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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어버드 Nov 23. 2022

헬조선이냐? 탈조선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정답은 '나'


나에게도 헬조선을 살던, 그야말로 지옥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때는 2002년, 바야흐로 월드컵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이던 해였다. 당시 제주도 촌년 고3이었던 나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을 외쳤고 수능을 포기하고 싶었다. 하루 반나절을 츄리닝에 삼선 슬리퍼를 신은 채 수학의 정석을 베개 삼아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미적분을 어거지로 구겨 넣던 시절이었다. ‘다음 중 맞는 것을 고르시오’가 진절머리 났고 ‘다음 중 아닌 것을 고르시오’가 지긋지긋했다. 오지선다 수능문제 중 셋은 분명 아닌데 정답이 둘 중 하나일 경우 항상 틀렸다. 확률이 반반인데 그 50프로의 정답도 못 찍는 수능바보가 바로 나였고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기적의 2002년 대한민국은 내게 수능지옥을 선사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정답이 있는 교육을 가르치고 요구하는 대한민국의 교육체계와 방식이 문제였는데 당시 나는 내가 바보천치라고 생각했다. 그저 열심히 공부를 안 해서 성적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런 나의 성적비관은 하나뿐인 내 자존감을 야금야금 갉아먹어 자살의 문턱까지 생각게 했다. 


그랬던 내가 십년이 훌쩍지나 호주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공부천재 대접을 받았다. 그때 알았다. 호주의 교육은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저 ‘너의 생각을 이야기 해봐’ 혹은 ‘써 봐’, ‘네가 말하고 쓴 그것이 정답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관련 레퍼런스(References:참조문헌)를 인용해서 너만의 논리(rationale)를 펼쳐.’를 가르쳤다. 나는 누구보다 다양하고 독특한 나만의 의견을 표출하는데 능했다. 그래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할 참고자료를 읽고 또 읽고 도서관에서 찾고 또 찾았다. 그 과정이 참 재밌었다. 덕분에 몇몇 교수님들에게서 ‘pleasure to read!’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에선 내가 찍은 정답이 맨날 틀려 잔소리에 매만 맞았는데 정답이 뭐다라고 가르치지 않는 호주에서는 뜬금없이 천재소리를 들었다. 그때 깨달았다. 정해진 정답을 외우고 정확히 그 답을 맞추면 우등생이고 명문대를 가는 대한민국의 교육과 평가가 잘못되었음을. 그렇게 나는 2002년 대한민국 수능바보천치에서 2012년 호주 공부천재가 되었다. 


그렇지만 지옥같던 2002년 당시 삶의 주도권이 없던 나는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요구로 재수를 했고 그다음 해에는 발목을 잡던 수리영역으로 삼수를 하게 되었다. 목표는 망할 명문대 진학. 또래 친구들은 소개팅에 미팅에 꽃다운 대학교 2학년 사회인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삼선슬리퍼와 츄리닝을 벗어나지 못한 수포자('수학 포기자') 삼수생이었다. 스무 살이 넘었지만 고딩만도 못한 반사회인 신분이었고 주변에선 부모님 돈 갉아먹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나는 오기로 불구덩이 입시지옥에서 정답만을 찾아 외우기로 마음을 먹었고 수리영역 모의고사집 한 권을 달달 외웠다. 장난 않고 틀린 문제를 100번씩 풀었다. 결국 수리영역 1등급을 받고 삼수를 마쳤다. 문제는 대학전형이었다. 돈이 많이 드는 수도권 대학과 전체 장학금을 받고 수석으로 합격한 지방대 사이에서 또 한 번 쭈구리가 되었다. 서울에서 방을 얻어 월세를 내고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대학을 다니는 게 비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서 자식 두 녀석 대학 보내다가 허리가 휠 지경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제주도라는 섬 지방 특유의 정서상 자식을 물 건너 육지대학에 보내놓고 매학기 수업료를 부친다는 게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힘든 고충이었다. 사실 대학교육까지 의무교육이 제공되는 복지 대한민국이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아픔과 힘듦이었다. 


결국 지방 사범대 영어교육학과를 공짜로 수석입학 및 졸업을 했고 또 한 번 바보천치가 되었다. 임용고시라 불리던 중등교사 임용시험 때문이었다. 노량진과 신림동 고시촌에서 늘어진 츄리닝과 삼선슬리퍼를 신고 삼수를 했고 지지리 궁상 끝에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었던 반지하 원룸을 얻었다. 그리고 사회초년생 교사라는 이름으로 서울살이를 했다. 불구덩이 입시지옥과 취업지옥을 벗어나자 이번엔 물구덩이 지하철지옥이 숨통을 조였다. 광진구 모 중학교 교사로 죽음의 2호선 출퇴근, 이어 서울시 교육청 초등 발령 이후 4대 보험 떼고 통장에 찍힌 월 189만 원 11호봉 교사월급, 이렇게 일하다간 10년을 모으고 모아도 1억 근처에도 못 갈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곧 서른이라는 압박감, 고질병에다 키도 작아 얼굴도 못생겨 나이까지 계란 한 판 꽉 차서 시집은 개뿔, 총체적 난국이었다.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했던지 당시 목에서 옆구리로 이어지는 임파선을 따라 작은 혹들이 줄줄이 생겨 서울보라매병원에서 수술을 했고 '기구치병'이라는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반지하 월세방에서 고열과 통증으로 시달렸고 자다가도 온몸이 덜덜덜 떨리면서 오한으로 잠이 깨길 반복했다. 회복이 쉽지않았고 목소리도 잘 안나오는데다 병가는 커녕 목에 붕대를 칭칭감은채 마약성 진통제와 항생제로 버티며 학교 출근을 했고 수업을 했다. 그렇지만 학교 교장쌤, 교감쌤, 교과부장쌤 그 누구도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으셨다. 되려 내가 병가를 내면 누가 어떻게 영어수업 일수를 채우고 진도를 빼냐며 왈가왈부하는 데에만 급급해 했을뿐이었다. 사람대접을 받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진심으로 자아실현을 하고 싶었지만 삶의 주도권이 없어 꾹 참고 부모님 뜻에 따라 교사가 된 나 자신이 불행하고 우울했던 지옥 같던 시절이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 학년 부장쌤이 애들이 영어실 수업만 갔다 오고 나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다면서 호되게 야단을 치시고, 학생 생활 관리를 너무 못한다고 교장실을 불려 가질 않나,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느니, 홍 선생 사회생활 그런 식으로 할 거면 때려치우라는 둥 오만가지 비난을 받았다. 그때 나는 절실히 느꼈다. 나의 내면 아이(inner child)인 자유로운 영혼이 사정없이 몰매 맞고 있었고, 이대로 가다간 내가 죽겠다는 생각. 그래서 탈조선의 꿈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학부 시절 6개월 간의 캐나다 연수 경험으로 유학원 없이 나 혼자 호주로의 이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국과 캐나다는 이미 늦었고, 영국은 너무 멀고, 썸머 타임 두 시간, 평상시 시차 한 시간 차이인 호주는 적당했다. 무엇보다 제주도 출신인 나에게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기온과 드넓은 푸른 바다는 동물적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는데 호주는 딱이었다. 


주변에서 가족들과 친구들이 좋은 직장 놔두고 무슨 짓이냐며 쓴소리를 해댔다. 몰매 맞던 내 영혼이 숨을 쉬어야 했기에, 내가 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의 이십 대 후반은 그렇게 탈조선의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고 있었다. 


서른의 마지막 지금의 내가 생각해 보면 헬(hell) 조선이냐, 탈(脫) 조선이냐의 문제는 결국 ‘나’라는 실존적 자아의 간절함에 달려있는 것 같다. 


나답게 살 때 인간은 성장을 하고 행복한 법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서 나는 나답게 살 수가 없었다. 선택의 자유라곤 희박한 사회에서 그나마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 취업, 직장에서 내 자유로운 영혼을 드러내는 순간 무참히 짓밟혔다. 동일성을 중시하는 획일화된 교육에 익숙한 우리 사회는 대다수와는 다른 행동과 발언을 하는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나답게 살기 위한 탈조선이 너무도 간절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묻기 이전에,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 사회의 미덕인 것처럼 교육을 받고, 대중의 시선을 벗어난 선택을 하면 질타를 받고, 가족과 사회, 나라를 위해 희생과 봉사를 해야지만 최선이라 인정해 주는 곳, 결국 그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정든 고향이자, 지금의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이었다. 무엇보다 내 정든 모국이 나에게 탈조선을 꿈꾸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다. 과거 우리의 부모세대처럼 운명이려니 팔자려니하고 순응하고 살기에는 내 자신이 허락되지 않았다. 인생 한 번뿐인데 이대로 살고 싶지 않았다. 뜨겁지만 아픈 마음으로 내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야 했다. 그게 내 운명이었다.  




굿바이 코리아, 헬로우 오스트레일리아 


학부 시절 영문학 수업을 누구보다 좋아했던 나, 당시 영국태생 호주 출신 원어민 교수님께 도움을 청했다. 추천서를 받고, 아카데믹 모듈 아이엘츠 성적표 당시 7.5인가를 제출하고, 재직증명서 2년 경력 요구해서 보내고, 근무지였던 담당 학교장 및 동료 교사 추천서 두 장인가를 또 보내고, 두근두근 결과를 기다렸다. 호주명문대학인 시드니대학 교육대학원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사실 통대대학원이었더라면 더 좋으련만, 학부 전공이 교육학 학사여서 그 당시 교육대학원으로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번 내가 원치 않았던 사범대학을 보낼 수 밖에 없던 부모님과 내 나라 대학민국이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이 대학 교육까지 무상교육을 제공하는 복지국가였다면 당시 부모님을 원망하고 돈 때문에 내 꿈을 하향 지원해야 하는 일은 없었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대학 학비 때문에 꿈을 하향지원케 만든 내 나라 복지정책이 한참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 됐든 합격통지서를 받자마자 호기롭게 학교 선생 일을 그만두었다. 부모님께선 기절초풍! 내 안의 내면 아이는 야호! 

정확히 2012년 7월 2일,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다. 당시 내 신한은행 직장인 통장 잔액 800만 원과 노트북 하나... 그리고 다행히 재테크 성공하신 부모님께서 대학등록금 못 대줘서 미안하셨다며 주신 대학원비 34000불과 학생비자… 마지막으로 뜨겁고 아픈 내 가슴을 식혀주는 싸늘한 호주의 겨울 공기… 그게 '나'의 탈조선, 호주살이 서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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