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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신 Aug 20. 2020

카페 사장님은 나를 알까?

저 사장님 카페 단골이에요.


대학 다닐 때 좋아하던 카페가 있었다. 그 카페는 지하에 있는 8평 남짓한 공간이었지만 우리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거의 다 아는 유명한 카페였다. 글로벌 카페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에도 여전히 다방스러운 인테리어와 메뉴를 고수했다.

"야, 동아리 선배가 좋은 카페 알려줬어. 가자"

대학 와서 처음 사귄 친구 양승혜가 나를 그 카페로 인도했다. 누구의 소개가 아니면 솔직히 갈 일도 없고 찾기도 힘든 카페였다. 카페에 처음 들어선 순간, 난 그곳을 오랫동안 자주 오게 될 거란 걸 알았다. 달달한 커피를 마시면서 카페 벽에 내 첫 족적을 기념하는 위대한 기록을 남겼다. '2005년 3월, 00랑 00 왔다감'

그 카페에 있는 투박한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낡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테이블과 갈색 가죽의자, 그 위를 비추는 웜톤의 불빛, 낙서로 빽빽한 벽, 늘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 그리고 그 여 사장님.

지하로 통하는 나무 계단을 지나 카페 문을 열면 사장님이 커피 잔을 꺼내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우리를 흘끔 쳐다봤다. 그러면 나도 흘끔 보고는 앉을자리를 스캔했다. 자리를 잡으면 사장님이 어느새 유령처럼 다가와 메뉴판을 스윽 놓고 가셨다.

큰 키, 표정 없는 흰 얼굴, 허리까지 늘어뜨린 검은 생머리, 정갈한 옷차림 때문에 우리는 사장님을 '프란체스카'라고 불렀다. 카페에 흘러나오던 클래식과 사장님이 풍기는 아우라가 더해지면 어느덧 나는 루마니아 뱀파이어 성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장님이 인간 행세를 하기 위해 낮에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지만, 해가 지면 카페 바닥에 숨겨진 비밀의 문을 열고 지하 통로를 지나 성으로 가서 검은 드레스로 갈아 입고 꽃으로 장식된 관에서 잠드는 상상을 했다.

메뉴도 뭔가 특이했다. 보통 카페에 가면 아메리카노, 카페라테, 카페 모카 이렇게 시작되기 마련인데 여기는 메뉴판에 브라질 커피, 카페 로얄, 아이리쉬 커피, 커피 펀치, 카페 글로리아, 카페 칼루아, 스트림 오브 라인 같은 이름들이 즐비했다. 그 커피들을 다 맛보진 않았지만 먹어본 커피들은 다 맛이 좋았다. 혹시 유럽에서 커피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왕족들의 전담 바리스타로 일하다가 고국이 그리워 서울 골목 지하에 카페를 연 숨은 고수인가?

고급지고 앤틱한 커피 메뉴와는 별개로 이 카페의 대표 메뉴는 파르페였다. 기다란 컵에 주스 3분의 1 붓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두 스쿱 눌러 담고, 후르츠 칵테일 7개 얹고, 빼빼로랑 웨하스 꽂고 꼭대기에 통조림 체리 하나 올리고 마지막 장식용 우산까지 꽂으면 완성이다. 유럽 유학파 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은 다소 토속적인 파르페를 보면서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파르페는 한잔 먹고 나면 배가 부르기 때문에 식사 대용으로 주로 먹었다.

메뉴 결정이 끝나면 사장님을 부른다.
"여기요"
아무 대답 없이 걸어와서 주문하라는 눈빛을 보내신다.
"커피 펀치 하나랑, 콜드 모카 자와 하나요"
"네......"
가게에 들어서고 처음 듣는 사장님 목소리였다.

정성스럽게 내려지는 커피

오래 지나지 않아 우리가 시킨 커피와 곁들여 먹을 시나몬 비스킷이 같이 제공된다. 사장님이 만든 정갈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친구 어깨너머로 사장님을 다. 사장님이 파르페용 아이스크림을 퍼는 모습, 커피마다 다른 잔을 골라서 꺼내는 모습, 카드를 결제하고 손님에게 인사하는 모습, 어느 것 하나 서두르는 법이 없다. 혼자서 이 모든 일을 물 흐르듯이 해내는 모습이 신기해서 한참을 보았다. 그때 나는 사장님의 카페 주인 일상 vlog를 훔쳐보면서 사장님의 정체를 밝힐 단서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학교 근처에 지인이 오면 꼭 그 카페로 데리고 갔다. 많지는 않지만 나의 남친이었던 사람들도 그 카페를 한 번씩 거쳤다. 그렇게 자주 갔는데도 불구하고 사장님은 아는 척하는 법이 없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은 중립적인 표정으로 카페 주인으로서 할 일깔끔하게 수행해내고 셨다.


친한 남자 지인이나 선배랑 갈 때도 있었는데 사장님이 행여나 내가 올 때마다 남자 친구를 바꾸거나 양다리를 걸치는 것으로 오해할까 봐 괜히 일부러 "선배님! 여자 친구는 잘 있죠?"라고 큰소리로 얘기했다. 난 혼자서 사장님을 무지 신경 쓰고 있었다.

사장님이 주문하라는 눈빛으로 쳐다볼 때마다 궁금했었다. "사장님은 날 알까?" 

알건 모르건 아는 척을 해주지 않아서 부담 없이 그 카페에 자주 갈 수 있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같은 경우 카페는 커피 자체보다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혼자 조용히 왔다 가고 싶은 공간에서 누가 내게 말을 걸면 그 순간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그은 곧 감정적인 에너지를 빼앗긴다는 뜻이고 다음부터 그 카페는 여지없이 거르게 된다. 혹시 이런 매너와 경영방식도 유럽에서 배워 오신 건가?(끝없는 유럽 타령)


2010년 2월,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마지막으로 들른 것도 이 카페였다.
친구들과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대학시절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토크 박스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그 이야기에 몰입되어 왁자지껄 떠들고 웃고 난리가 났다. 한참 떠들다 문득 사장님 생각이 났다. 뒤돌아보니 사장님이 카운터에 가만히 앉아 계셨다.

'헐, 우리 얘기 다 들렸을 텐데. 내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나는 우리의 대화 내용 빨리 되감기 해서 복기해보았다. '아악' 갑자기 창피함이 몰려왔다.
내 중간고사 에피소드가 탁 걸렸다. 내용인즉슨 고대 동아시아사 중간고사를 치는데 갑자기 공부한 내용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거다. 머릿속이 백지가 되는 경험을 실제로 하게 된 것이다.  나는 "교수님.. 제가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게 아니라요... 정말 생각이 하나도 안 나요. 어쩌죠" 하면서 울었다. 그때 총각이던 강사님이 어쩔 줄 몰라하시면서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내게 10분을 더 주다. 결국 1시간+10분 동안 시험지에 '진시황제가'라고 주어 한마디만 쓰고 제출했는데 기말고사 때 만회하여 C뿔이나 받았다는 얘기를 방금 전까지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하... 사장님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수치심에 다시는 그 카페를 못 갈 것 같았고, 그날이 마침 졸업식인 게 다행이었다.




4년 뒤, 2014년에 나는 첫째를 임신해서 만삭의 몸으로 다시 그 카페를 찾았다. 사장님도 그 카페도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려고 사장님 눈을 바라보는 순간 또 궁금했다. '사장님은 날 아실까?' 사장님은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정으로 내 주문을 기다리 있었다.

'사장님, 이 카페 정말 그리웠어요. 저 결혼해서 좀 있으면 애기도 나와요. 저같이 애기 엄마 된 졸업생들도 종종 찾아오지 않아요? 다들 이 카페는 못 잊을 걸요? 오랜만에 오니까 옛날 생각나네요'

라고 속으로 사장님한테 계속 얘기했다. 침묵 상태이지만 마음으로 반가움의 넋두리를 실컷 해대고 나니 사장님도 왠지 나를 알아보고 나처럼 마음속으로 오랜만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유럽스러운 커피

그리고 5년 뒤, 2019년 봄에 학교 옆으로 이사를 왔다. 이제 잠옷 입고 슬리퍼를 끌고 갈 수 있는 거리에 그 카페가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그 카페는 레트로스러운 감성을 풍기는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었다. 그 카페 방문 감상평을 남긴 블로그도 많았고,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기도 하는 것 같았다. 너무 유명해지니 오히려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천천히 가야지.




그러다 최근에 그 카페를 갔다. 사장님은 긴 머리를 깔끔하게 말아 올리고 마스크를 끼고 계셨다. 옷은 단정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비슷한 원피스를 입은 젊은 알바가 메뉴판을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니 알바도 쓰는 모양이었다. 다행히 주문은 사장님이 받으러 오셨다. 역시 말없이 쳐다보셨다. 마스크로 가려서 눈만 보이니 사장님의 눈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장님 기에 눌려 순간 멍해진 정신줄을 다시 잡고 배에 힘을 준 다음 입을 열었다.

"파르페 두 잔 주세요"
"파르페에 들어가는 주스, 오렌지랑 파인애플 중에 뭘로 드릴까요?"
"네?"

갑자기 훅 들어온 긴 멘트에 외국어 들은 것처럼  얼어붙었다. 분명 한국말이었는데 뭔 말인지 못 알아 들었다. 사장님은 친절하게 차근차 다시 설명해주다.


"파르페에 주스가 들어가는데요, 오렌지랑 파인애플 중에 고를 수 있어요. 어떤 걸로 해드릴까요?"


사장님이 그렇게 말을 길게 하는 걸 처음 보았다. "오 오렌지 주스요"라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오렌지건 파인애플이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날 특히 놀란 건 사장님이 하나도 안 늙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뱀파이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15년 전 그때랑 똑같았다. 테이블을 비추는 조명 천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내부가 삭아서 찢어져 있었고 벽도 손때가 묻어 그때보다 더 새까맣게 변했지만 사장님은 변하지 않았다. 나만 늙 것이었다. 나는 또 속으로 사장님한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저 바로 앞 아파트 이사 왔어요. 애는 벌써 둘이고요. 이 카페 유명해졌더라구요. 메뉴랑 가격이 그대로여서 너무 좋아요. 근데 사장님은 어쩜 그렇게 나이가 안 드세요? 사실 사장님 별명 프란체스카였는데.. 혹시 저 기억하시는지..'

고요함 속에 내 마음을 전달하고 사장님을 바라본다. 이 카페를 그대로 보존 해준 사장님의 고집이 고맙다. 나를 설사 알더라도 모르는 척해주는 거면 더 고맙다. 그날 파르페를 먹고 와서 저녁은 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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