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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 Dec 12. 2023

별이나 우리나 거기서 거기지

이제 우린 서로의 별이 아니지만

https://www.youtube.com/watch?v=xWhBk6gYL3w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오랫동안 집 밖을 모험하기엔 나는 그리 건강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한계를 느낀 나는 잠시 집에 돌아와 쉬고 다시 나가기로 결심했다. 인천공항 입국장은 얼마 만에 밟아보는가. 3년 동안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무려 16,000원으로 요금이 올랐다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여행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길 창밖의 풍경, 버스에서 내려 바라보는 우리 동네의 모습. 상가에 새로 들어온 가게도 없고 사라진 것도 없구나. 밥을 하기 귀찮을 때마다 가던 단골 식당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랜 여행 후 집에 돌아오면 집 문을 여는 과정도 낯설게 느껴질 줄 알았는데, 나는 막 퇴근하고 돌아온 것처럼 평소랑 다름없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신발을 벗고 침대에 가방을 툭 던져놓았다. 변한 건 없었다.

 


   여행하기 딱 좋은 계절에 여행을 멈추고 돌아온 나는 창문을 전부 열고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잠들었다. 정말 오랜만에 누리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나만의 공간. 내 침대의 푹신푹신하고 포근한 감촉이 그리웠다. 그렇지만 어색하거나 낯선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치 어젯밤도 여기서 잤던 것처럼 익숙했다. 저녁을 훌쩍 넘겨 일어나 라면을 끓이러 어슬렁어슬렁 움직이는 발소리도 특별하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일상에 잘 착륙하는 게 여행의 실력’이라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여행의 실력이 뛰어난 걸까. 아니면 어차피 금방 다시 떠날 거니 돌아가야 하는 삶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걸까. 다시 떠날 출국 티켓을 만지작거린다.     



   9월 말의 서울은 언제 자기가 그렇게 뜨거웠냐는 듯 시원한 바람을 훅 분다. 지난여름의 더위에 지친 우리를 어디론가 보내려는 것처럼. 나의 지난여름은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타지의 여름을 서울의 바람에 한 방울 타보기로 했다. 살갗을 까맣게 태웠던 멕시코의 여름, 다시 이곳에 올 수나 있을까 생각하며 찬 바다에 무작정 뛰어들었던 갈라파고스의 여름, 모든 돈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젊음이 있던 아마존의 여름,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다시 돌아온 여행의 기쁨으로 더위를 이겨냈던 유럽의 여름, 활기찬 웃음으로 나를 울렸던 아르메니아의 여름… 내가 평생을 견뎌온 서울의 여름에 비하면 너무 옅은 기억이지만 이 바람에 녹아들기엔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갑게 얼어붙을 바람이기에 나는 짧은 이 시간을 놓지 않기로 했다.     



   정말 유용하게 입었던 밝은 회색 가디건을 널면서 문득 빈 생각이 났다. 생각해보니 이 옷에도 그 애의 촉감이 남아있겠구나. 맞아, 그때도 지금과 같은 계절이었지. 빈은 갑자기 추워진 밤에 쉽게 떨었고 나는 옷을 살포시 덮어줬다. 사실 두께로 보면 그다지 실용적이진 않은 옷이었지만 나는 이 옷과 내 여행에 함께 하기로 했다. 어느덧 나는 나를 오랫동안 가둬놓은 빈이라는 이름의 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샌가 SNS로 자연스럽게 빈의 이름을 찾아보았고, 그 애의 블로그를 들어가 그 애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더는 가슴이 미어지지도 슬퍼하지도 울지도 않았다. 참 오래도 걸렸다.     



   어느 날 가을바람과 함께 책을 읽다가 빈의 글을 읽고 싶어졌다. 그 애의 글씨체가 보고 싶어졌다. 그 애가 내게 남긴 무언가가 아직 내게 남아있나? 그날 이후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해 빈의 흔적을 다 지웠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서 내 물건이 어떤 서랍에 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애의 편지 같은 게 어디 있을지 생각날 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서랍을 하나씩 다 뒤져가며 혹시 남아있는 기록 같은 게 남아있나 찾아봤다. 없네. 네가 내게 하려던 말을 다시 읽고 싶었는데. 나는 어둠 속에 있던 시간 동안 너에게 쓰지만 보내지는 않을 편지를 차곡차곡 모아왔는데. 정작 네가 나에게 보낸 편지는 이제 남아있지 않구나. 그 당시의 내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구나. 앞으로 내가 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부 쏟아부으면서 사랑하게 될 땐 내게 남을 기록들을 허투루 다루지 않으리. 빈 덕분에 결심한다.    

 


   나의 시선은 여행지의 사진이 담긴 엽서로 이동한다. 엽서들은 딱히 빈과 관련이 있진 않다. 그냥 오랜만에 제주의 풍경을 바라본다. 그러다 엽서들 사이에 그 애가 선물한 조그만 수첩이 두 개 만져졌다. 하나는 알겠는데 나머지 하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난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하나를 먼저 열어본다. 첫 장에는 그 애의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있다.     



“어디서든 노트와 펜을 들고 다녀라. 
언제든지 그것들을 꺼내어 당신이 생각한 것과 본 것들을 적는 습관을 들여라. 
책에서 본 좋은 글귀를 옮겨 적어보고, 귓가에 들려오는 대화들을 기록해라. 
전화통화를 할 때조차도 끼적여라.”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멋진 작가가 되어주세요. 빈.     


   차마 이것만큼은 버릴 수 없었던 그 애의 메시지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수첩을 열어봤다. 아이디어 회의를 할 때 끄적일 법한 내용들이 앞면을 채웠다. 이건 내가 독립출판물을 기획할 당시 책 제목에 대해 그 애와 이야기하는 동안 이것저것 끄적인 거구나. 이제야 생각났다. 이렇게 버려졌던 기억 하나가 다시 살아났고 이제는 내 마음에 가볍게 안착할 수 있었다. 제목을 떠올리는 동안 우리는 ‘별’이라는 단어를 많이 이야기했나보다. 그 당시 우리는 제주 밤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며 사랑을 키워왔으니까.     


우리는 별
우리라는 별
별 하나     
별이나
우리나
너나
거기서
거기지     
내가 별이 되어줄게요
나의 별이 되어줄래요
우리의 별을 찾아봐요     


   수첩을 덮고 쓰던 글을 임시저장한 후 별을 보러 밖에 나갔다. 단 하나만 외롭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서울이라는 곳은 어쩔 수 없다. 지금 너는 어디서 별을 보고 있을까? 서울에서, 인천에서, 혹은 우리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제주에서?

 


   가장 최근에 무수히 쏟아지는 별을 봤던 조지아 메스티아를 떠올리다 기억을 접고 더 흐릿해진 제주의 기억을 다시 펼쳤다. 이제 빈은 나의 별이 아니고 나도 빈의 별이 아니지만 한때 서로의 별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버리지 않고 가져가고 싶다. 창문으로 훅 불어오는 시원한 9월의 바람은 우리가 제주의 별을 바라보던 그 계절과 같다. 시간이 흘러 이제 서로 다른 별을 찾을 우리의 모습을 그리다 너는 점점 희미해진다. 몇 시간 후 해가 뜨고 별이 보이지 않게 되면 다시 그 애를 떠올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이제는 아무리 펼쳐도 슬프거나 괴롭지 않은 나는 기억을 덮고 다시 책장에 꽂아둔다. 출국 티켓을 다시 만지작거리며 나는 빈에게 들리지 않을 속삭임을 끄적인다. 어디서든지 서로의 별을 밝게 빛내며 키우자. 이제 안녕. 나는 이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신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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