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신용(10)
아경은 몇 해 전에 호기롭게 퇴사를 했다.
한 번은 회사 가기 너무 싫어서 출퇴근 셔틀버스가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실제로 셔틀버스가 멈추었다. 그것도 고속도로에서 말이다.
버스 기사가 이상을 감지하고 겨우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때 아경의 등줄기가 서늘해지고 오싹했던 것은 어두운 고속도로 갓길의 희미한 가로등 밑에 서서 맞닥뜨린 찬바람 탓은 아니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것은 어느 순간이 오자, ‘이러다가 내가 죽겠구나’ 싶었다.
업무에 지친 아경은 5층 사무실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회색빛 콘크리트 바닥에 피를 흘리며 누워 있는 자신을 보았다.
환영(幻影)이었다. 착각인가? 암튼 분명 보았다. 오죽하면 그러했을까 싶었다.
그러다가 곧 아경은 <내 머리통이 커서 창문에 끼겠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웃겨서 혼자 킥킥거렸다.
자신이 이렇게 죽어버리면 법정 상속인이 되는 언니가 아경에게 받은 유산으로 골프채 세트를 새로 사고 좋아서 깔깔거리는 모습도 상상이 되었다.
<그럴 수야 없지>
다음 순간, 아경은 깊은 내면으로부터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죽고 싶을 만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아경이 미친 것은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이드, 자아, 초자아를 이야기했고, 융은 인간에게 하나의 자아가 아닌 또 다른 자아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퇴사를 행동으로 옮긴 것은 그 이후였다.
5년 동안 아경은 친구들을 만나 <회사를 그만둘 거야!>라고 징징거리고는 여전히 회사를 다녔다.
친구들은 이제 아경을 <양치기 소년>처럼 여겼으며, 고맙게도 <또 시작이군>하는 표정으로 아경을 견뎌 주었다.
그 세월 동안 아경은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엑셀로 물가 상승률(약 4%로 잡았다)을 감안한 향후 생활비를 계산하고 저축과 퇴직금, 국민연금을 활용한 계획을 수립했다.
재테크에 영 재주가 없었기에 투자는 배제했다.
그러고 보면 아직 돈을 더 모아야만 했다.
그렇게 버티다가 아경은 정기 건강검진을 통해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난 것을 통보받았다.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아보면 좋겠다는 진단에 <이제 나 정말 회사 그만두어도 되는 거야>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그리고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는 신호를 보내는 와중에 발표된 아경의 <승진>은 결정적인 쐐기를 박았다.
아경이 퇴사하려고 하니 모두가 말렸다.
한창 인기가 있던 드라마 <미생>의 대사도 튀어나왔다.
“회사는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아깝다, 너무 아까워”라는 것이다.
아경은 아깝다는 것이 20여 년 넘게 쌓아온 경력과 향후 벌 수 있는 돈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경력은 사실 먹고살기 위해 일하다 보니 쌓인 것이니 아경에게는 그리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돈>은 달랐다.
아경도 돈을 좋아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열망했다.
여행을 좋아했던 아경은 밤하늘의 황홀한 오로라를 보고 싶었고, 잉카 제국의 신비로운 도시 마추픽추도 가고 싶었고, 아침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안나 푸르나도 만나고 싶었다.
그러려면 돈! 돈이 필요했다.
앞으로 10년은 넘게 더 일할 수 있었다. 연봉도 오르니 정년퇴직 때는 제법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도 아경의 내면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랬다.
살아 있어야만 오로라도, 마추픽추도, 안나 푸르나도 의미가 있었다.
결국 아경은 ‘살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
사실 아경이 생각해도 계속 회사를 다녔어도 죽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비록 그 당시에는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던지고 싶고, 빨래 건조대에 목을 매고 싶고, 앞에서 말한 것처럼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기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결론은 퇴사를 후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미래는 어찌 알겠는가.
퇴사라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질 수 있다면 새로운 삶을 맞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무엇보다 아경의 신체적 이상 징후도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물론 정기적인 추적검사는 계속 필요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회복되어 가자 아경은 어렸을 때의 꿈 <작가>가 되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료들이 아경을 만류하며 했던 말처럼 회사 밖이 지옥도 아니었다.
<지옥>은 회사 안에 머물고 있는 아경과 동료들이 품었던 두려움과 불안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경은 두려움과 불안에도 퇴사를 결정하고 실행해 준 자기 자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오랜 세월 맞지 않는 회사생활을 20여 년동안 버텨주면서 두 번째 기회를 펼쳐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 것도 고마웠다.
행복을 위해 자기 자신을 칭찬하고 감탄하라는 심리학자의 조언에 공감한 아경은 때때로 명상을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고마워! 진짜 대단해!”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