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ysical health causes depression
작년 12월 중순부터 올해 1월 말까지 제주도 고향집에를 다녀왔다. 늙어가는 부모님을 위한 고향집 한 달 살기. 크리스마스 전후로 긴 여름휴가를 보내는 호주사람들을 뒤로하고 한국인인 내가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다. 몸과 마음이 지치지만 다시는 코로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결정한 일이다. 그렇게 불편하고도 뿌듯했던 한 달 반이 지나고 1월 말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다음날, 늘 그렇듯 새벽 청소일을 나갔고 밀린 번역일을 시작했다. 장거리 비행으로 인한 멀미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얹혀사는 교수님 댁에 쌓인 먼지와 물때 낀 화장실과 욕실, 한 달 반을 비워둔 냉장고며 이불, 소파, 옷장 등등 청소를 하고 닦고 정리하고 채워 넣고 그야말로 진이 빠졌다.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고 왼쪽 목에 멍울이 생겼다. 한여름인 호주에서 몸이 으슬으슬 거려 잠에서 깨기 시작했고 삭신이 쑤셨다.
오 마이 갓…..
오래된 나의 지병 중에 하나인 기쿠치병이 재발한 것만 같아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결국 호주 주치의 선생님을 방문했고 기쿠치병 재발은 5% 내외라며 혹시 모를 루푸스병과 같은 자가면역질환과 암검사를 해보자며 피검사, 소변검사, 생검초음파 검사지를 주셨다. 그리고 검사받는 동안 먹으라며 처방해 주신 항생제와 해열제, 진통제를 복용하며 지난 3주에 걸쳐 모든 검사를 마쳤다. 총 5개의 혹을 발견했고 다행히 루프스도 아니고 암도 아니었다. 그런데 염증수치(CRP)가 높게나와 주치의 선생님께서 일 그만하고 잘 먹고 푹 쉬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휴… 일을 쉴 수가 있어야 말이죠 선생님…’ 차마 입 밖으로 얘기를 못했다. 2주 있다가 보자며 좋은 하루 보내라는 주치의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만 하고 나왔다. 집으로 오는 길, 화창한 호주의 파란 하늘이 뿌옇게 보였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주르륵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태어나면서부터 단 한 번도 건강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마음이 울적했다. 객지생활 이십여 년을 버틴 건 정신력인데 이젠 점점 나빠지는 몸 때문에 정신도 바들바들 떨린다.
아픈 몸으로 태어난 관계로 남들 한다는 모든 것들을 많이 제한하며 살아왔다. 담배는 원래 피우지도 않았고 술은 돌+아이 시절 대학교 때 먹은 게 전부였고 사회에 나와 먹은 술은 총합으로 따지면 소주 세병도 안된다. 그리고 6년 전 술, 탄산, 주스는 아픈 몸을 위해 끊었다. 작년 11월부터는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와 아이스크림도 끊었다. 커피가 좋아 울릉공에서 카페사업까지 했던 나였는데 독한 마음으로 커피를 끊었다. 한 달 넘게 극심한 두통으로 죽는 줄 알았다. 그렇게 모닝커피대신 죽염수와 CCA주스를 마시기 시작했고 싫어하는 운동을 하고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최대한 절제했다. 나의 최애 1순위 호주산 청청우로 만든 Angus beef steak는 보름에 한 번, 대신 대두단백질을 마시고 채과식을 지켰다. 나의 두 번째 최애 밀가루 면은 죄다 끊었고 유일한 타협은 한 달에 한 번 홈메이드 스파게티다. 물론 빵순이인 나의 최애 0순위 '빵'은 포기를 못하기에 통밀, 호밀, 발효빵으로 돌아가며 먹는다.
참고로 내가 마시고 있는 CCA주스 창시자 조승우 한약사님의 저서 [완전배출]을 읽고 무한 신봉자가 되었다. 체력 무능력자라면 꼭 읽어보시길 강추드린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21772149
그런데 이 모든 살기 위한 노력들이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 마흔이 된 지금 왜 병이 재발하는지 화가 났다. 열에 한 명 꼴도 안 되는 재발률… 하필이면 왜 나냐고! 왜! 우울했다. 척추 후관절 비대증(facet hypertrophy)으로 경추 6,7번 요추 4,5번이 나가고 방사통으로 지난 3년이 너무 힘들었는데 기쿠치병 재발이라니!!! 이미 목에는 12년 전 수술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휴… 게다가 아주 오래된 지병인 난소종양으로 호르몬치료 10년 차인 나에게 왜 또!!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통제하고 제한하는 이 비구니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마음이 아렸다. 내 몸 하나 데리고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자발적 삼포세대가 된 나에게 왜 자꾸 이런 재앙이 오는 건지… 지금도 바들바들 흔들리고 떨리는 정신줄을 잡느라 애쓰는 중이다.
요즘은 브런치 플랫폼이 고마울 뿐이다. 많은 위로의 글들을 발견하고 읽고, 공감하고, 이렇게 끄적여보고, 고맙다 브런치야!
사실 나는 태어난 지 보름 만에 이름 모를 발작을 일으켜 일주일간 40도의 고열에 시달렸다. 병명은 바이러스성 뇌수막염. 척수에서 물을 빼고 하루종일 링거에 알코올 목욕에 고용량 항생제와 해열제에 일주일 간 병원신세를 졌다. 당시 병원원장님은 부모님을 앉혀놓고 열이 내리더라도 눈이 멀거나 귀머거리가 되거나 벙어리가 될 소지가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8일째 아침, 생후 삼칠일차, 열이 서서히 내렸다. 엄마는 두 번의 자연유산 끝에 제왕절개로 얻은 딸이 헬렌켈러가 될 뻔했다며 지금도 그 고생담을 이야기하신다.
문제는 핏덩이 때 과다투여된 고용량 항바이러스제와 항생제 부작용으로 크면서 잔병치레가 잦았다. 식욕저하로 인한 작은 키와 몸무게, 홍역, 수두, 폐렴, 빈혈, 저혈압, 안면 신경마비 등 십 대가 찬란했다. 웬만한 위장염과 감기는 달고 살았고 덕분에 학교 체력장 급수 꼴등, 수준미달이었다. 그런데 아픈 몸은 나이가 들고 코로나 1차 감염과 4회 차 백신접종 이후 더 큰 병으로 나를 공격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더 열심히 운동하고 관리할 계획이다. 항암치료도 견디고 장애재활도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정신을 가다듬어 본다.
담당 주치의 선생님의 소견서로 방금 호주 혈액학 전문의 선생님(hematologist)과의 면담이 4주 후로 예약되었다. 휴… 또 불안하다. 그리고 다음 주 일주일간 발리로 떠난다. 오래전 서호주 난민촌에서 같이 일하던 선생님들과의 재회, 무사히 잘 다녀올 수 있겠지? 나 때문에 단체팀원들에게 폐를 끼치는 불상사는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다. 여행지에서 입을 옷을 챙기기 이전에 응급약 리스트를 먼저 챙기는 나, 에휴... 체력 무능력자가 맞네~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