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대치동에서 본 재미있는 입간판. 'SKY 가려면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찍어왔다.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중학교는 치열한 학군에서 나왔지만 고등학교는 어쩌다 옆동네로 떨어져서 비교적 비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수험생활을 했다. 잘하는 친구들이 모두 이과로 가버렸기 때문에 문과생인 나에게는 아주 유리한 상황이었고 고3 때 이런저런 이벤트가 있어 학교를 잘 나가지 못했지만 재수 끝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엄마가 학원을 가라고 해도 죽어도 안 가고, 매일 학원을 빠져서 잘리던 문제아였던 지라 사교육 현장에서 일하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람 인생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어서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대치동 한복판에서 일하고 있으니 스스로 신기하다고 생각한다.
교육특구에 있다 보면 정말 다양한 유형의 아이들을 보게 되는데, 일찍이 진로를 정하고 특목고를 거쳐 자신의 코스를 충실히 밟아 나가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고3이 되고 꿈이 생겨 전략적 입시를 하는 아이들도 있다. 둘 중 어느 방향이 좋다거나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각각의 일장일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이질적인 것은 초등학생 때부터 이곳의 아이들은 선행의 압박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십수 년 전에도 4학년 무렵이면 반 아이들의 3분의 1은 수학의 정석을 들고 등교했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일부 특출난 아이들은 과고에 진학한 후 진로를 잘 밟아가고 있지만, 다른 친구들의 소식은 아직까지도 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 소위 '영재'로 보이던 아이들의 대입 결과가 무조건 뛰어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매일 'SKY 가야 한다'는 입간판으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자랄까? 반항기 가득했던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면 학습지 교재는 엄마 몰래 버리고 잃어버렸다고 거짓말하거나, 엄마가 손을 잡고 학원에 데려가서 제발 다니라고 하면 혼자 공부하겠다고 끊어버리는 일상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고분고분 학원에 오는 것부터가 너무 신기하다.
방사눈 가면을 쓴 경주마 (출처 : 부산일보)
아이들 대부분은 목표의식이 결여된 채 경주마처럼 앞을 보고 달리게 되는데 이 아이들에게 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SKY를 나온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할 때 분명 유리한 꼬리표를 달고 시작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나와 나의 대학시절 친구들은 이러한 학벌 덕택에 상당히 편리한 방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내 경우에는 원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어 졌을 때 교육업을 병행하며 대학원에서 공부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아주 큰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2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의 레이스에 잠깐 성적표를 매기자면, 대학을 잘 나오는 것이 '부'나 '행복'과 직접적 연관이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고등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고 선생님들에게 무시당하던 친구는 어느새 집을 마련하고 배필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또 다른 친구는 디자이너로 자리 잡아 대기업 외주 작업을 하면서 입지를 굳혀나가고 있다. 공부를 굉장히 잘했지만 대학에 가기 싫다던 친구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 삶을 누리고 있다.
계속 공부하는 입장에서 이런 친구들을 보면 인생에서 '성공의 길'이란 정의하는 바에 따라 어느 정도 천편일률적인 레이스 위에 있을 수 있겠지만, '능력을 발휘하는 길'이나 '행복해지는 길'은 너무나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SKY 가려면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는 입간판에 잠깐 미소를 지었다가도, 뒷맛이 씁쓸해지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