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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음의태양 Sep 13. 2021

명절이 지옥같을 때가 있다

명절마다 스트레스 증후군, 진정한 명절의 의미는


결혼을 하고 나서 언젠가부터는 명절이 지옥 같을 때가 있다. 

물론 부모님을 비롯한 우리 가족이 글을 보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신혼초에는 한반도의 가운데쯤 있는 친가에 들렀다가 남쪽 아주 멀리 있는 처가에 들르는 일이 고됐었다. 교통지옥에서 운전을 아주 오랜 시간 하는 노동이 동반되거나, 기차의 빈자리를 실시간으로 조회하는 수고가 있긴 했다. 어린아이들의 짐을 한가득 챙겨 욱여넣고, 오랜 시간 차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고 운전하는 일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오히려 쉬운 노고이리라 짐작한다. 


명절은 정말 오랜만에 여러 계층의 가족 구성원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이다. 이질적인 계층과 다양한 지역색이 있으니, 항상 갈등의 요소는 어디에서나 상존하기 마련이다. 서로 잘 알고 있는 부부가 매일 같이 살아도 갈등이 있는데, 대가족이 모이는 명절은 오죽하겠는가. 특히 명절에 같이 모여 공통의 과업을 완성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 일이 서로가 매우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명절에 제사(차례)상을 차리는 우리 집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큰 며느리인 어머니와, 작은 어머니들이 명절 전날 일찍 모여 음식을 준비하셨다. 다른 지역에 사시는 작은 어머니들은 명절 전날 음식을 하기 위해 정해진 오전 시간에 오셔야 했고, 만약 늦게 오시는 날이면 할머니와 어머니의 핀잔을 들으며 쩔쩔매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시간이 지나 형과 내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리면서부터는 그 작은 어머니들의 자리는, 며느리들인 형수님과 아내가 자연스레 대신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그리고 아내가 형과 형수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고 늦게 도착하게 된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혼 후 첫 명절인 추석 때, 고향을 내려가면서도 지각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내의 명절 전 스트레스 증후군의 일종이라 생각된다. 고향에 내려가기 전날 알 수 없는 이유로 울고 있는 아내에게 내가 쏘아붙여 한 어떤 말이 화근이 되어 큰 다툼이 일어나게 됐다. 

결국은 일찍 출발하지 못해, 교통 체증 속에서 첫 명절 전날부터 친가에 가야 하는 시간을 못 지키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명절 전에 친가에 내려가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종종 늦게 도착하는 일이 많았다.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명절 전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가 연달아 있어서 안 그래도 여러 번 고향에 다녀온 직후였다. 

명절 전날 늦게 출발하면 곤란해질 수 있으니, 전날 미리 밤에 챙겨가자라고 아내에게 말을 했다가 그게 화근이 되어 적지 않은 다툼을 한 적이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그것을 미리 아시고, 여차저차 추석 연휴와 멀지 않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제사를 한 번에 합쳐서 하기로 한 계기가 되었다. 


친정에 먼저 가면 안돼?


“명절에는 왜 친정에 먼저 가면 안돼?”

신혼 초에 아내가 내게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참 동안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문뜩문뜩 내가 당연히 맞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그동안 의심 없이 따르던 일들이, 앞으로도 결코 맞지 않을 수 있다는 것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점점 알아가면서 이제 명절이 더욱 두렵고, 꼭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은 불안감에 정말 명절답지 않게 되었다. 


고향집도 더 이상 편한 예전의 그 집이 아니었다.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노동을 요구받는다는 부담을 갖는 아내와, 그것이 가부장적인 문화의 소산이고 이제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것이다.

그 문화의 가장 큰 피해자인 어머니는 자신이 해오던 것을 마구 바꾸는 것 자체가 어머니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기에, 그 문화의 불가피한 계승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 앞에서, 정확히는 가부장적 문화의 최대의 피해자이며, 동시에 계승자인 어머니의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그리고 그걸 감내하는 어머니와 형수님과 아내를 보며,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고 느끼며, 나도 언젠가부터 명절 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던 것이다. 


명절 전후에 너무 이런저런 다툼이 많다 보니, 연휴 전 주부터 서로의 예민함에 부딪혀 크게 상처를 낼까 두려워 더 예민해졌다. 또 가족과 친지들을 보는 반가움도 잠시. 나와 우리 가족의 언행이 그들의 질서와 부딪힐까 항상 고민과 불안에 휩싸였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나에게 가장 좋은 명절은 분란이 없는 명절이 되었다. 

그야말로 어떤 이슈나 갈등의 구실도 없는 명절. 모든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귀경길의 꽉 막힌 도로에서, 피곤해하는 아내가 잠에서 부스스 일어나 운전석에 앉은 나에게 ‘그때 왜 거기서 그렇게 말했어?’라며 뜬금없는 질문으로 싸움의 포문을 열지 여는 상황만이라도 안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잘 없었던 것 같다. 



<작은 아버지>


다혈질이었지만, 동시에 다정하고 활달하셨던 작은 아버지는 큰 집인 우리 집에 명절에 오실 때마다 유독 작게 보이셨다. 형님인 아버지를 어려워하셨고, 아버지의 아들들인 조카들인 우리들의 텃세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의연하게 행동하셨던 것 같다. 때론 버릇없는 큰 집 조카들이 자신의 작은 집 아이들에게 무례하게 행동할 때에도 오히려 작은 집 식구들의 인내를 바라셨다. 간혹 나이 어린 형수님의 노여움에, 그 형수의 화가 작은 어머니인 그의 아내에게 미쳐도, 그 상황을 빠른 사과로 모면하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하셨다. 

다만, 큰 집 조카들의 텃세와 나댐이 그의 아이들의 기를 꺾지 않을까 걱정이 될 뿐이셨을 것이다. 


어느덧 그 작은 아버지의 모습이, 그 작은 집 식구들이 나와 우리 가족의 모습이 된 것이다. 


지난 명절에도 우리 가족의 행사는 기대처럼 평온하지 못했다. 

그때도 차가 밀려, 지각을 한 아내에게 음식을 먼저 하시던 형수님이 단단히 화가 나셨던 모양이다. 

결국은 명절에 또 일이 터졌다. 매일 늦게 온다고 형수님이 아내에게 정말 역정을 내셨다. 

화가 난 형수님 앞에서, 그날은 내가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 다혈질의 작은 아버지처럼


명절음식, 제사가 뭐라고

명절, 명절 음식, 차례, 제사.

이런 것들을 떠올릴 때, 나는 가족과 명절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진정한 가족과 명절의 의미와 내용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명절 음식이나 차례 등의 형식 때문에, 그 실질의 의미를 생각지 못하게 되는 모습은 참 안타깝다. 

기존의 질서를 행해 오던 세대와 마지못해 그것을 따르는 세대, 그리고 기존의 질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이들의 동행은 언제나 갈등의 요소가 내재한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큰 집과 그리고 작은 집 식구들과 내외하거나 결별했다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제사에는 안경을 벗으라고?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명절에 여러 친척들과 함께 차례를 지내고 있었다. 눈이 갑자기 나빠졌던 탓에 그 무렵쯤 나는 안경을 처음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친척들과 차례상에 절을 하기 위해 서 있을 무렵, 지금은 돌아가진 작은할아버지께서 나한테 갑자기 호통을 치셨다. 

‘절을 하는데 왜 안경을 쓰고 있어?’라는 말에 나는 그 이유를 묻지도 못하고 그냥 안경을 벗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안경을 벗은 내 모습을 본 아버지는 내게 물었다.

‘왜 안경을 벗었어?’

나는 작은할아버지께서 안경을 쓰지 말라고 해서 벗었다고 하니, 아버지도 그걸 듣고 나서는 ‘아 나도 벗어야지’ 하시고 안경을 벗으시고 차례를 지낸 적이 있었다.


요즘도 안경을 쓰고 제사를 지내면 서로 난감한 상황이 발생할까.

그 예전에는 안경마저도 조상을 기리는 의식에서는 짙은 화장과 마찬가지로 그 경건한 의식을 방해하는 무엇인가로 인식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오히려 안경을 쓰지 않고 제사를 지내거나, 화장을 아예 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편하고 이상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단지 안경을 쓰고 벗는 일을 떠나 모든 것들이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도 그렇게 따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우리는 교회에 가니 제사(차례)를 지내지 않아’라고 하지만, 그들도 나름의 여러 가지 이름으로 먼저 죽은 조상을 기리는 의식을 행한다. 굳이 제사라고 명명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절에 모셔두고 와서 거창하게 하지는 않아.’

마찬가지이다. 집안 사정과 분위기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반드시 그들만의 의식과 절차를 따르게 된다. 


적어도, 어떤 의식과 절차이든 간에,

그 본연의 의의와 취지를 이해하고 공유한다면, 그 형식에 치우쳐 서로 얼굴을 붉힐 일은 줄어들 것이 분명하다. 


명절의 음식과 제사라는 형식에 초점을 두고 그 준비에만 신경을 써서 서로 마지못해 하는 그것들을 하며,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그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명절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최근에 가부장적인 문화의 소산인 여러 가지 일들로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두 딸을 낳은 형과 두 아들을 낳은 나.

아버지가 제사의 주(主)를 내려놓고, 형이 제주가 되고, 또 다음 세대에 그것의 주(主)를 이양할 때, 이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질서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제사는 장자 우선을 물리치고 아들을 가진 작은 집이 주관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정말 모를 일이다. 

가부장제가 무조건 잘못됐다는 것도 아니며, 그 문화를 비판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형식에 치우친 절차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마지못해 무엇인가를 해서 불편한 상황은 적어도 조금씩 바꿔 나가야 하지 않을까.


만약 돌아가신 분들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감각할 수 있다면, 그래서 후손들이 서로 불편해하며 마지못해 만든 음식을 차리고, 그것을 제사 음식으로 받는다면, 그분들의 마음은 과연 유쾌할까.

적은 음식을 준비하더라도 도란도란 가족들이 즐겁게 모여, 그분들을 추억하고 정성스레 준비한다면, 그분들은 다만 음식의 가짓수 때문에 노여워할까?


우리가 제사를 위해 안경을 쓰고 벗는 문제를 떠나, 정말 우리의 눈과 감각을 가리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적어도 나의 명절은

가족의 의미를 알고, 서로를 소중히 하며, 조상을 기리는 의미 이상의 어떤 것도 그 우선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명절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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