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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사람의 계산법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by angie 앤지

'잘 남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고민하던 어느 날, 우연히 회사 게시판에서 커리어 코칭 포스터를 발견했다. 학교 다닐 때야 자소서 첨삭이며 면접 컨설팅도 받고 했지만, 입사한 지 7년을 훌쩍 넘겨 이런 게 필요할 줄은 몰랐는데. 우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청을 했다. 누구라도 내 얘기를 들어주었으면 싶었다.


*커리어 코칭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이쪽으로

https://brunch.co.kr/@angiethinks/48




코칭을 받기 전 진단을 위해 사전 질문지를 작성했다. 일부러 업무를 마치고 혼자 사무실 구석에 앉아 답을 적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회사에서 써야 더 리얼한 감정이 담길 것 같아서


Q1.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내부/외부)


첫 번째 질문부터 어려웠다. 스스로 이런 걸 물어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다가 쓴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런 상담을 받는 게 처음이라서 좀 어색하고 부담스럽기도 함..." 그때의 생생한 기록을 발췌해 옮겨본다.


1) 일하는 의욕이 매우 떨어짐

이유가 뭔지 명확하게 잘 모르겠음. 한 브랜드에 오래 있어서 좀 지겨운가? 이 연차가 되면 전처럼 그렇게 막 열정적으로 일을 안 하는 게 맞나? 안 되는 거 못하는 거 등등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많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엄청 에너지 있게 일했던 거 같은데..


2) 친한 사람들이 회사를 떠남

여러 명이 떠나고 공백이 생김. 일적으로도 의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떠나간 것이라 심리적 영향도 큼. 회사를 당장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지만 안주하고 있는 것일까 봐 걱정됨.. (후략)


3) 회사 외의 자아실현

취미인 글쓰기에서도 성과를 내고 싶은 압박감이 듦. 아무도 안 시켰는데 잘하고 싶어서 무리를 하고 스트레스를 받음. 이게 취미가 맞는 건지. 왜 또 사서 고생을 하는 건지. 내 욕심이 문제인 건지 고민.


처음엔 그렇게 차근차근 문제를 찾는 것부터 시작했다. 덕분에 최근의 나는 어떤 상태인지,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문항으로 넘어갔다.


Q2. 무엇을 원합니까?


… 세상에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있다니. 왓 두유 원트? 나니가 호시이데스까? 니 야오 션머?.. 어떤 나라 말로해도 어려운 질문이자 3n살에도 성숙하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눈물/


- 일을 다시 즐겁게 받아들이고 싶음. 마음을 편하게

- 어차피 이직을 할 마음까지 없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음

- 너무 예민하게 굴기 싫음

- 좀 내려놓고 싶다


여전히 모호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적긴 적었다. 회사 그만두고 돈 많은 백수가 되고 싶어요 이런 걸 안 적은 게 어디인지 이 과정에서 내가 원하는 결괏값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었다.


Q3. 그 목표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와아. 마치 최종보스 같은 질문이었다. 다행히(?) 이 질문에는 아직 답을 내리지 않아도 되어서, 바로 코치님과 본격적인 코칭을 시작했다.




"그 고민이 시작된 게 언제였나요? 그 고민이 시작된 날부터 지금까지 어떤 변화들이 있었나요?"


코치님의 질문에 차분히 내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돌아봤다. 당시에는 코로나의 영향으로 회사 안팎의 변화가 컸고, 건강상의 문제도 있었고, 나의 삶을 둘러싼 여러 사건들이 있었다. 하나 둘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외부의 변수'가 많다는 걸 알게 됐다. 고민의 원인을 늘 내 안에서만 찾았는데, 단계적으로 질문을 하다 보니 시작이 나의 내면이 아닌 외부요인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항상 나의 문제라고 여겼고, 내가 바뀌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고만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내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금 더 남 탓을 해보세요. 그리고 다음 주에 만나요."


코치님이 처음으로 내려주신 솔루션은 이거였다. 놀랍게도 그것만으로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다음 단계는, 나의 선택에 따른 득실을 따져보는 것이었다. 만약 이 회사를 떠난다고 가정했을 때 얻을 것과 잃을 것에 대해 적어보는 활동이었다. 표를 만들어 가능한 구체적으로 써야 했다. 물론 가보지 않은 길을 모두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몇 가지는 확신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내가 그저 입버릇처럼 퇴사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게 아니면 정말 내 무의식에 어떤 싸인이 있는 건지 점검해 볼 수도 있었다.


당시 적어본 리스트는 다음과 같다.


우선 얻게 될 것

새 사람, 새 경험, 전문성 강화, 약간의 의욕 up, 리프레시, 또 다른 기회 등. 아무래도 오랜 시간 한 곳에서 일했으니 가보지 않은 영역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 가장 큰 메리트였다.


아마도 잃게 될 것

지금의 사람들, (타 카테고리 이직 시) 뷰티 마케터로서의 연속된 경력, 지금의 성장 가능성, 안정감과 오랜 시간이 걸려 얻게 된 주도적인 영역.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심적 여유.


하얀 화면에 하나 둘 키워드를 적어보니 모호하던 것들이 좀 더 뚜렷해졌다. 머릿속으로 막연히 '이직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어떤 부분에서는 스스로 뜨끔하기도 했다. 이런 부분은 내가 생각을 깊게 안 해봤구나, 하면서.


"앤지님은 마케터로서 성공하고 싶나요? 아니면 앤지님 그 자체로 성취하고 싶나요?"

"화장품이 좋아서 여기서 일하나요? 아니면 마케팅이 좋아서 여기서 일하나요?"


코치님의 질문 폭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p) 질의응답을 거치다 보니 상황을 보다 더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어떤 부분을 더 세부적으로 고민해야 할 지도 알게 되었다. 혼자서만 속으로 끙끙 앓았다면 깨닫지 못했을 것들이었다.




두 차례의 코칭이 끝난 뒤, 나는 홀로 세 번째 단계에 돌입했다. 바로 문제의 종류/해결 시점 점검해 보기였다. 현재의 문제는 언젠가 해결될 수 있나? 있다면 가까운 미래인가 혹은 먼 미래인가? 를 계산해 보는 일이었다.


인력 문제: 몇 달 뒤 일부 해결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해결 안 됨. 인당 업무 강도 달라질 가능성 거의 없음.


버거운 업무: 새로 맡게 된 업무는 적응하면 조금은 나아질 것. 인계받은 땜빵 업무는 시간 지나면 조금은 정리 가능. 그러나 새로운 업무에서 배울 점도 있음. 멘탈 관리를 위해 업무를 대하는 태도와 마인드셋 재정비도 필요.


매너리즘: 한 곳에 있는 이상 해결 어려움. 태도의 전환과 새로운 트라이 필요.


이렇게 문제를 쭉 리스팅 해보니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조금씩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만약 달라지지 않을 문제라면 내가 이 문제를 더 참을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만약 견딘다면 리스크는 무엇이며, 그것을 보완하는 베네핏은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세부 질문을 통해 나의 스탠스를 다져가는 과정이었다. 스스로 학습 심화과정



그렇게, 커리어 코칭을 계기로 나는 '어떻게' 남는 사람이 될지를 계산해 냈다. 그리고 그 후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을 때도 이러한 방법으로 나만의 답을 정했다. (again and again) 만약 이런 과정을 거쳤는데도 도통 계산이 서지 않았다면, 아마 주저 없이 퇴사를 선택했을 것이다.


[퇴사와 이직을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인스타그램에서 장기근속 무물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을 열었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겨내고자 해서 이겨낸 건 아니다. 그냥 그 시점에 나만의 기준으로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퇴사와 이직을 꼭 이겨내야 하나? 나는 명확한 이유가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결단을 내리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첫 회사도 그렇게 바로 나왔고. 그 후 2년 동안 백수로 지낼 줄은 몰랐지만



아주 가까운 동료나 팀원이 '회사를 견디기 힘들다'라고 말하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를 너무 아끼고, 너와 더 오래 일하고 싶지만 퇴사도 방법'이라고. 남는 사람의 계산법을 터득한 나는 어느덧 그런 사람이 됐다. 회사도 나를 선택하지만, 나도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니까. 주도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릴수록 일하는 나의 신념은 확고해졌다. 마치, 깨어질지언정 쉽게 녹아내리지 않는 백자처럼.



*10화 인간 백자 납시오, 다음 주 목요일에 만나요!






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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