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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Jan 16. 2024

돌봄은 누구의 책임일까

가족과 국가의 어중간한 그 어딘가에 있는 책임

나는 사회복지사다. 20년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갑자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분들을 돕고, 돌봄이 필요한 분들을 도우며, 그 도움을 위한 또 다른 일들을 해왔다. 그 일의 영역에서 나는 서비스 제공자였다. 누군가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요청하러 '복지관'이라는 곳을 찾아오면, 사정을 한다. 그분의 개인력, 즉 가족관계, 병력, 경제상황, 정신건강 등을 확인하고 현재 무엇이 어렵고 힘든지 낱낱이 묻는다. 상황이 힘들수록 지원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진다. 사람을 대상화하고, 문제화하며 '이 분은 이렇게나 힘든 사람이에요'를 문서로 남긴다. 그 과정은 꽤나 고역스럽다. 그래서 사회복지 현장에서는 관점의 전환을 외친다. '사람 중심' , '해결중심', '강점관점' 등 문제적 관점에서 벗어나 스스로 할 수 있는 영역을 찾고, 스스로 할 수 있게 돕는 일에 집중하려고 한다. 여전히 어렵고 부족하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그 과정은 예전과 달리 할 만하다. 



엄마가 치매에 걸렸다. 예전과 다른 심상치 않은 기억력과 감정상태를 보며 검사를 받으러 간 날. 꽤 긴 시간 동안 검사를 받는 엄마를 기다리며 '엄마가 잘해줘야 할 텐데'라는 생각을 했다. 상상이 가는가? 딸인 나는 엄마가 무엇을 잘하기 바랐을까? 엄마의 심상치 않은 기억력을 잘 어필하기를 바랐다.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치매'진단을 받기 바랐다. 이어진 보호자 상담에서 나의 민낯은 낱낱이 드러났다. 나는 엄마를 치매환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할수록 심취해서 더 과장되게 말했던 것도 같다. 몇 십 분의 시간이 흘러 검사실 밖으로 나와 엄마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나의 민낯을 같이 마주했다. 엄마를 한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치매 환자로서 설명하고, 환자로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은 꽤 오래 죄책감에 시달리게 했다. 


하지만, 나도 변명거리가 있다. 우리나라 시스템에서는 엄마가 치매 진단을 받지 않으면 돌봄 지원을 받을 수가 없다. 나도, 남편도 일을 하러 나가는 시간에 집에 혼자 남겨진 엄마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일을 때려치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 경제적 손실을 보상해주지도 않으니 말이다. 



엄마는 '치매'판정을 받았다. 놀랍게도 치매 판정을 받자, 엄마는 치매환자가 되어갔다. 진단 전보다 기억력이 더 없어졌고, 거동도 더 불편해져 갔다. 치매 진단을 받기 6개월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대학병원 진료를 다녔는데, 이제는 혼자 바깥 외출도 하지 않으려 한다. 갑자기 몸의 떨림이 심해졌으며, 기억력은 나빠졌다. 우울감도 심해져 사람을 기피하고, 짜증이 많아졌다. 더 나아지기 위해 받은 진단과 약이 엄마를 더 나빠지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논리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다. 돌봄이라는 짐을 나 혼자 지기 싫어, 국가의 도움을 받고자 했던 몸부림이 엄마에게 더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 같아 내 마음은 계속 요동친다. 


적극적으로 국가제도를 활용하기로 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장기요양등급을 신청해 4등급을 받았다. 방문요양보호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엄마와 상의 끝에 주 3회 요양보호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센터에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인지프로그램 위주로 서비스를 진행해 달라. 가사서비스는 절대 하지 마시고, 주 3회 2일 3시간의 서비스 시간에는 산책과 인지프로그램만 요청했다. 센터에서는 병원동행 서비스도 가능하다고 안내했고, 가까운 병원 방문은 요양보호사가 동행하기도 했다. 주 7일 168시간 중 50시간 정도는 혼자 있었던 엄마는 50시간 중 9시간은 돌봄을 받게 되었다. 그 시간만큼은 나도 직장에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난주 엄마는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감기인 줄 알았는데 점점 심해져 종합병원 2군데를 돌다 결국 입원을 했다. 폐렴 진단을 받고 입원하기까지 너무 힘들었다. 휴가를 내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했으며, 응급실에서 온갖 검사를 하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엄마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결국 일주일 이상 입원해야 한다는 병원의 진단에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 엄마를 돌보는 두 번째 외부인이었다. 휴가를 내기에는 너무 긴 기간이고, 아이도 돌봐야 하는 상황이라 간병서비스를 이용하기로 했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자식이 해야 할 도리를 타인에게 넘긴 것 같은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간병서비스는 1일 130,000원의 유료서비스다. 적지 않은 돈이다. 간호간병통합병동도 있지만, 공급이 적어 원한다고 이용할 수 있지 않다. 몸이 아플 때 돌봄은 누구의 몫일까? 나이가 들어 필요한 돌봄은 누구의 몫일까? 


돌봄은 현실이다. 아이든, 나이 든 부모든 돌봄이 필요하다. 그 역할은 고스란히 부모이자 자식인 중장년의 성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결국 경제활동을 포기하게 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여 돌봄의 질을 낮추거나 간호살인 등으로 이어지는 부정적 결과를 낳는다. 

돌봄은 누구의 몫일까? 개인의 몫이 아니다. 사회에서 함께 짊어지고 시스템화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돌봄의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실제 돌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음을 한탄한다. 앞으로 나에게 다가올 돌봄의 짐을 나눠줄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는 이 허황된 마음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자신에게 현실로 다가올 돌봄의 무게를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국가적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사회문제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탓이나 개인의 짐이 아님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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