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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수 Jan 25. 2021

시속 3km로 제주를 걷다

속도를 늦추면 보이는 것들   


나에게 걷기는 운동 이상의 의미일 때가 더 많다. 음악을 듣는 시간, 복잡한 생각을 지워버리는 시간, 하루 중 가족과 잠시 떨어질 수 있는 시간, 내 안의 화나 분노를 멈추는 시간, 하루를 시작하거나 마감하는 시간이 바로 ‘걷기’다. 몸이 찌뿌둥하거나 생각이 많아질 때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일단 걷는다. 시속 3km의 걷기 또는 산책은 일상 속에서의 짧은 단절, 내 삶의 완충지대이기도 하다.    


스무 살 무렵에는 ‘걷기’로 내 자신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8월의 땡볕 아래에서 배낭을 메고 경상북도 상주초등학교에서 시작해 경기도 이천 유네스코회관까지 13~14일 정도를 걸었다.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만 보고 무턱대고 걷기에 지원했다. 어영부영 한 학기를 보내고 맞은 여름방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뭔가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마음의 다짐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행동으로 증명할 그 무엇이 필요했고 그것이 ‘걷기’가 되었다.  


그 시절 걷기는 나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집이라는 울타리와 열흘 이상 집 밖을 떠난 적이 없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 내 자신을 밀어 넣고 싶었던 것이 솔직한 마음이었다. 아는 친구 한 명도 없이 지원한 걷기에서 내가 속한 조는 모두 5명, 학교도 달랐고, 성격, 성별도 달랐지만 같이 밥을 먹고 함께 걸어야 했다. 뜨거운 8월의 태양은 우리를 지치게 했다. 발에는 물집이 잡혔고, 다리와 어깨는 아팠지만 누구도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때 걸었던 길들이 모두 생각나지는 않지만 문경새재와 속리산 문장대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걷기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온 나는 좀 더 성숙해졌던 것 같다. 


그 이후 걷기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매일 집 주변을 걷는 것을 시작으로 가까운 거리는 걷는 것을 즐긴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도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걷는다. 시속 60km에서 시속 3km로 속도는 뚝 떨어지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더 많아진다. 도시의 모습은 스쳐 지나가지 않고, 사람 사는 모습이 더 잘 들어옴은 물론 원할 때는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물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U턴 대신 그냥 뒤돌아서면 되니 손쉽다. 


걷기와 산책을 즐기지만 오랜 시간 걷기를 다시 해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짧은 여행을 가서 주변을 걷거나 하루 정도의 산행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며칠 동안 시간을 내서 걷는 여행은 일단 마음의 여유가 필요했다. 휴가나 연휴 동안 떠났던 여행은 봐야 할 곳도 많았고, 해야 할 것도 많았다. 또 하나는 같이 가는 친구 또는 가족과의 여행 스타일도 고려해야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걷기에만 집중하는 여행은 마음뿐이지, 쉽지 않았다.   






며칠 전 5일 동안 제주를 걷고 돌아왔다. 예전부터 제주 올레길을 걷고 싶었지만 뒤로만 미뤄왔다. 제주도에 갈 때는 늘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렸지만 이번은 달랐다. 공항버스를 타고 서귀포로 이동했다. 다행히 며칠 동안 좋지 않았던 날씨가 우리가 제주에 도착한 날부터 풀렸고, 바람도 많지 않았다. 7코스 서귀포에서 시작해 11코스 무릉 올레까지 다섯 코스를 하루에 한 코스씩 걸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제주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제주에 사는 사람들과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었다.  


갑갑한 차 안에 벗어나 있는 그대로 제주의 바람을 맞았고 파도 소리를 들었다. 바다를 따라 걷다가 바위길, 흙길도 만났고, 오름도 오르고 숲도 만났다. 걷다가 보면 차가 오갈 수 있는 길이 더 이상 없다는 '도로끝'이라는 표지를 만나기도 했고, 그 표지판 아래로 오롯이 걸을 수만 있는 길을 따라 걷기도 했다. 숙소는 코스의 종점에서, 먹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즐겨 가는 식당으로 정했다. 하루 종일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 때도 내일은 어디를 가야 하는지,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를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편했다. 바쁘게 여행 코스를 짜지 않아도 충분했고, 아침이 오면 걷고, 오후가 되어 목적지에 도착하면 걸음을 멈췄다. 


일주일 동안의 제주 걷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제주로 떠나기 전에는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일상이 제대로 자리잡지도 않은 이런 시기에 여행을 떠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고, 집 안에만 갇혀 있던 몸은 몸대로 무거웠다. 걷기를 끝내고 돌아오니 몸은 몸대로, 마음은 마음대로 가벼워졌고, 정신을 맑아졌고, 육체는 깨어났다. 


이제 스무 살의 패기는 사라지고, 사람은 변했지만 시속 3km는 변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속 3km는 내게 많은 것을 일러준다. 자연 속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게 하고, 손 끝과 코 끝으로 생생히 느끼며,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큰 바람은 내 몸을 흔든다. 차 안에 앉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면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내게로 다가왔다. 앞으로 시속 3km에 몸을 맡기고 걷기에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제주 걷기를 시작으로 서울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 다양한 길들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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