜찮으시면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려도 될까요?”


나는 이 아름다운 가을날, 불현듯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고 싶었다. 




그건 아마도 며칠 전, 아침 출근길에 내게 우산을 씌워준 그 남자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에서 일제히 우산을 꺼내 썼다. 나는 에코 백으로 궁색하게 정수리를 가리고 인파에 섞여 잰걸음으로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졌다. 내가 발걸음을 좀 더 빠르게 움직이려고 했을 때, 누군가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면서 말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우산 같이 쓰실래요?” 


'엄마야......' 

나는 머리 위의 가방을 슬며시 내려 어깨에 걸치고, 그 남자와 보폭을 맞춰 사무실 쪽으로 걸었다. 나는 얼떨결에 훤칠한 키의 낯선 남자와 가을빗속을 걷게 되었다. 


파란 우산 아래로 서로의 입김이 교차되고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우리는 서로 종이 한 장 두께의 거리를 두고 조심스럽게 걷다가 어깨와 엉덩이를 살짝이 부딪치기도 했다. 오분 정도를 함께 걸었을까, 내가 아침마다 커피를 사는 카페가 보였다. 


“저 괜찮으시면 제가 커피 한잔 사드려도 될까요?”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지만,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회의가 있다며 사양했다. 남자는 나를 카페 앞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출근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묘한 설렘과 아쉬움, 또 고마움이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쫓아가서 전화번호를 물어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남자는 이미 내 시야에서 사라진 후였다. 





낯선 사람의 뜻밖의 호의에 할아버지는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냥요, 제가 그냥 사드리고 싶어서요.” 


“왜 나에게……? 그럴 것 까지는 없는 데…….”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로 가서 카라멜 마끼아또를 한 잔을 주문했다. 곧 커피가 나왔고, 나는 할아버지 앞에 조심스럽게 커피를 내려놓았다. 


“괜찮대도…”  


“제 마음대로 달달한 카라멜 마끼아또로 샀어요.” 


“이런 고마울 때가…… ” 


할아버지는 커피를 들어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얼굴이 환해지셨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먼저 카페를 나왔다.




할아버지는 얼마 동안 눈치 안 보고 자리에 앉아 계실 수 있을 터였다. 또 커피 한 잔에 조금은 행복하고 기쁘실 거였다. 덩달아 오늘은 친구에게 또 가족에게 자랑할 이야기도 생기셨을 거였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하늘에 두둥실 떠 있는 구름처럼 가벼웠다.


누군가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행복하다고 했던가. 내가 베푼 건 단지 사소한, 그저 한 잔의 커피였지만, 그로 인해 할아버지는 또 누군가에게 진심 어린 덕담이나 또 다른 친절을 베풀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나는 낯선 타인에게 받았던 친절을 할아버지에게 갚음으로써, 또다시 누군가에게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수 있는, 내 운의 그릇을 조금 더 키울 수 있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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