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할 결심
"앤지님은 5년 뒤에 뭘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예전에 모시던 대표님이 이런 질문을 건네셨다. 5년이요? 얼이 빠져 되물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는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한참을 대답을 못하고 우물거리자 대표님이 말을 이으셨다.
"1년 후, 3년 후, 5년 후, 그리고 10년 후의 나에 대해 구체적으로 한 번 써보세요."
자리로 돌아와 생각에 잠겼다. 새삼 내게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계획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극 J인간이라고 하면서, 내 커리어 패스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자격증 따고, 대외활동 하고, 경력 쌓고, 취업하고.. 착착 억지로라도 계획을 세우고 살았던 것 같은데. 입사하고 나서는 구체적인 플랜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내기만 했다. 대표님이 내려주신 과제가 너무 어렵게만 느껴졌다. 텅 빈 워드창만 띄워놓은 채 모니터 앞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당장 내일도 이렇게 똑같이 살고 있을 것 같은데 어쩌지...
그게 2019년도의 일이다. 그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무얼 하고 있느냐면..
여전히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와우)
같은 브랜드, 같은 팀에서 아직도 고군분투하고 있고. (와우바우)
그때 그 과제에 뭐라고 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어떻게든 써보려고 했지만 결과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 하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이 회사에서만 거의 11년을 일했다. 거창한 계획은 없었지만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지금에서야 하는 생각이지만, 만약 '무조건 버티자'라고 결심했더라면 오히려 못 채웠을 시간 같기도 하다.
"언제까지 다니실 거예요?"
7-8년 차가 넘어가면서부터 이런 질문을 꽤 많이 받았다. 글쎄요.. 그때마다 나는 또 말끝을 흐렸다. 사실 10년 근속을 앞두고 있었을 때는 10년 채우고 생각해 보려고요!라고 둘러댔지만, 막상 10년이 지나고 나니 별 생각이 안 들었다. 대체 이렇다 할 생각은 언제 드는 것일까요 그냥 10 다음 11 되고, 11 다음 12 되는 것처럼 느껴졌달까..
[언제까지 더 다니실 건가요... 어디 갈 땐 나도 데려가기]
인스타그램에서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를 열었을 때 들어온 질문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장기근속을 하고 있는 동료이자 동기의 질문이었다. 그림처럼 각박한 세상 속에서 악착같이 붙어있기를 선택했는지 아니면 스티커 끈끈이가 다 녹아 붙어져 있는(?)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착된 상태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당분간은
[넥스트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풀어나가고 계신지!]
이건 한 후배가 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큰 고민 없이 답을 적었던 기억이 난다. 꽤 어려운 주제인데도, 2019년의 나와는 다르게 손가락이 타닥타닥 절로 움직였다. 답은 없는데 일단 단거리 계획은 구체적으로 세웠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몇 번 하다 보면 1천 미터 되고 뭐 그러는 건 아닐까? 그렇다. 나는 결국 10+년차가 되어서야 예전에 대표님이 물어보셨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텝업! 레벨업! 커리어 탄탄대로를 걸으며 살아가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러질 못했다. 야무지게 10년/20년/30년 계획을 세우는 프로 일잘러이고 싶었으나 그렇게까진 안 됐다. 지금도 그렇다. 당장 눈앞의 보고 자료를 만드는데 정신이 없고, 점심시간만 되면 그냥 막 신이 나고, 오후 네시쯤 되면 과자가 땡기며, 야근 후에는 녹초가 되어 좀비처럼 집으로 귀가하는 삶. 앞으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다. 그치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내 방식대로 짧고 굵은 레인을 반복해 달릴 거다. 이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 그 생각은 더욱 견고해졌다. 한편 한편의 에피소드로 나의 일과 나의 삶을 정리해 보니 허투루 흘러간 시간은 하나도 없었다. 빠르게 뛰지는 못해도 뚜벅뚜벅 성실히 걸어온 나의 길.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담담히 적어볼 기회가 생겼지 않은가!
펼쳐질 미래를 모두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앞을 보고 달리고, 결승 지점에서 나와 나의 일을 돌아보고, 그 속에서 스스로 얻은 교훈을 찾고, 또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가 그린 10+년의 장기플랜이다.
그리고 그게 흐려지는 순간 진짜로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 (다짐)
*마지막 화, 회사가 맞는 사주 에서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