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생산 맥주들은 정말 맛이 없을까?
국내 대기업 생산 맥주들은 대개 맛이 없다고들 합니다. 물론 국내 맥주 회사들은 취향의 차이일 뿐 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거나, 단지 ‘스타일’ 차이라거나, 품질과는 무관한 일종의 외국 브랜드에 대한 선호일 뿐이라고 하지만, 카스나 하이트는 ‘쏘맥’으로 마실 때나 먹을만 하다고도 심하게 깎아 내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국내 대기업 맥주가 맛이 없는 이유로 흔히 ‘맥아’의 함량을 거론하는 듯 합니다. 보리에 싹을 틔운 ‘맥아’는 전통적으로 맥주의 주 원료이지만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국내 대기업 생산 맥주의 경우 원가를 낮추기 위해 다른 곡물을 다량으로 섞고 맥아를 적게 넣지 않나 하는 의심이에요.
이런 의혹(?)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일본은 맥아 함량이 66.7%(2/3) 이상, 독일은 아예 100%라야 ‘맥주’로 분류하는 반면, 우리나라 주세법은 맥아 함량이 10% 이상만 되면 ‘맥주’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세법상 기준이 그렇다는 것일 뿐 실제로 국내 대기업 맥주들의 맥아 함량이 형편없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클라우드나 프리미어 오비 같은 맥주들은 아예 ‘맥아 함량 100%’를 광고하기도 하죠. 다만, 구체적으로 맥아 함량을 몇 % 라는 것을 정확하게 밝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여전히 의혹(?)이 남기는 합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하는 점은 ‘맥아 함량 100%’라는 것이 반드시 ‘맥아를 많이 넣었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즉, 맥아 함량이 100%라는 것은 맥아 외에 다른 곡물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일 뿐 맥아를 얼마나 많이 넣었는지와는 관련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맥아 함량’에 대한 업체 관계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외국 맥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맥아를 적게 사용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말들이 여전히 나오는 듯 합니다.
또 자주 거론되는 것은 만드는 공법입니다. 카스나 하이트와 같은 맥주들은 ‘하이 그래비티High Gravity’ 공법으로 만드는데, 발효를 통해 약간 높은 도수의 맥주를 만든 다음 탄산수를 섞어 원하는 도수를 맞추는 방법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도 맥주 회사에서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하지만 결국 생산량은 늘리고 원가는 낮추기 위한 방법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적어도 전통적인 맥주 제조 방법은 아니니까요.
한편, 롯데의 클라우드 같은 맥주는 발효 과정 이후에 추가로 물을 섞지 않는 ‘오리지널 그래비티’ 공법을 사용한다고 광고하는데, 이에 대해 다른 업체에서는 발효 이전에 물을 섞어 처음부터 농도를 조절하기 때문에 순서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고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하이 그래비티’는 어떻게 설명하더라도 맥주를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면서도 가능한 품질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하는 방법일 뿐 퀄리티 높은 맥주를 만드는 방법은 아닐 겁니다. 다만, 외국의 대형 맥주회사들도 이 방법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므로 꼭 국내 대기업 맥주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국내 대기업 맥주들이 맥아를 적게 넣거나 발효 후에 물을 섞는 방법으로 원가를 낮추기 때문에 맛이 없다는 비난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맥아를 적게 넣는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고 높은 도수로 발효 후에 탄산수를 섞어 원하는 도수까지 낮추는 방법은 외국 대형 맥주업체들도 사용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크래프트 맥주(쉽게 말해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다양한 맥주들)과 국내 대기업 맥주를 비교하는 것도 옳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카스와 버드 라이트를 비교해야지, 카스와 발라스트 포인트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개인 취향이겠지만 솔직히 버드 라이트가 카스보다 풍미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다만 국내 대기업 맥주의 과한 탄산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밍밍한 맛을 강한 탄산으로 가리려는 느낌도 좀 들기는 해요.
그렇다 하더라도 국내 대형 맥주회사들이 마케팅에만 신경 쓸 뿐 정작 품질에 있어 별로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맥주회사들은 흔히 “원래 국내 소비자들은 깔끔한 맛을 선호”, “음식과 같이 마시는 경우가 많아 맛이 진한 맥주는 선호도 낮아” 등등 설명을 하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식당에서 주문할 수 있는 맥주가 그것 뿐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닐까요?
사실 국내 대기업 맥주에 별로 발전이 없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외국과 달리 집보다는 주점/식당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식당 입장에서는 비용 고려할 때 다양한 맥주를 갖추기가 쉽지 않고 국내 주류 유통구조도 특이해서 일부 맥주 전문점을 제외하고는 대개 국산 대기업 맥주 서너 가지만 판매하죠. 마트나 편의점에서 수입 맥주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고 하지만 전체 소비량 대비 비율은 아직도 턱없이 낮아요. 품질 개선이 없어도 잘 팔리니 굳이 변화를 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우리 술 문화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어요. 물론 저도 ‘소폭’ 자주 마십니다만 사실 그건 취하려고 마시는 거죠. ‘소폭’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 마시게 되면 맥주업체들이 굳이 비용 들여서 더 나은 맥주를 만들려고 할 필요가 없게 되지는 않을까요?
결국 국내 대기업 맥주가 외국 대형 맥주업체의 맥주에 비해 형편 없다는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특히 식당이나 주점에서 선택의 폭이 너무 적고 대형 맥주업체들이 품질보다는 마케팅에만 열을 올린다는 생각은 들어요.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도 소형 브루어리에서 개성 있는 맥주들이 나오는데 좀 더 다양한 장소에서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