팜제노프의소설 <사라진 소녀들>이 남긴 것
* 컬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아트인사이트' 측으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소설의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 몇 장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소설과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연결 짓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출근을 서두르는 한 여성의 삶과, 바쁘면서도 어딘가 무기력한 듯한 뉴욕의 이미지를 가득히 담아내던 소설은 느닷없이 전쟁을 말한다. 지극히 평범했던 일상에 갑자기 닥치는 전쟁처럼. 그제야 1946년이라는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눈에 들어온다. 모두가 전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시절. 전쟁의 상흔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시절, 이 여성 또한 그중의 한 명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여성의 이름은 그레이스다. 전쟁은 그녀에게서 남편을 앗아갔다. 그 상처는 그레이스가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대도시 뉴욕으로 떠나오게 만들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흔치 않게 직장에 다니며 1년째 홀로 살아가던 그레이스는, 여전히 남편을 잃은 상처로부터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끝끝내 돌아오지 않은 남편 대신 사망 소식을 전해받아야 했던 그랜드 센트럴 역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그녀의 여전한 트라우마를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의 도입부에서 그레이스는 어쩔 수 없이 그랜드 센트럴 역에 들어가게 되고, 버려진 듯 놓인 여행가방에서 사진 꾸러미 하나를 발견한다. 웬 여성들의 사진이다. 이상하게 끌리는 사진 꾸러미를 들고, 그레이스는 여행 가방에 적혀 있었던 이름 '엘레노어 트리그'를 단서로 여성들의 정체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은 억지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강한, 여성들이 누군지 알아내겠다는 그레이스의 의지는 물음표를 자아내지만, 실은 이 역시 남편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소녀들은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어요, 마크." 그레이스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의 팔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당연히 중요하죠. 그 상황에서 뭔가 중요하거나 훌륭한 뒷이야기가 있다면요. 그럼 우리는 자신의 딸이 세상을 떠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알려 줄 수 있어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번 일이 중요한 거예요."
"당신도 그런 걸 기대했군요, 안 그래요?" 마크가 되물었다. 누군가 당신을 찾아와서 톰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던 거예요." 마크의 말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 팜 제노프, <사라진 소녀들> (p.356)
그레이스의 이야기와 함께 펼쳐지는 것은 가방의 주인, 엘레노어 트리그와 사진 속 한 여성, 마리의 이야기다. 1943년 영국의 특수 작전국 소속이었던 엘레노어는 여자 특수 요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자신이 총책임을 맡게 된다. 마리는 바로 그 여자 특수 요원으로 선발되며 엘레노어를 만난다. 소설은 세 사람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교차되며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엘레노어와 마리가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온몸으로 부딪히며 전쟁을 겪어내는 한편, 그레이스는 그 둘의 정체에 한 발짝씩 더 가까워지며 그들에게 감정적으로 감화되어가는 식이다. 소설 중간에 그레이스가 사진 속 여성들이 모두 사망했다는 정보를 알게 되면서, 이야기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결국 세 명의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인간적인 감정이다. 전쟁으로 인해 비슷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동질감, 그 사이에서 서로를 구해내겠다는 의지와 유대감. 그레이스는 끝까지 사진 속의 여성들을 포기하지 않고, 엘레노어는 프랑스로 보낸 마리와 다른 여성 특수 요원들을 향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마지막까지 간직하고 행동에 옮긴다. 마리 역시 자신의 동지들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열악하고 잔혹한 환경 속에서도 고군분투한다.
그렇기에 소설의 막바지에 이루어지는 마리와 그레이스의 만남은 묵직한 여운을 가져다준다. 서로를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이들이기에,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빛나는 인간성을 확인하는 듯한 만남이다. 더불어 마리와 그레이스 모두 이 만남을 계기로 전쟁이 남긴 상처를 완전히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결국 사람이 입힌 상처는 사람이 치유하게 된다는 듯한 소설의 결말은, 절망을 딛고 일어섰기에 더욱 희망차다.
소설에서 눈여겨볼 점은 또 있다. 세 명의 주인공이 전부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1940년대는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것을 경멸하는 시선이 존재했을 만큼, 여성의 사회 활동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남성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전투와 전쟁에 여자가 참여한다는 것은 어떻게 여겨졌을까. 소설에서 그레이스와 엘레노어, 마리는 모두 '여성'이라는 이유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소설 중간중간 남성 등장인물들의 태도와 말을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이 세 사람은 전쟁과 적군 외에도 맞서 싸워나가야 할 것이 또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사람 사이의 유대감이 깊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이 소설을 읽는 여성 독자는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감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레이스와 엘레노어, 마리의 공통점은 이뿐이 아니다. 이들을 깊게 신뢰하고 든든히 받쳐주는 남성 조력자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세 주인공은 이 조력자들과 때로는 단단한 우정을, 때로는 낭만적인 사랑을 나누며 앞으로 나아간다. 조력자들이 있기에 주인공들은 성장하고, 소설은 한층 풍부해진다. 520여 페이지에 달하는 짧지 않은 책이지만, 단숨에 읽어 내려가게 하는 흡인력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다양한 인물들이 다양한 감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이미 흥미로운 소재의 이야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흔히 어두운 터널 끝엔 빛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막상 절망적인 상황에 닥치면, 희망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 다음엔 희망이 오게 되어 있다. 다만, 절망 속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희망은 결코 알아서 너울너울 나를 찾지 않는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가려고 애를 썼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을 향해 손을 뻗어 연결되었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 희망은 내 앞에 와 있다. 세 주인공이 서로를 찾아 나서고, 마침내 서로에게 닿았을 때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을 찾았듯이 말이다. 전쟁을 다루는 이 소설 역시 그렇게, 희망을 말하고 있다. 사라진 소녀들은 희망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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