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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어버드 Mar 03. 2023

나도 탈조선 러쉬? 왜?

프롤로그 

'탈조선을 꿈꾼다면' 

-프롤로그 편 


코로나가 터지기 몇 해 전 대한민국의 청년실업률이 가히 12%가 넘는 최고치를 기록했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는 탈(脫)조선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 연이어 헬(hell)조선의 논제가 끊임없이 회자되었다. 그리고 2019년 말, 코로나가 터지고 직장을 잃고 경기가 침체되었다. 하늘길이 막히고 국경이 봉쇄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버텼고 시간은 흘러 2024년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의 정상적 사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새로운 정상화가 시작된 New normal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다. 


안타깝게도 New normal세상은 인플레이션, 저성장, 노령화, 오르는 이자와 물가로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고 어둠 속 터널을 걷는 기분이다. 서구사회에서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를 들먹이며 지구종말론을 운운한다. 그 덕에 넷플릭스에서는 좀비 아포칼립스, 에일리언 아포칼립스, 바이러스 아포칼립스, 뉴클리어 아포칼립스, 심지어 에코 아포칼립스 등의 좀비, 외계인, 전염병, 핵전쟁, 기후위기로 인한 세계멸망을 다루는 시리즈물 혹은 영화가 판을 친다. 


그래서일까… 영화가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사회 곳곳에 퍼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코로나가 정상화되면 탈조선 러쉬(rush)가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퍼졌다.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우리 집 제주도 아방 어멍은 “요새것덜 배덜 쳐 불렁 겅햄쪄! (요즘 것들 배가 너무 불러서 그런 거지!)”라고 답한다. 

그렇게 따지면 배가 쳐 부르다가 지나쳐 비만인 호주 사회의 요즘 것들은 왜 탈호주를 꿈꾸지 않는 걸까? 

그리고 십여 년 전 나는 왜 탈조선을 감행한 걸까?

아니, 내 모국이 왜 그토록 나에게 탈조선을 꿈꾸게 만든 것일까? 


수많은 현실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대학입시, 취업난, 상명하복, 야근과 회식, 꼰대문화, 힘든 출산과 육아환경, 수도권 중심 현상, 지역편차, 전무한 1인 가구 지원, 어려운 내 집 마련, 집단주의적, 주류적, 엘리트 중심적 사고방식 등등 나열하라고 하면 끝도 없다. 개인적으로 그놈의 K-유교 ‘여자가…’ 소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유교보이 우리 아버지는 여지껏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얘기하신다.     


숨이 막혔다. 그리고 사표를 내던졌다. 


정확히 12년 전.

당시 주변 사람 모두가 나에게 미쳤다고 했다. 

80년대 육아끝판왕 ‘모유 끊고 생우유 먹였다’는 치맛바람 최강자 유교걸 울 엄마의 꿈은 딸내미를 학교선생 만들어 의사사위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사표로 그런 엄마의 계획이 틀어졌고 미친 딸내미는 이역만리 호주땅엘 갔다. 게다가 호주 아웃백인지 뭔백인지 인터넷도 잘 안 터지는 사막 한가운데에 간 딸년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목소리 한 번 듣기 힘들고 애간장을 태웠다. 엄마의 분노 아드레날린과 나의 야망 아드레날린이 치열하게 대립했다. 사실 탈조선 내내 울고불고 삼세판 갈라지고 엎어치기 끝에 지금의 울 엄마와 나의 관계가 만들어졌다.  


생각해 보면 대한민국의 구조적 사회 모순이 탈조선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씨름판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우리 집 제주도 어멍아방을 포함한 전후세대인 베이비부머 부모들은 대개 오 남매, 칠 남매가 가족구성의 전형이다. (참고로 우리 집 외가는 외할머니께서 10명을 낳았고, 친가는 친할머니께서 아들만 5명을 낳았다.) 그리고 새마을 운동과 함께 산업화를 거치며 해마다 10%씩 고도로 경제 성장을 하는 불같은 시절을 살아오셨다. 그래서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기업에 취직이 돼서 좋은 월급을 받고 좋은 집안에 시집, 장가를 가서 큰집 쓰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신다. 일종의 그 시절 그들만의 성공방정식인 셈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베이비부머 세대가 낳은 MZ세대는 외동 아니면 둘, 많아야 삼 남매가 가족구성의 전형이다. 그리고 이미 산업화된 사회에 인공지능 기술과 데이터가 자리 잡은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으며 해마다 2%, 1%, 0% 느릿느릿 기어가는 경제 성장에 사실상 돌처럼 굳어가고 있다. 그래서 좋은 대학을 나와도 좋은 기업 입사가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듯 어렵고 좋은 기업에 취직이 돼도 만년 과장에 사오정이 코앞이며 좋은 집안에 시집, 장가라도 가면 둘이 하나꼴로 이혼을 하고 큰집은커녕 내 집마련 자체가 힘들다. 부모세대의 성공방정식이 단 하나도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이비부머 부모세대는 자신들이 겪은 성공방정식을 MZ세대인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대입시키고 ‘명문대를 가야 대기업을 들어가지’를 노래 부르며 재수 삼수를 시키고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외치며 성공을 위한 숨통을 조인다. 시대가 바뀌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식만큼은 화이트칼라를 만들겠노라며 과외비며 학원비며 부모들은 열심히 돈 벌어 엄한 데 갔다 바친다. 나와 우리 부모님도 그랬다.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 채 사회 구조적 모순에 그대로 놀아난 케이스다. 


사실 나의 십 대 이십 대를 되돌아보면 죽고 싶었던 순간이 너무 많았다. 세 차례의 수능시험과 원치 않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또 세 차례의 임용고시. 노량진과 신림동에서의 연이은 고시원생활은 나에게 폐쇄공포증을 가져다주었으며 어느 순간 자살의 문턱을 생각게 했다. 부모님을 원망하고 조상 탓을 하다가 국회의원, 대통령 욕까지 하며 대한민국의 피폐한 현실을 탓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내 나라를 벗어나야지 숨을 쉬고 살 수 있겠다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생각의 고리가 순환적으로 일어났다. 이미 학교에 발령이 나서 11호봉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숨이 막혔다. 도저히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으니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썩어빠진 대한민국 떠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우울했다.    


게다가 당시 처음으로 주 5일제가 시행되면서 격주로 토요일을 근무했었는데 놀토가 되면 교감쌤의 취미인 등산을 단체로 해야 했고 하산과 동시에 대낮부터 회식 아닌 회식으로 근무의 연장이었다. 어지간한 잡일은 말단호봉 신규쌤들의 몫이었고 생리통으로 여교사 휴게실을 다녀오면 눈치를 주었으며 생리휴가를 쓰려면 암묵적 압박을 했다. 결국 진통제로 버티며 수업일수를 채웠다. 동료 여교사의 산후휴가로 산가대체강사를 구하는 일도 얼마나 말이 많던지 꼴불견이었다. 다른 것보다 그렇게 참고 킹받으며 일을 했는데 쥐꼬리만한 11호봉 교사월급에 어깨가 추욱 처졌다. 숨통이 막혔다.  


결국 숨 쉬고 살아야겠다는 본능 때문에 두려움을 무릅쓰고 탈조선을 감행했다. 내 고향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그 따뜻함을 닮은 곳을 향해.  


지금에서야 돌아보면 내 고향이 나에게 탈조선을 꿈꾸게 만든 건 ‘저출산 노령화’라는 우리나라의 인구사회 구조적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 남매 칠 남매 출신 산업인력들의 노령화에 대항하려면 그 다음세대인 우리 MZ들도 오 남매 칠 남매여야 할 텐데 정부의 산아제한 정책으로 둘 아니면 외동이고 많아야 삼 남매가 고작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MZ들은 연애, 결혼, 출산, 집, 경력 등을 포기한 N포세대로 아이 하나를 겨우 낳을까 말까다. 그 말인즉슨 우리 다음세대는 노년부양비가 더없이 늘어날 것이고 연금고갈은 물론 인구지진이 일어나 구조적으로 대항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때쯤 정부는 줄어드는 납세인구를 상쇄하기 위해 정년을 연장할 것이다. 근본적인 인구구조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반면 내가 사는 호주는 ‘저출산 노령화’라는 구조적 모순이 없어서인지 탈호주를 꿈꾸는 호주청년들이 거의 없다. 대부분 대학진학이 아니라 고졸직후 직업훈련을 받고 사회에서 일을 하며 건실하게 가정을 꾸리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여유를 즐기며 살아간다. 한국인의 눈에는 게을러 보이는 호주인, 호주인의 눈에는 일중독자 한국인, 그 사이를 오가며 샌드위치가 된 나는 어느 순간 우리 사회의 심각한 탈조선 논제를 본질적으로 탐구하고 그 생각의 끝을 적어보고 싶었다. 


행여 한국이 싫어서 떠난 주제에 비겁한 변명이나 늘어놓으려고 이런 글을 쓴다고 꼰대같은 소리를 한다면 진심으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었으면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에게는 국가를 좋아하고 싫어할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랐다고 해서 그 나라가 마냥 좋을 수는 없다. '여러분은 대한민국이 마음에 드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혹은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정답이 YES라면 이 글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나는 대한민국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12년전 호주로 자발적 이민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의 안락하고 편리한 삶을 잊을만큼, 호주에서의 불편하고 외로운 삶을 즐길만큼, 나 다운 삶을 살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하다. 

무엇보다 싫어서 떠난 한국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사는 곳이기에 다양한 삶의 선택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너무도 다채로운 선택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점점 많아지고 있다. 그래서 바람을 거슬러 날기 위한 새의 노력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썼다. 나로 살기 위한 용감한 개인주의적 몸부림이 누군가에게 정답은 될 수 없지만 가이드 라인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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