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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무슨 헤어지자는 말을 출근길에 하니

잘 가, 가지 마

by angie 앤지

1화부터 4화까지 일 얘기를 엄청 했던 것처럼, 이 회사에서 10+년을 자의든 타의든 일에 푹 빠져 살았다. 그중 가장 즐겁게 일했던 때를 꼽는다면 아마도 6-7년 차 즈음. 일이 너무 많았지만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일하는 재미가 더 컸다. 야근은 싫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이 정말 좋았고, 내가 아하면 어-이-다 (feat. 무도) 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다.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선뜻 가서 도와주고,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늦은 밤 회사 앞 고깃집에서 회포를 푸는 재미로 살았던 날들. 회의는 놀듯이, 결과물은 짝짜꿍이 잘 맞는 조별과제처럼. 그 와중에 짬을 내서 사진이든 영상이든 이런저런 추억도 많이 남겼고.


일이 힘든 만큼 우정은 더 커졌다. 오죽하면 회사 사람들이랑 회사 밖에서도 만날 정도였으니까. 맛집 도장 깨기는 기본이요, 삼삼오오 모여 야구장에 가거나 방탈출 게임을 하러 가기도 했다. 회사를 탈출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한 번은 친한 후배들과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어떻게 직장 동료랑 여행을 가냐고 놀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행은 기대보다 훨씬 더 즐거웠다. '회사란 정말 왜 이럴까', '그 캠페인은 유독 힘들었는데 진짜 오래 기억날 것 같아', '나중엔 뭘 하고 살아야 하지?' 등등. 우리는 일에 대한 고민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나눴다. 상황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 대화가 잘 통했다. 역시, 회사에서 이렇게 좋은 인연들을 만난 건 정말 감사할 일이지. 여행에서 돌아오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즐거웠던 여행을 다녀온 지 딱 일주일 뒤.

여행을 함께한 후배 A에게 카톡이 도착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혹시 내일 저녁 시간 괜찮으세요..?]


갑자기 모든 시공간이 멈췄다.


이 원고의 더블엔터로도 그때의 심정이 다 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드릴 말씀? 드릴 말씀이라고? 후배 A와는 햇수로 무려 5년을 넘게 함께한 사이였다. 업무든 취미든 많은 것을 함께했고,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할 말이 있으니 저녁시간을 비워달라고? 함께 일하는 동안 저런 요청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직장인이라면 아는 ‘드릴 말씀’의 무게


제주도는 이별 여행이었던 걸까? 순간 이런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후배가 덧붙이는 말은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일단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고 했다.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 그나마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일단 자자.. 아니 근데


잠이 안 왔다.


몸을 뒤척일 때마다 마음이 호떡 뒤집듯 바뀌었다. 그래 뭐, 평생 이런 일이 없을 수는 없는 거니까. 좋은 일로 적을 옮기는 거라면 잘 보내줘야.. 그래도 그렇지! 아니지. 어차피 각자의 인생이니까 응원해 줘야지. 그치만 여행 가기 전에 귀띔이라도 해줄 수는 없었을까? 하.. 애써 잠을 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날. 마치 시트콤처럼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후배 A를 우연히 마주쳤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덜 됐는데 엘베에서부터 마주칠 일이야?! 얼굴을 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째 마음이 더 착잡했다. 이따 저녁에 다시 얘기하자고 말을 자르고 후다닥 내 자리에 앉았다. 가까운 후배의 자리가 유달리 멀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회사를 떠났지만 이 정도의 데미지는 아니었다. 하루 종일 어떻게 일을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그냥 뭐랄까, 그 상황이 너무 속상하고 서운했던 것 같다. 죽은 줄만 알았던 개 큰 F력 발동 그래도 나한테는 먼저 말해줄 수 없었을까.. 후배의 선택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못 했다. 선배가 되어서 이렇게 찌질해도 되나. 본인은 꽤 많이 고민했을 텐데. 오만 감정이 다 교차했다.



어쨌든 이미 결정은 내려졌고 상황도 바뀐 것이었다.


긴 시간 함께했던 만큼 마음이 허하고 서운했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후배이니까 예쁘게 보내주고 싶었다. 돌아보면 후배 A는 회사 생활 중 내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갑자기 선임이 되었을 때 입사해 많은 일을 도와주었고, 한참 서툴고 부족한 선배였던 나를 늘 믿어준 사람이었다. 후배지만 일을 하면서 항상 의지가 되었던 사람이었고, 회사 안이든 밖이든 함께하면 언제나 즐거운 사람이었다. 후배와 함께한 5년이 그냥 후루룩 지나간 줄로만 알았는데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 혼자서 오래 다녔다고 생각한 회사 생활은- 결국 곁에 후배처럼 좋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마지막 인사는 예쁜 와인바에서 했다. 그동안 같이 찍었던 사진을 시간순으로 모아서 한 판에 뽑아줬는데 그걸 만들다가 또 눈물이 찔끔 났다. (하 씨 뭘 이렇게 같이 많이 했어ㅠㅜ) 후배가 입사했을 때 꽃다발 사들고 신입사원 연수 수료식에 찾아갔던 썰. 격한 회식 후 회사 로비에 쓰러진 나를 챙겨다 카카오 블랙으로 데려다준 썰. 좋은 마음으로 같이 야구장 갔다가 한 명은 딥빡치고 한 명은 웃는 얼굴로 집에 간 썰. 캐리어 열어놓는 걸로 영원히 서로를 이해 못 하고 극딜 했던 해외 출장 썰*. 내가 회사 때문에 응급실 실려갔던 날 전화받고 충격에 울먹인 썰. 힘든 프로젝트 같이 하느라 개고생 한 썰. 미팅에서 서로 의견 내다가 다툴뻔한 썰 등등.. 조잘조잘 추억팔이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터놓고 이야기하니 마음을 못 헤아려줬던 건 나였구나 싶어 미안해지기도 했고. 술찌 주제에 커다란 와인 한 병을 비우고 퉁퉁 부은 눈으로 헤어졌다. 이제 더 속 편히, 더 친하게 지내자! 는 말과 함께.



그 뒤로도 좋은 사람들이 회사를 많이 떠났다. 그럼에도 나는 늘 '남는 사람'이었고. 어느 날 착잡한 마음에 넋두리를 하는 내게 오랜 시간 같이 일한 선배가 이런 얘기를 했다.


"회사라는 게 다 그런 거야."


그땐 그 말이 좀 속상했던 것 같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을 떠나보냈는데 어떻게 그렇게 쿨하게 받아들이지. 하지만 지금은 그 말에 조금은 공감이 된다. 모든 걸 붙잡을 순 없다. 회사는 회사고, 우리는 직장인이니까. 인간관계가 이 안에서만 예쁜 모습으로, 언제까지고 이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문득 돌아봤을 때 자리에 없고, 메신저에서 이름이 사라지고, 사내 시스템에 'deleted'로 뜨는 걸 보며 한동안은 마음이 허했지만- 지금 후배 A와는 오히려 더 속마음을 잘 털어놓는 사이가 됐다. 회사의 인연에서 끝이 아닌, 더 길게 볼 수 있는 사이가 됐다. 회사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우리의 인생은 계속되니까.



그렇게 '회사란 그런 것'임을 하나둘 배워가며, 나는 서서히 또 다른 문제를 직면하게 됐다.



*06화 저온 화상,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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