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로 이사와 두 번째 만난 개였던 가을이는 온몸이 짙은 고동색 털로 북슬하게 덮여있는 커다란 개였다. 도시 사람들의 낭만적 상상과 달리 시골에 사는 대다수의 개들은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놀며 살기는커녕 성인견이 되는 시기부터 평생을 짧은 목줄에 묶인 채 마당에서 살다 죽는다. 그렇게라도 제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개들도 많다. 더러는 자유가 그리워 목줄을 매단 채 집을 뛰쳐나와 거리를 돌아다니다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러는 개장수한테 팔려가기도 하며 심지어 자신을 기르던 사람에게 잡혀먹기도 한다. 그것이 시골에 사는 개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가을이는 그런 여느 개들과는 여러 모로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목줄이 없이 사는 개라는 점이었다.
가을이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한다. 지리산 자락의 어느 시골마을로 이사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남쪽으로 난 통창 앞 툇마루에 앉아 지리산 능선을 멍하니 바라보며 볕을 쬐고 앉아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개 한 마리가 마치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서 잠깐 외출 나갔다 돌아오는 냥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마당 안으로 타박타박 걸어 들어왔다. 나는 살 집을 구하는 동안 잠시 지인의 집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는 밍키라는 이름을 가진 흰색 털의 작은 개가 마당에서 묶여 살고 있었다. 내게는 집주인 격인 밍키가 경계심없이 반갑게 그 낯선 개를 맞이하는 바람에 내 긴장감도 스르륵 풀렸다. 알고 보니 집주인 부부와는 오랜 인연이 있는 개였다. 그렇게 처음 만난 가을이는 그 후에도 종종 그 집을 찾아와 밍키와 함께 어울리다 가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는 도무지 돌아갈 생각이 없이 아예 그 집에 눌러앉아 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왜 살던 집을 두고 남의 집에 와서 저러는 건지, 살던 집 사람들이 가을이를 찾고 있지는 않은 건지 퍽 궁금했다. 그러나 가을이를 찾겠다고 오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가을이는 한 집에서 사는 사이가 되었다.
나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가을이는 한참 나이가 든 할머니였다. 아기 시절, 가을이는 마을에 있는 한 대안학교 선생님들 중 한 분이 어딘가에서 데려왔는데, 그때부터 줄곧 그 학교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이를 가장 많이 챙기고 돌봤던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가을이에게는 일종의 주양육자가 사라진 셈이 되었는데, 다행히 이미 청소년기도 훌쩍 지나있던 가을이는 여러 사람들 틈에서 나름대로 자기 앞가림을 하며 거뜬히 잘 지냈다고 한다. 아주 어린 강아지 때부터 그곳에서 살기 시작해서 가을이를 아는 사람들은 목줄을 하지 않은 가을이 모습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가을이가 특유의 사교성과 총명함으로 사람들과의 사회생활도 아주 잘하고 있던 까닭이었는지 제법 자란 뒤에도 가을이에게 목줄을 채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가 보았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여러 채의 건물들이 나지막이 앉혀져 있고 지척에 텃밭과 작업실 등 크고 작은 부속시설들이 있어 나름 넓고 아늑한 그 학교에서 가을이는 어른 사람들, 어린 사람들 할 것 없이 잘 어울리며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데 어떤 한 개가 자유롭게 산다는 말의 의미는 한 가지만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인간 사회에 들어와 사는 개가 어느 한 인간에게도 속하지 않은 채 산다는 것은 구속당하지 않고 산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또한 누구도 그 개를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가을이를 챙기던 주 돌봄인이 학교를 떠난 뒤부터 가을이는 그렇게 혼자되는 시간 또한 묵묵히 견디며 자신의 삶을 꾸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이가 학교에서 한동안 사라져 보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이주가 되고 이주가 두 달이 되어가고도 남을 즈음의 어느 날, 학교가 위치한 마을에서 사람 어른 걸음으로 반나절은 가야 하는 곳에 있는 한 이웃 지역에서 가을이를 보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가을이를 걱정하고 있던 몇몇이 그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가을이를 찾아 나섰는데 도착해 보니 가을이는 그새 떡하니 새끼들까지 낳고 잘 살고 있었던가 보았다. 가을이는 새끼들이 젖을 땐 뒤에야 다시 살던 학교로 돌아왔다. 제 발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돌아온 뒤에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가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가을이는 돌아온 뒤부터 내내 학교에서 다시 지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날, 먼 도시에서 온 낯선 이방인인 나와의 인연도 시작된 것이다.
학교 주위에는 스무 채 정도의 집들로 이뤄진 마을이 있었다. 모든 집들은 담이 없는 개방형 마당을 가지고 있어서 가을이가 원한다면 어느 집 마당이든 걸어 들어갈 수가 있었다. 게 중에는 개를 아끼고 보살피려는 이웃도 있었겠지만 딱히 별스런 마음이 없거나 심지어 싫은 마음을 가진 이들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을이는 그 이웃들과 큰 마찰 없이 지냈다. 내가 세 들어 살고 있던 집은 그 집들 중에서도 학교를 기준으로 보면 가장 끝단에 있었다. 그 집은 학교에서 마을을 관통하며 차가 다니지 않았던 흙길을 통과해 거의 모든 집들을 지나쳐 오거나 아니면 차량 통행이 은근히 자주 있는 마을 옆 콘크리트 포장로를 지나야 올 수 있는 곳에 있었다. 학교에서 출발하면 어른 사람 걸음으로 5분 정도가 소요되는 거리였는데 가을이는 네발로 다녔기 때문에 만약 달린다면 금방 올 수 있는 거리였다. 가을이가 두 길 중 어떤 길을 선호했었는지 새삼 궁금하다. 그리고 왜 마을에서 가장 끝에 있는 그 집을 선택하게 되었는지도. 한 집에 살게 되면서 나는 가을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자주 보는 사람이 되었다. 큰일이 아니면 짖는 법이 없이 조용했기 때문에 밖을 내다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래도 마당에 나가면 거의 늘 가을이가 갈색 털을 펑퍼짐하게 퍼뜨린 채 거기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처음 얼굴 가까이 가을이를 마주 보고 앉았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까지 나는 가을이가 불곰을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플란다스의 개를 더 닮은 것 같았다. 끝이 쳐진 동그란 두 귀, 역시 끝이 살짝 처진 서글서글한 눈매, 동그런 얼굴, 뭉뚝한 주둥이, 촉촉하고 까만 코. 가을이를 알게 된 뒤부터 나는 처음으로 개에게도 표정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내게 더 놀라웠던 것은 가을이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지긋한 갈색 눈동자였다. 고동색 털 뭉치 배를 바닥에 깔고 누워 두 발을 교차해 모은채 턱을 괴고 앉아서 가만히 먼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채 불어오는 살랑바람을 가만히 느끼며 앉아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는 밍키를 쓰다듬어주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나와 밍키를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지긋이 보고 있던 눈과 마주쳤을 때, 가을이의 양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안고 아예 대놓고 가을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나는 가을이가 나보다 세상을 훨씬 더 깊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특히, 이 마을의 새내기 이주자인 내가 아직 미처 잘 알지 못하는 시골과 시골살이에 대한 많은 것들을 가을이는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곳의 밤과 새벽을, 꽃과 눈을, 비와 바람을 보고 겪었을까. 가을이의 눈동자 속에서 빛나는 마름모 모양의 동공은 지리산 밤하늘에 총총이 빛나는 별을 많이 닮아 있었다. 가을이가 가장 자주 들여다보고 좋아하는 별은 어떤 별이었을까? 나는 종종 궁금하다. 밤하늘이 유난히 별로 가득 차 있을 때면 홀린 듯이 그 별들을 올려보다가 가을이를 문득 떠올리고는 한다. 반짝이던 갈색의 두 눈동자를.
집주인 부부 외에는 아직 달리 마을에 친구가 없던 내게 가을이는 무척이나 의지가 되는 이웃이자 친구였고 마을살이 선배였다. 너그러웠고 분별력 있었으며 행동거지에 지나침이 없었다. 느긋함과 평화로운 기운을 늘 품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는 조금은 층이 있는 뒷집의 마당 끝이자 우리가 사는 집의 뒷담 격인 비탈에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고양이들 몇 마리가 어찌된 영문인지 천천히 데굴데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가을이도 그 모습을 마당 한켠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용히 그쪽으로 걸어가는 가을이가 보였다. 그러더니 비탈을 휘적휘적 올라가 새끼 고양이를 한 녀석을 입에 무는 것이었다. 시골은 서로에게 적대적일 이유가 충분히 있는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공존하는 장소다. 개와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특히나 서로가 사용하는 몸 언어가 달라 서로에게 오해받기 십상이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둘만의 어떤 경험으로 인해 서로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그랬기 때문에 개인 가을이가 새끼 고양이를 입에 무는 순간 나는 사실 가슴이 조금 철렁했고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싶어 적잖이 당황했다. 그런데 그런 내 마음은 곧바로 탄성으로 바뀌었다. 가을이가 새끼 고양이를 입안에 살짝 걸치듯 물고 입을 벌린 채 천천히 제법 경사진 그 비탈을 어렵사리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빈 입으로 돌아와 다시 한 마리를 물고 비탈을 올랐고 그렇게 새끼 고양이들을 물어서 윗집 마당에 데려다 놓고 왔다. 연약함의 끝판왕이랄 수 있을 작디작은 갓난 낯선 생명체를 대하는 저 큰 짐승의 태도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 나는 어떤 경이감에 휩싸여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던 것 같다. 윤리적 존재. 그 말이 아니면 그때의 가을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윤리를 인간 고유의 것, 가장 인간다운 정신적 태도로 보지 않게 되었다. 윤리라는 것이 내게 가장 취약한 상태로 내 앞에 선 타자, 존재 자체가 나의 의지에 좌우지될 수 있을 만큼 취약한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난 타자에 대해 갖는 어떤 태도를 말하는 것인 한 그 순간 가을이는 윤리적 태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던 것이다. 가을이는 그런 개였다.
가을이는 분별력 있는 개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내게 웃음과 감동을 주었던 한 장면이 있다. 그즈음, 마을에는 떠돌이 개가 한 명 있었다. 등은 검은 털로, 배와 다리는 살구색 털로 덮여있는 키가 제법 되는 셰퍼드를 닮은 개였다. 처음 봤을 때 나일론 목걸이를 하고 있었으니 분명 어딘가에서 사람과 살던 개였지만, 딱히 누가 찾으러 다니지도 않았고 그 개 또한 딱히 이 마을을 벗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기웃거리며 연명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연유인지 사람을 몹시 경계하고 겁을 내서 통 곁을 주지는 않는 개였다. 조금이라도 인기척이 느껴지면 사슴같이 크고 마른 몸을 휘적휘적 저으며 도망치고는 해서 내가 허당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후 그 이름을 듣게 된 사람들은 모두 그 개를 허당이라고 불렀다. 아마 그들도 그 개에 대해 같은 느낌을 가졌던가 보았다.
사람들 틈에서 살지만 사람 손길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는 개들이 그렇듯 허당이는 늘 배가 곯아 있었다. 그런 허당이가 사람들 눈치를 보면서도 제법 자주 찾아오는 밥자리가 바로 밍키와 가을이가 함께 지내고 있는 그 집이었다. 주인장 부부는 아침에 개들 밥그릇에 사료를 듬뿍 부어놓는 것으로 밍키와 가을이의 하루 식사를 챙겼는데 밍키와 가을이는 한 자리에서 그 밥을 다 먹지 않고 몇 번을 나눠서 하루 종일 먹었다. 그러니 오전 중에 이 집에 들르면 먹을 것이 있을 확률이 십중팔구였다. 허당이는 배가 곯아 몹시 야위기는 했지만 사지가 멀쩡하고 얼굴이 반반한 젊은 개였는데, 밍키가 그런 허당이를 싫지 않아 했다. 가을이는 허당이와 친하게 지낼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야박하게 굴지도 않았다. 어쩌면 절친인 밍키가 허당이를 꽤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둘은 허당이가 눈치껏 허기를 달랠 수 있도록 밥을 내주었다. 그렇지만 허당이가 가을이처럼 이 집에 눌러앉으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밍키가 허당이를 붙잡는 분위기도 아니어서 서로 얼굴을 제법 익힌 뒤에도 셋은 그렇게 가끔 밥을 나눠먹는 사이로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마 밍키의 배란기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날 그 집에 들렀던 허당이는 밥보다는 밍키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게다가 밍키도 적잖이 발정이 된 상태였던지 다가오는 허당이를 그 작은 꼬리가 떨어져라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가을이가 이 둘 사이를 가로막으며 들어섰다. 허당이가 밍키에게 올라타려고 다가서면 밍키 앞을 막아섰고 밍키가 허당이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하면 이번엔 밍키를 가로막고 섰다. 사실 밍키와 허당이는 체구가 서로 매우 달라서 내가 보기에 서로 짝을 짓기에는 마땅하지 않아 보였다. 아마 세상사를 알만큼은 아는 우리 가을이 할머니가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허당이는 어째서든지 밍키 가까이 가려고 애를 썼고 밍키 또한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가을이는 둘 사이를 떼어놓기 위해 무척이나 열심히 이들의 진로를 방해했다. 셋은 한동안을 그렇게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누구는 누구 가까이 가려고 하고 누구는 또 그걸 막으려고 하면서 마당에는 그렇게 제법 긴장감이 돌았다. 그날도 역시 툇마루에 앉아 볕을 쬐던 나는 허당이가 마당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셋이서 빙글빙글 돌며 그러고 있으니 그만 허당이를 내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인간을 무서워하고 경계하던 허당이였기 때문에 인기척이 나자 화들짝 놀라며 당황했고 그러다가 옆에 뭐가 있는지 헤아릴 경황도 없이 마당 밖으로 뛰어나갈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밖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뒤로 몸을 세차게 돌리는데 바로 그때 앞을 향해 보고 있던 허당이가 그렇게 갑자기 뒤로 돌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하고 허당이를 향해 뛰고 있던 가을이와 그만 서로 몸통이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순간 나는 덩치 큰 두 개가 싸움이라도 붙으면 어쩌나 바짝 얼음이 되었다.
그런데, 상황은 생각 밖으로 흘러갔다. 나는 뜻하지 않게 서로의 몸에 타격감 있게 부딪히게 되었던 그 순간 가을이와 허당이가 짓던 얼굴 표정과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순수 백 퍼센트의 당황함, 혹여라도 상대방이 공격을 가해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걱정과 두려움, 자신의 결백함을 상대방이 제발 알아주길 바라는 절박함. 이 모든 것이 옆에서 보는 내 눈에조차 훤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 순간 가을이와 허당이는 온 마음으로 서로에게 나는 너에게 일말의 적대감이 없다는 신호를 보냈고 그 신호를 편견 없이, 뒤끝 없이 받은 둘은 그 즉시 서로에게 그 상황을 수습할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날 멋모르는 인간의 개입으로 자칫하면 큰 싸움이 날 뻔도 했을 일촉즉발의 긴장은 지혜롭고 너그러운 두 개들의 이해와 양해로 다행히도 그렇게 평화롭게 종결되었다. 다만, 상황이 종결되고 허당이가 떠난 뒤 가을이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밍키의 원망과 짜증을 받아주어야만 했다. 밍키가 가을이를 향해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로 한참 동안을 짖어댔던 것이다. 가을이는 밍키의 나름은 이유 있는 그 짜증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가을이는 그때 ‘에그, 어린 네가 뭘 알겠니, 다 널 위해 이러는 건데’ 하며 밍키의 짜증을 달래줬을까? 세상의 많은 어머니들이 딸자식을 보호하려고 조금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딸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일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행동의 기반은 사랑일 것이다. 가을이의 피붙이 딸은 아니지만 세상 물정을 그래도 더 아는 나이 지긋한 가을이의 염려를 혈기만 왕성하지 아직은 어렸던 밍키가 헤아릴 수 있었을까? 내 보기에 가을이보다는 철이 덜 들어 보였던 밍키지만 그래도 그 짜증을 다음날까지 이어가지는 않았다. 둘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쿨하게 또 의지하며 잘 지냈다.
그 집에서 일 년을 조금 넘게 살고 난 뒤 나는 가까이 땅을 하나 얻어 집을 지어 나왔고 그렇게 가을이와의 한 집 살이도 끝이 났다. 그렇지만 이사를 하고 나서도 서로 가까이 살았던 덕분에 여전히 종종 서로의 얼굴을 보며 지냈다. 주로 가을이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그러던 가을이는 내가 이사 나온 첫 해 겨울, 크리스마스이브 밤에 갑작스럽게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한동안 벌에 물린 듯 눈이 부어있기는 했지만, 내리막을 걸을 때면 앞다리를 절룩거리기는 했지만, 종종 어딘가 초점을 잃은 듯한 눈을 하고 있기도 했지만, 별일 없이 그해 겨울을 보내고 새봄을 함께 맞이할 줄 알았다. 어떤 이별의 징후도 없이 그렇게 가을이가 우리 곁을 떠났다. 아니다. 사실은, 가을이는 이웃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일일이 건네고 떠났다. 12월 23일, 가을이는 우리 집에 찾아왔었고 내 얼굴도 보고 갔으니까. 늘 그렇듯 영민하지 못한 내가 그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것이니까. 노구를 이끌고 내리막을 어렵사리 걸어 내려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 모습을 눈에 담아주고 갔던 것이니까..
사랑하던 이와의 느닷없는 이별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한동안 가을이를 보내지 못해 무덤조차 찾아가지 않았다. 그 상실감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도 알기 어려웠다. 나는 가을이의 주인도 아니고 보호자도 아니고 식구도 아니었다. 가을이의 남편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심지어 같은 종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가을이를 가슴 깊이 사랑했고 깊은 존경심을 품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삶을 시작하며 난 곳과 든 곳에서 각각 처리해야 할 소란한 일들에 휩싸여 어쩐지 마음 둘 곳 없던 한 인간에게 어떤 선입견도 없이 곁을 주고 마음을 주고 옆을 지켜주었던 단 한 존재. 이곳에서는 어떻게 산을 대하고 들을 대하고 나무를 대하고 꽃을 대하고 바람을 대하면 좋을지를 조용히 가르쳐주었던 이. 항상 따뜻했던 이.
제법 긴 시간을 머뭇거리다 마침내 찾아간 가을이의 무덤 앞에서 가을이에게 말했다.
고마웠다. 친구가 되어주어서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오늘, 그날 미처 다하지 못한 말을 전해 본다.
사랑했다. 늘 기억할 께. 특별했던 나의 이웃, 자유개 가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