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일이 내 손을 떠날 때

놓다가 아닌 놓치다

by angie 앤지

회사는 번아웃이 온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신제품은 끊임없이 나왔고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새로 생겼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다. 물론 일부 충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하니 한동안은 같이 백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에 처음 해보는 새로운 일을 맡게 되기도 했다. (휴^^) 저글링으로 비유하면, 오랜 시간 노력해서 겨우 공을 50개 정도 쥐고 돌릴 수 있게 되었는데 갑자기 공 200개가 한꺼번에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실수를 했다. 디지털 광고 중 하나가 기간이 끝난 프로모션의 URL로 계속 랜딩이 되고 있었던 거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알람을 해줘서 알게 된 일이었고 나는 다급하게 수습을 했다. (억울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내 연차에 해서는 안 되는 실수였다. 하지만 새로 들어온 일이 너무 많아 그 광고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놓쳤다는 점과,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내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일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구나. 컨트롤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구나.


그야말로 '일이 내 손을 떠나는 느낌'이었다.


단순히 업무량이 많은 수준을 뛰어넘어, 내가 하고 있는 업무의 스콥과 세부사항을 다 파악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게 두려웠다. 통제콤 극J에게 찾아온 비극 일이 많아도 어떻게든 집중하면 정리하고 다 쳐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지? 이게 진짜 맞나? 이걸 무작정 버티는 게 옳은 일일까? 생각이 가지치기하듯 뻗어나갔다.



일에 떠밀리듯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연말이 되었고 회사 송년회 날이 찾아왔다. 처리해야 하는 건들이 많아 나는 후발대로 조금 늦게 출발했는데, 가는 길부터 두 다리에 무거운 돌을 매단 듯 발걸음이 무거웠다. 이런 기분으로 가서 어떻게 앉아있지.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인데. 혼자서만 우울해할 수도 없고.. 이런저런 생각을 안고 송년회 장소를 향해 걷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와아. 회사 때문에 길바닥에서 눈물을 흘린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어린 연차 때야 당연히 마음이 말랑말랑했으니(?) 그랬지만.. 너무 오랜만에 제어가 되지 않는 눈물이 흘러 스스로도 매우 놀랐다.


통제를 벗어난 신체 반응은 몇 번 더 있었다. 전사 조회에서 짧은 발표를 하는데 갑자기 너무 숨이 차서 말을 멈췄다. 호흡이 불안정하고 머리가 핑글핑글 어지러웠다. 앞을 보지도 못하겠고 손이 벌벌 떨렸다. 말을 하다가 멈추고, 하다가 또다시 멈췄다. 다음주의 전략 보고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마케터라는 직무와 IMC 업무 때문에 평소에도 여러 가지 발표와 보고를 많이 해온 나인데- 그때는 정말 심신이 고장 난듯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지? 대체 내가 왜 이러지?


나는 그제야 확신했다. 일도 삶도, 내가 견딜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는 걸.



연말 약속을 하나도 잡지 않았다. 평소의 나라면 일주일 점심저녁의 대부분을 빼곡하게 약속으로 채웠을 텐데. 아무 의욕도 없이 집에만 갇혀 멍하니 지냈다. 가만히 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날들이 많았다. 타인과 말을 섞을 의지조차 없었다.


속이 괴로워서 그런지 책을 많이 찾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문제들은 대부분 책 속에 답이 있다는 말을 믿었다. 그쯤 읽은 서너 권의 책 주제가 모두 '일'이었다. 아무래도 무의식 중에 그런 책에 계속 손이 갔던 듯하다.



"왜 그렇게 일 때문에 화가 나고 힘이 드는 것 같으세요?"

"잘해야 하니까요."

"일을 왜 잘해야 하나요?"

그 질문에 말문이 탁 막혔다. 그러게, 왜 잘해야 할까? 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잘하려고 아등바등했을까. 과거의 나는 일이 엎질러지면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표가 나게 자책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나의 눈치를 살피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반드시 해내고 싶었던 일이 엎어지면 속은 더 아렸다. 살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좋은 평가를 받은 게 일뿐이라서, 일을 할 때에만 비로소 내가 가치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일이 잘못되면 내가 무너졌던 것이다. - 김규림, 이승희의 <일놀놀일> 중에서


"쓰는 내내 읽는 누군가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헤맴의 시간이 조금 덜 외롭기를, 그리고 조금 덜 자책하기를 바랐다. 무(無)의 시간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사실 언제나처럼 분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분투 역시 영원히 빛이 날 것이다." - 김진영의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중에서



책을 읽어보니 번아웃을 맞닥뜨린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더라. 일을 너무도 사랑하고, 너무도 열심히 했고, 너무도 우선순위로 가지고 살았다는 것. 절대로 일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안 하려고 거부해서가 아니었다는 것. 그게 큰 위로가 되면서도 어쩐지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나도 번아웃이 온 거였구나, 정말로.



생각해 보면 처음 '일'이라는 걸 시작했을 때부터 일을 참 좋아했다. 1화에서도 말했듯이 첫 직장의 우여곡절 후 20대의 끝자락, 중고 신입으로 입사했기에 이 회사는 더 소중한 곳이었다. 하지만 연차가 더해질수록 고민이 점점 더 복잡 미묘해졌다. 주니어 때 하던 고민과는 또 다른 새로운 국면이었다. 당혹스럽기도 하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게 맞다고 믿었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막상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나니 여기가 어디지? 뭘 보고 달려왔지? 싶은 거지.


현 상황을 파악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이제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였다. 지나간 시간보다 앞으로의 시간이 더 중요했다. 늘 300%를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덜 괴로워해야 했다. 붙잡아 둘 수 없는 것들은 포기하고, 결국은 내가 다시 중심이 되어야 했다. 이 넘어짐으로부터 잘 일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조절할 수 있는 변수와 그렇지 않은 요소는 무엇일까?


그전에, 나는 이번에도 남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왜, 어떻게 남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09화 남는 사람의 계산법,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


@angiethinks_




keyword
이전 07화저온 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