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되기
예전 나에게 엄마는 호랑이 같이 무서운 존재였다.
예전 나에게 엄마는 억척스럽고, 뭐든 알아서 잘 해내고,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는 슈퍼우먼이었다.
요즘 나에게 엄마는 양 같은 존재이다.
요즘 나에게 엄마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하나씩 없어지고, 기억이 사라지고, 힘들다고 투정 부리는 딸이다.
"엄마, 이것 좀 더 먹어봐."
엄마가 "안 해!!" 라며 고개만 옆으로 휙 돌린다. 거듭되는 권유에 똑같은 행동이 반복된다.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아, 생각났다! 주말에 TV로 본 로맨스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토라졌을 때 했던 그 행동이다. 남편과 드라마를 보며 "어머, 요즘 누가 저런 닭살 돋는 행동을 해~~ 어우~~ 닭살이야~"라고 말했던 그 행동이다. 순간 뇌정지가 왔다. '호랑이 같던 우리 엄마가 왜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빙의한 거지?' 그 후로도 뭔가 하고 싶지 않은 게 있으면 엄마의 드라마 여주인공 빙의는 계속됐다.
"엄마! 방에 있는 옷가지는 뭐야?"
"아까 쉬야해서 갈아입은 옷이야."
'응? 쉬.... 야? 내가 잘못 들었나?'
"엄마, 뭐라고?", "쉬야했다고~ 근데 빨기 귀찮아서 그냥 놔뒀어~"
하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한숨이 나온다. 엄마가 유아어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 양치하고 자야지!"
"아까 했어~"
"아~ 거짓말하지 마!! 저녁 먹고 바로 방에 들어가는 거 봤는데 무슨 양치를 해!"
"아... 봤어? 귀찮은데, 내일 아침에 할게~"
"안돼! 임플란트랑 틀니 망가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빨리 일어나서 양치하고 자"
기어이 엄마 팔을 잡아끌어 화장실로 데려다 놓는다. 그제야 엄마는 양치를 시작했다.
뒤돌아서서 아들에게 소리친다. "준호야! 양치해야지!"
준호는 나의 13살 아들이다. 엄마는 나의 83살 딸이다.
"엄마! 그만 먹어!!"
"나 얼마 안 먹었는데?"
"아니, 엄마 저녁밥도 먹었는데 만두를 몇 개를 먹는 거야. 거기다 땅콩은 하루종일 손에서 놓지를 않고"
"네가 나 저녁 언제 줬다고 그래"
"아까 준호랑 같이 먹었잖아. 기억 안 나?"
"안 먹었어~"
무섭다. 저녁 먹은 것조차 잊어버린 거라면 엄마의 기억은 대체 어디쯤에 머물고 있는 걸까. 저렇게 기억이 하나하나 자꾸 지워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찰나의 시간에 소름 끼치게 무서워졌다.
그 와중에도 엄마의 손은 땅콩을 까먹기에 여념이 없다.
"엄마!!!!!" 결국 나는 소리를 질렀다. 걱정을 다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나란 딸은, 결국 화로 표출하고 만다.
"엄마! 고지혈증에, 당뇨, 고혈압까지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이 먹으면 어쩌려고 그래!"
"냅둬라! 아파도 내가 아프지, 네가 아프냐?"
땅콩을 한 움큼 집어 들더니 주방 쪽으로 도망간 엄마는 다시 귤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픈 건 엄마지만, 병원 데리고 다니고, 약 챙겨 먹이면서 수발드는 건 나잖아! 그럼 혼자 아프든지 말든지 티도 내지 마!!" 폭발했다. 알고 있다. 엄마가 일부러 나를 약 올리려고 더 먹는 것을. 남편은 뻔히 보이는 장모님의 약 올림에 넘어가 기어코 화를 내고 마는 나를 위로하다, 한마디 툭 던진다.
"장모님이 저러실 때마다 나는 어떻겠어. 나도 싫어."
순간 머리가 띵했다. 그래. 내 엄만데.. 내가 엄마를 막대하면 다른 사람들은 더 귀하게 여기지 않을 텐데.. 내가 경솔했다. 물론, 내 남편이 엄마를 막대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그저 내가 그럴 뿐이고, 나의 모습을 보고 남편과 아들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노파심이 생겼을 뿐이다.
치매 환자들이 식탐이 많아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방금 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서 다시 먹을 것을 찾는다. 결국 기억을 못 하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음식을 찾게 되는 증상이 나타난다. 치매 환자들은 먹고 나서 배고픔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식사를 했다는 것을 기억을 못 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배고픔을 느끼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배고파서 드신다기보다는 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드시는 것이므로 차라리 칼로리가 낮고 소화가 잘 되는 음식들을 자주 드시게 하는 게 현명한 대처법 일 수 있다는 말이다.
[출처] 치매 환자 식탐 배고픔 이유와 치료|작성자 건강 이선생
엄마가 뭘 먹는 것에 내가 민감한 이유는, 치매 때문이다. 엄마가 특정 음식만 고집해서 계속 먹거나, 계속 먹으면 덜컥 겁부터 난다. 치매가 심해져서 드라마에 나오는 치매 환자들처럼 밥 먹고 돌아서서 '나 왜 밥안주니!'라고 할까 봐 무섭다. 엄마가 더 나빠질까 봐 무서워서 평상시와 같은 행동임에도 예민하게 군다.
이제 나는 엄마의 식사량과 음식섭취를 하나하나 체크한다.
이제 나는 엄마가 씻었는지, 안 씻었는지 매일 확인한다.
이제 나는 엄마의 유아어에 적응해야 한다.
이제 나는 엄마가 소변실수한 옷을 빨아야 한다.
이제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엄마의 손길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던 그때, 온 정성을 다해 힘든 것도 모르고 나를 보살피고 돌봤던 엄마의 역할이 내게 돌아왔다. 나는 자신이 없다. 엄마처럼, 엄마를 돌볼 자신이 없다. 엄마처럼 요리를 잘하지도 못하고, 대소변이 묻은 속옷을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빠는 것도 못한다. 참을성 있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다려주지도 못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가 병에 걸렸나 보다고. 엄마가 엄마를 희생해서 나를 더 나은 엄마로 만들어주려고 치매라는 악독한 친구를 사귄 것이라고. 여전히 나는 엄마의 희생을 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았다. 나는 TV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엄마, 내가 엄마의 엄마가 되어줄게."라며 예쁘게 웃어주지 못한다. 여전히 걱정과 속상함을 짜증과 화로 표현할 줄 밖에 모른다. 그렇지만, 노력해 보련다. 엄마의 엄마가 되기 위해. 엄마는 엄마가 없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 늘 그리워하고 외로워했다. 완벽할 수 없지만, 노력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