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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자 납시오

깨어질지언정 녹아내리지 않겠다

by angie 앤지

"앤지님은 도자기 같아요. 도자기 그 자체."


어느 날 친한 사람들끼리 밥을 먹는데 후배가 그랬다. 도자기? 백자 같은 거? 내가 덧붙이니 다들 공감의 웃음을 터뜨린다. 인간 백자라. '백자'라 함은 자고로 단정한 외관에 실용적인 쓰임새가 장점인 도자기 아니던가요.



[백자는 순백색의 바탕에 투명한 유약을 입혀 구워낸 자기로, 고온에서 구워내는 과정과 순도가 높은 흙 사용으로 제작이 까다롭고 섬세한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조선 시대 백자는 달항아리에서 보듯이 원만하고 유연한 선,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형태, 단순하면서도 익살스러운 문양이 특징입니다.]


백자의 특징을 검색해 보니 이렇단다. 높은 온도를 견뎌내고,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단단한 자기. 듣고 보니 '백자'라는 말은 한 회사에 오래 다니고 있는 나를 지칭하는 최적의 단어 같다. 어느 고택(?) 한편에 놓인 채 한참이나 그 자리를 묵묵하게 지키고 있는. 그런 존재.


"어떻게 한 회사, 한 브랜드를, 10년 넘게 다닐 수 있어요?"


안 그래도 장기근속 10주년을 맞이하며 이런 질문도 많이 받았다. 사실 무작정 오래 버티자!라는 목표를 가지고 다닌 것은 아니었다만... 나름대로 고군분투하다 보니 어느덧 벌써 입사 12년 차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인간 백자처럼 단단히 근속하는 나만의 작은 노하우를 적어보려 한다.




분노의 시간은 딱 10분만

(1화부터 쭉 이야기한 대로) 나는 평소에는 대체로 순응적인 성향이지만 내 기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속병이 나는 타입이었다. 통제성향이 심해 회사에서 벌어지는 오만가지 변경, 변동에 수시로 진력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바뀔 거면 왜 정하냐고 갈등이 생기면 삼 세 번까진 되도록 매너를 지키며 좋게 좋게 말하지만- 선을 넘었을 땐 참지 않고 따박따박 의견을 내는 편이었다.


"저도 사회 초년생 때 10년 차 정도 되는 여자 과장님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싸늘할까, 좀 더 친절할 수는 없나?'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그런데 제가 한 6년 일해보니까 그때 그분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는 거예요. 싸늘함이 자기를 보호하는 막이 됐다는 사실을 저도 터득한 거죠." - 에리카팕, <언니, 밥 먹고 가> 중에서


회사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싸움닭이 되어야 할 때'를 눈치껏 체득했지만, 어느 순간 동시에 스스로가 차츰 마모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열을 내봤자 나만 더 힘들다는 걸 깨닫기도 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나름의 기준을 정했다. 화는 딱 10분만 내자. 5분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럴 수 없는 일이 많고(...) 어쨌든 그 시간을 지나가면 그냥 일단 덮고 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씩씩 열받으면 자리 한 번 박차고 나가서 10분 바람 좀 쐬고 오고,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가까운 사람에게 10분만 털어놓는다. 그리고 회사를 나서면 무조건 생각을 끄려고 노력한다. 시간을 정해놓고 화를 낸다는 것만으로도 회사에서의 감정 소모를 크게 줄일 수 있다. 그게 아마도 장기근속이 준 첫 교훈. 애초에 화낼 에너지도 점점 없어지지만



내 기준 100%, 회사 기준 100%

"회사가 생각할 시간을 안 줘요." 가끔 후배들이나, 마케팅 모임 멤버들로부터 이런 고민을 듣는데 나 또한 이 말에 너무도 공감한다. 모두가 그렇겠지만 업무가 주어지면 우선 이게 어떤 일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생각할 틈이 필요하다. 하지만 회사란 어떤가? 여유는 주지 않고 결과를 당장 내놓으라고 하는 곳이 아니던가. 주니어 때의 나도 이게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였다. 나는 이만큼 더 고민하면 이만큼 더 잘할 수 있는데. 회사는 나를 믿고 기다려주지 않네. 더 열심히 하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네.


하지만 시니어 연차가 되면서 마인드를 바꾸었다. 그냥 회사가 원하는 것에 집중해 보자고 생각했다. 시간이 더 걸려 만든 결과물은 내 기준에나 100%지, 회사가 바라는 건 일단 시간 내에 만든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는 80점짜리지만 충분히 문제를 해결했다면, 그건 회사가 원하는 100점짜리 아웃풋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는 결코 일을 대충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주어진 자원 안에서 업무를 해내는 것도 회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업무 범위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업무를 대하는 태도가 더 심플해졌다. 마구잡이로 들어오는 일도 어느 정도 유연하게 컨트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부분에는 좀 더 힘을 쓰고, 다른 부분은 회사가 제시한 요건을 갖춘 정도로만 빠르게 처리하고. 물론 이런 과정이 원활하게 되기까지는 시행착오가 많이 필요하다. 나 또한 아직도 갈피를 못 잡고 허덕이는 업무들이 많다. 그럴 때는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선배, 상위 관리자의 조언을 구하며 해결해 나가면 된다.


가장 중요한 key는 개인이 바꿀 수 없는 부분에 골몰하지 않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하고 최선의 성과를 내는 것이 우리가 최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올바르게 제 몫을 할 수 있는 방법이다.



회사는 내가 아니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실천 중 하나였다. 우리 회사는 브랜드 단위로 움직이다 보니 브랜드를 좋아하지 않으면 일에 몰입하기 어렵다. (제가 브랜드 마케터이기에 더더욱 그럴 수도요) 가끔은 브랜드와 내가 한 몸인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 브랜드가 욕먹으면 너무 슬프고, 뭐가 잘 안 되면 속상하고, 반면 좋은 후기가 하나라도 올라오면 갑자기 기분이 너무 좋아지고.. 나는 처음부터 우리 브랜드를 너무 사랑해서 모든 것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심지어 주말과 휴가에도 브랜드 이름을 검색해보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절반쯤은 그러고 있지만


"대 오지랖퍼의 시대를 맞이했다. 새로운 과제가 떨어지면 적극적으로 자원하고, 여기저기 일손을 도우러 가고, 다른 팀이 제안하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예의상 참조로 걸린 메일이나 전사에 뿌려지는 자료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열어보며 공부했다. (중략) 그게 토스트 아웃의 시작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 2화, 직장인이고 시키는 거 다 해요 중에서


그러나 거한 번아웃을 겪고 나서 이런 버릇을 고치기로 했다. 브랜드를, 회사를 좋아하는 만큼 '거리두기'가 절실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만 더 오래, 잘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 순간 회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가끔은 모른 척도 해야 하고, 나와 관련 없는 건 안 보기도 해야 한다. 힘을 적절히 아껴 중요한 곳에 분배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일의 방식이란 걸 깨달았다. 더 멀리 보고, 크게 보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무조건 일시정지

오래 일 하려면 회사 생각을 절대 할 수 없게 만드는 도피처가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가족이든, 취미든, 그 무엇이든. 나 같은 경우 소문난 '취미부자'라 미친 듯이 새 취미를 만들어 나의 시선을 분산(?) 시키는 편이었다. 저녁 공연을 예매해 두거나, 피티나 약속을 잡아 어떻게든 일을 멈추고 회사 건물을 나가야만 하는 구실을 만들었다. 중요한 보고를 마치면 바로 야구장으로 직관을 간다든가, 짧은 여행을 중간중간 다녀온다든가, 어쩌다 한 번은 반차를 쓰고 한낮의 연주회를 보러 가기도 했다.


허겁지겁 짐을 챙겨 도착했던 대학로의 어느 작은 야외 공연장. 푸르른 녹음 아래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눈을 감던 그 순간이 아직 생생하다. 기한이 한참 남은 보고도. 잘 보냈나? 괜히 우려했던 메일도. 자잘한 업무의 찌꺼기까지도-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신기했다. 그리고 그 날은 지금까지도 내게 작지만 큰 위로로 남아있다. 조금 많이 슬픈 직장인의 단상

나에게는 글쓰기도 일종의 일시정지다. 일과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전에도 말했듯 글쓰기는 내게 마치 살풀이 같다.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그리고 10+년까지. 일로 쌓인 스트레스를 글쓰기로 풀었다. 기록도 도피처가 될 수 있다. 데스노트 버금가는 일기장, 대나무숲 같은 메신저, 혼자서만 보는 블로그..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떤 방법이든 적절한 텀에 강제로 일시정지를 누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게 잘 안된다면 더더욱 끊임없이 짧은 탈출을 시도해야 한다. 주어진 일을 책임감 없이 던져버리는 게 아니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쉬어야 한다. 그래야 더 오래,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



도자기girl이 된 그날의 기록



'백자' 같은 직장인으로 사는 삶이 다 좋은 건 아닐 테다. 색깔이며 모양까지 세상 화려한 유리나 깽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유기, 보다 더 가볍고 단출한 플라스틱 같이 더 쉽고 쿨한 길도 많겠지. '백자'처럼 일한다는 건 가끔은 유연하지 못하고 사뿐하지 않은 기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만의 기준으로 매 순간을 우직하게 일하다 보면 언젠가 그 백자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무작정 자리를 지키고 버티는 것이 아닌, 버텨온 시간의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길로 걸어가는 거다. 그 쉽지 않은 길에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단단히 구워지는(?) 중인 모든 도자기들을 응원하며.



그런데 잠시만요.

그래서 여기 언제까지 다니실 건데요?



*11화 언제까지 다니실 거예요,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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