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암 사거리와 라일락의 추억

by 심준경

성북구에 있는 종암 사거리 근방을 지나다닐 때면 라일락이 생각난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두 개의 대로변이 만나는 지점이다. 6차선 도로가 둘이 만나는 그런 대로변에 라일락 꽃이 펴있을 리는 만무하다. 애초에 나는 라일락 나무를 신경 써서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이야기하는 라일락은 꽃의 이름이 아니라, 아이유의 노래 제목이다.


마트나 도서관, 버스정류장, 햄버거집 등을 향하기 위해선 종암 사거리 일대를 지나야 하는 이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은 2021년 봄이었다. 당시에 나는 석사 졸업 논문 관련 수업조차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악질의 슬럼프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이는 서른 살. 이십 대 중반부터 심각해진 조울증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삼십 대가 되어서도 5년째 같은 상황에 계속 빠져있는 그 시기,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때 집안의 사정에 따라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벽에 자취방의 짐을 다 형의 차 트렁크에 넣고서 서울의 반대편으로 향하였다. 당시 형이 틀어준 노래는 '라일락'. "오, 라일락, 꽃이 지는 날 굿바이."라는 후렴구를 가진 곡이다. 당시 이곡에서 의도한 바는 모르고, 아이유가 작사한 곡치고는 임팩트가 약하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아이유에 기대하는 건 좋은 가사였다.


아이유의 팬인 내가 아이유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가 아이유의 작사 능력이기 때문이다. 아이유는 가사가 참 진솔하다. 가장 감탄한 부분은 밤편지의 "나의 일기장 안에 모든 말을 꺼내어줄 순 없지만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리운 연인을 향해 모든 것을 다 꺼내어줄 수 있는 듯이 말하는 신파 가득한 평범한 가사와는 달리, 어딘가 여운을 남기는 가사였다. 과연 우리는 일기장에 그리운 연인에 대한 사랑만을 빼곡히 적어놓을까. 나라는 사람은 마음 수양이 부족한지, 그렇게 미안함이나 사랑만 가득하지는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꽃이 지는 날 굿바이"는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이유의 팬인 나는 해당 앨범에 대한 정보를 검색해보았다. 라일락의 앨범 표지는 예뻤고, 뮤비 속의 아이유도 예뻤다. 그렇게 앨범의 정보에 대해 찾다가 라일락이라는 노래에는 단순한 이별 노래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노래는 29살인 아이유가 자신의 20대와 이별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꽃이 지는 날 굿바이."가 연인과 이별할 때하는 노래가 아니라, 자신의 한 시절과 이별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뭔가 결연하지 않은가. 그것도 사람들이 가장 호시절로 친다는 20대와 결별할 때 말이다.


나도 나의 20대와 내가 결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를 하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뀐 그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나의 20대는 우울함과의 사투였고, 지나간 세월과의 사투였다. 20대 중반까지 나는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꿈을 연속해서 꿨다. 10대 때의 여파였다. 이미 지나가버린 멸시와 모욕의 끝자락을 억지로 붙잡고선, 이미 없는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고 몸부림치곤 했었다.


내가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되어 그런 무시들을 이길 거라고 결심하곤 했었다. 주요학자로써 대학 교과서 1장에 나오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나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는 나를 끝없이 혐오했다. 혹은 나는 아무런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는 것 같아 끝없이 무기력해졌었다.


그런 무기력과 자기혐오에서 나올 필요가 있었다. 이사를 한지 얼마 안 된 집에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30대라는 새로운 시기를 맞이해서. 그래서 라일락이라는 노래가 그 시기에 나온 게 나에게는 어떠한 명령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한 자기혐오와 무기력에서 벗어나오라는 명령.


그 노래를 반복해서 듣곤 했다. 특히 그 노래의 첫 도입부 파트를 좋아했다. "나리는 꽃가루에 눈이 따끔해 (아야) 눈물이 고여도 꾹 참을래 내 마음 한켠 비밀스런 오르골에 넣어두고서 영원히 되감을 순간이니까" 나만이 간직할 그런 작별의 순간. 어두운 과거를 마음 한켠 비밀스러운 공간에 넣는 상상. 그런 생각에 이르면 한편으로 비장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꼭 그 곡이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 작별에 대해 "아 얼마나 기쁜 일이야."하며 맞이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 마지막이 기쁠 수 있는 건 20대를 전성기로 보낸 아이유만이 가능한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며 한편으로 질투가 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사를 한 직후 20대와 작별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아이유에 대한 한편의 질투, 그런 감정을 마음에 새겨 넣었던 그때, 나는 이사한지 얼마 안 된 집 근처에서 산책을 하곤 했다. 집 근처의 지리를 잘 몰라 헤매다가 결국 큰길을 찾아 종암사거리 일대에 도달했다. 30세의 1월 1일이 아닌, 라일락 노래를 들으며 종암 사거리 일대를 산책을 하던 시절이 나의 20대와의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종암사거리 일대를 지날 때면 그 시절이 생각나곤 한다. 혹은 내 음악 알고리즘이 라일락 노래를 틀어줄 때면… 1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난 석사를 졸업하진 못했으나 최소한 수업에 참석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피하지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리라고 결심한 만큼 나아졌는지는 아직까지 의문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20대의 그 마음 상태에서는 벗어났다. 그것이면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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