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그린 Jul 20. 2022

똑똑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돈과 신용(7)


아경이가 동생을 데리고 전세를 살 때 이야기다.


같이 살던 동생이 결혼하게 되면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각자의 회사까지 출퇴근 거리를 고려해서 아경과 동생의 회사 중간지점에 집을 구했던 터라, 이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침 전세기간 2년도 끝날 때라 집주인 할머니에게 계약해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전셋값이 천만 원가량 하락한 때였는데, 70대 할머니는 난색을 표했다.


“내가 빌딩을 사느라 돈이 모자라네.” 하면서 은행에서 천만 원을 대출받아 주겠다며 세입자인 아경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경은 보증금에 대한 세입자의 선순위가 변동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 절대 아니라고 해서 좀 긴가민가했지만 결국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반차를 내고 은행을 따라갔다.


그러나 역시 은행원이 아경의 얼굴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거 세입자의 보증금에 대한 순위가 후순위로 밀리는 것 아시죠?”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할머니는 딱 천만 원만 할 거라고, 아경이가 손해 보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아경은 바쁜 와중에도 어렵게 반차를 내고 왔는데, 미련 곰탱이 취급을 받으러 여기까지 왔나 싶어 화가 났다.


그리고 분명하게 말했다.


“안돼요. 그놈의 빌딩을 파시던지 해서라도 보증금 딱 맞춰주세요. 왜 사람을 속여서 회사까지 휴가 내고 여기까지 오게 만드세요”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아경을 쫓아오며 할머니가 불렀지만, 뒤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이런 일일수록 단호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아경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삿날이 점점 다가오자 아경도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서 할머니에게 관련 법에 따라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할 거고 이에 발생하는 손해배상도 소액재판으로 끝까지 받아낼 거라는 의사를 밝혔다.


내용증명서도 대충 써봤다.


결국 집주인 할머니는 보증금을 전액 마련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난 할머니는 부동산에 들어서는 아경을 보자마자 <젊은 사람이 나이 70 먹은 사람을 못 믿는다>고 난리를 쳤다.


아경은 인사를 한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이사하는 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할머니의 말에 대꾸할 정신도 없었다.


아경의 무대응에 할머니는 더 약이 올랐는지 이번에는 동생의 이사를 도와주러 온 아버지를 향해 소리 질렀다.


 “참 똑똑한 따님을 두셨습니다.”


몇 번이나 반복하며 그렇게 비아냥거렸지만, 부동산 안에 있는 아경과 아버지, 중개인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사무처리만 했다.


사무실 안에는 할머니의 무한 반복되는 말만 쩌렁쩌렁 울렸다.


그 와중에도 아경은 보증금을 받고 잔여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까지 꼼꼼하게 계산한 후 아파트 열쇠를 내주었고 무사히 이사를 할 수 있었다.


부동산을 나올 때, 아경은 예의 바르게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 그녀를 할머니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할머니는 자신을 믿는다고 아경을 비난하기 전에 아경을 거짓말로 속이고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으려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잊은 척 뻔뻔하게 굴었다.   


게다가 전세기간 2년 동안 아경은 할머니랑 딱 세 번 만났다.


계약체결일, 은행에 함께 간 날, 계약해지일 이 정도면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다.


집주인이 전세계약이 종료되었을 때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전액 돌려주는 것은 정해진 의무다.


집주인의 나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지치지 않고 화를 냈다.


자신을 철썩 같이 믿고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협조해 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부동산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열심히 계약서와 계산기를 두드리면서 돈을 세던 모습을 생각해보면 시트콤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아서 아경은 웃음이 나기도 했다.   


무슨 말을 듣던 보증금은 다 받고 이사를 무사히 마쳤으니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는 법이라는 것을 아경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부딪혀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경도 그날 할머니에게 한 마디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할머니, 저는 똑똑하지 않아요. 똑똑했다면 할머니를 따라 줄래 줄래 은행까지 가지 않았겠지요>


 

작가의 이전글 그래, 너 잘났다! 잘났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