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릇노릇 굽다 못해 타버린 영혼이여
[저온 화상] 사람이 아주 뜨겁다고 느끼는 온도에 미치지 않기 때문에 회피 반응이 없어 장시간 노출됨에 따라 피부 조직에 열이 축적되어 피부 세포의 손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5화 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엉엉 울며 가장 좋아했던 후배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일과 함께 회사에 남았다. 사람들이 종종 괜찮냐고(?) 묻기도 했고 나 또한 문득 후배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마음이 휑 했지만- 현실적으로 눈앞의 공백을 채우는 게 더 급했다. (그때 유독 우리 팀의 퇴사율이 높아서 구멍이 많았다) 난 자리는 그렇게 티가 난다는데 회사란 왜 늘 그걸 몰라주는지. 예상 가능하듯 충원은 더뎠고,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그 자리를 메꾸어야만 했다.
일은 두 세배 더 많아졌고 정신은 더 없어졌다. 업무 외 티에프도 추가되었고, 처음으로 주요 캠페인을 리딩하는 역할까지 맡게 된 터라 나는 막중한 부담감에 이래저래 허덕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하려 스스로를 채근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속이 시끄러웠지만 외부의 변화에 출렁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누군가는 떠났어도 나는 남는 것을 택했기 때문에,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점점 더 인볼브 한 프로젝트가 많아지고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었다. 상황도 그랬고 어느새 연차도 그렇게 됐다. 그럴수록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속이 갑갑했다. 분명 일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순간순간도 많았는데, 스멀스멀 먹구름 같은 감정이 드리웠다. 한 마디로 표현하기 쉽지 않지만 마치 '억울함'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일을 잘하고 싶으면서도 그런 생각에 갇혀 산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으면서도 누구보다 잘 해내고 싶지만 그러고 싶지 않은 상태... 내 의지에 따라 회사 일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살면서도 어느 순간 회사에 너무 매몰되고 싶지는 않다는 모순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해서 나한테 남는 게 뭐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주니어 때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그전까지는 주어진 일을 배우고 능숙해지기 위해 노력하느라 바빴다. 뒤를 돌아볼 시간조차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마침 그때는 막 코로나 2-3년을 지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처음 겪는 팬데믹과 코로나 블루 속에서 혼란은 더 커졌고 회사의 크고 작은 변화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새로운 시대에 대비해라, 부캐를 만들어라, 갓생을 살아라.. 혼란의 시대를 타고 이런저런 트렌드가 마구 생겨났다. 하필 마케터인 나는 오롯이 그런 책만 읽고 그런 강연들만 들으러 다녔던 거고
아, 이렇게 살면 안 되는가 보다.
결국 나는 '일을 하면 나한테 남는 게 뭘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또 다른 일'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회사 안에 속해서 매일 전력을 다하며 일하면서도 무언가 결핍된 듯 계속 새로운 일을 찾았다. 퇴근을 하고 나면 몇 시가 되었든 간에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리고 글을 썼다. 인스타 부계정을 만들고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가끔 공모전에 짧고 긴 글을 출품하기도 했다. 에세이 수업을 들으며 출판사에 보내는 원고를 준비하기도 하고, 매달 다른 온라인 모임을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해가 뜨면 다시 회사에 가고, 주어진 업무에 허덕이면서도 애써 최선을 다하고, 밤이 되면 나만의 공간에서 새로운 일감을 만들고, 다시 해가 뜨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었다. 마치 딴짓을 안 하면 죽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렇게 산 지 일 년.
가시적인 성과는 너무 좋았다.
공모전 수상도 하고, 외부에 처음으로 글을 기고했다.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도 잘 끝냈고, 캠페인 결과도 좋았다. 칭찬도 많이 받았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해야지. 무엇하나 놓치지 않겠다고 아등바등한 결과였다. 그래, 모든 건 다 멀쩡하게 잘만 돌아가고 있어. 속으로는 계속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무 문제없어. 난 잘하고 있어. 나는 자꾸만 나를 더 새로운 시험대에 올렸다. 아마도-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아서.
어느 점심시간.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요즘의 관심사와 하고 있는 취미들을 공유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고, 저런 걸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고.. 그러자 한편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조용히 이런 말을 툭 내뱉었다.
"네.. 앤지님이나 열심히 하세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나 지금 뭐 실수했나? 다시 생각해 봐도 딱히 그럴 건 없었다. 그냥 나는 내 얘기를 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무언가를 강요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그 사람도 꼭 나쁜 의도로 말한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믿고 싶기도 하다) 나와 특별히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고. 그전에도, 그 이후로도 잘 지냈는데. 아마도 그때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나왔던 게 아닐까?
하지만 종종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회사 안이든 밖이든 나랑 비슷한 사람만 있을 수는 없구나, 싶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나는 잘 달리고 있는데 뭐가 문제지? 이것저것 열심히 한다는 게 무슨 잘못인가? 하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때의 나는 의욕 과잉 상태였고, 성취의 도파민만이 나를 지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 그 말을 했던 사람이 번아웃에 가까운 상태였다는 걸.
그리고 그 해 겨울이 되고서야 느꼈다. 이제는 '내가' 뭔가 이상해졌다는 걸.
찬바람 부는 11월이 되자마자-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수가 있지? 어디 놀러 가고 싶지도 않고, 뭘 보러 가고 싶지도 않고, 심지어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의욕이라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본래 외향적인 성격이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에너지를 얻는 타입인데, 그때는 그냥 아무도 마주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주 친한 친구들마저도.
내 손안에 남은, 내가 진짜로 바라던 성과들을 보면서도 더는 기쁘지 않았다. 분명 이걸 해내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것 같은데. 원하는 걸 이룰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해 겨울에는 그것마저 다 소용없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일도, 사이드 프로젝트도 잘 해냈는데. 왜 나는 이렇게 마음이 텅 빈 것같이 우울할까. 손에 쥔 성취가 이렇게나 많은데.
태양과 같이 열정적으로 타오르고 있다고 믿었던 건 내가 아니었다. 그저 피할 수 없는 환경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서서히 익어갔던 게 '나'였던 것이다. 마치 저온화상처럼.
*08화 일이 내 손을 떠날 때,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