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어떻게든 완성된다.
지난달 여름, 초복을 맞이해 남편과 외할머니를 찾았다.
내 할머니는 '옛날 분'의 의미지와 다르게 다이어트한다고 적게 먹기도 하셨고, 서른이 넘는 나를 만날 때 종종 용돈을 지워주시곤 했다. 그날도 한사코 대접해드리고 싶다는 우리의 손을 마다하시고 본인이 식사 값을 다 내시 고도 용돈 봉투를 건네주셨다. 봉투에는 하도 만져서 부드러워 보이는 만원 지폐 20장이 들어 있었다.
"할머니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용돈 받아요"
"내가 돈이 많지 않아서 이거밖에 못 주는 거야. 받아"
또 호두과자를 사 온 우리에게 "이제 앞으로 올 때는 이런 거 사 오지 말아" 그러셨다. "어떻게 그래요, 우리 마음이 안 그래요"라고 한 나에게 할머니는 "나한테 올 때는 그냥 와도 돼. 빈손으로 와도 되는 거야. 너희는 이제 돈을 모아야 할 때잖아"라고 하셔서 날 또 울렸다.
그리고 내가 손녀로서 할머니 밑에 있을 때는 듣지 못했던 할머니의 오랜 이야기를 들었다. 서울대 나온 할아버지가 군인이 된 이야기부터 만나서 결혼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엄마를 비롯한 세 자매를 은행 직원으로 보낸 이야기, 막내 삼촌을 낳기 전 꿨던 꿈 이야기까지...
엄마는 자꾸 옛날이야기를 하는 할머니가 치매와 같은 증상이 오는 건 아닌가 불안해하셨다. 나 역시도 그랬지만, 한참 동안이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듣는 건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마냥 감명 깊었다. 할머니는 아껴 쓰기보다는 쓸 때는 써야 한다고 늘 얘기하셨고, 본인도 그렇게 사셨다. 결혼 전에는 좋은 다리미를 사라며 꼬깃한 봉투를 건네주기도 하셨다.
지난날 할머니를 그렇게 뵙고 한바탕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꼭 글로 남기고 싶었다. 할머니가 회상하는 삶 속에서의 30대 그녀는 적어도 지금의 나처럼 살아가는 삶에 매어있지 않았다. 남북 분단에 가족과 이별을 했고, 친구들을 잃었고, 3 자매를 낳은 후에야 아들을 가졌던 현실에 비해 그녀는 당찼다. 그렇게 살아온 삶을 회상하는 그녀가 왜 그렇게 멋져 보이 던 지.
난 그동안 살아가는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내가 살아갈 미래, 2세 계획, 취업, 진로...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염려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었던가. 할머니의 '살아온 삶'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살아가는 삶'보다 '살아온 삶'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할머니의 '살아온 삶'에서 나는 왜 위로를 받고 안정을 느꼈다. 그건 아마도 할머니에게서 "그렇게 삶이란 영역은 완성되고, 소화되며, 살아가는구나"라는 안심일 때문일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려 노력했다. 그것은 너무 고군분투하여 다시 돌아보기도 힘든 사연도 아니었고, 너무 노력이 없어 아쉽고 후회가 많이 남은 사연도 아니었다. 단지 할머니의 위치에서 발휘할 지혜와 노력으로 해봄직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렇게 살아온 삶의 지혜와 경험은 그녀가 살아가는 삶에 여유가 느껴지는 토대가 되었다.
난 아직도 왜 어제 그녀가 이제껏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이야기 해준지 모른다. 그렇게 살아온 삶의 증인으로써 내 곁에 있는 그녀가 여전히 사랑스럽고, 눈물 나게 아름답다 울 뿐이다. 자신감 있고, 따뜻한 그녀가 살아온 삶을 닮고 싶다.
할머니의 영향일까. 최근 나의 인생 드라마인 '디어 마이 프렌즈'를 넷플릭스로 다시 보았다. 노희경 작가가 쓴 이 드라마의 주연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60-70대 친구들이다. 한 인터뷰에서 노희경 작가는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노땅들의 이야기는 정말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나?"라는 질문에서 이 드라마가 시작됐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시작된 드라마는 종영이 된 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인생 드라마가 되었다. 곧 우리의 엄마이고 아빠이며, 우리의 삶인 그들의 이야기가 노땅이라 불리던 겉과 다르게 저마다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으며, 저마다의 아픔이 있었다. 그렇기에 나 또한 엄마를 떠올리며, 그리고 그런 엄마도 어렸음을 떠올리며 가슴 아리게 울고, 그리워했다.
극 중 장난의(고두심 역)의 딸 완이(고현정 역)는 이 노땅들의 이야기를 지루해하다가도, 호기심이 생겨 글을 쓰고 책을 내며 관찰자의 역할도 톡톡히 하였는데, 엔딩 장면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왜 나는 지금껏 그들이 끝없이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지난날 자신들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어차피 처음에 왔던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면 그 길도 초라하지 않게 가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너무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마음이 두더지 게임처럼 올라오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게임과 같다면, 그리고 30대에는 어떤 감정이 많이 올라왔냐고 누가 묻는 다면, 나는 불안감이라 대답할 것이다. 상담심리사로써의 월급은 다른 직장인에 비해 턱 없이 작고, 나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 진로로 변경했다. 그 와중에 결혼을 했고, 임신을 계획하고 있으며, 우리가 살 수 있는 전셋집을 알아보기 바빴다. 모든 것이 쉽지 않았고, 순간순간마다 나의 불안은 내가 다스리기엔 버거울 정도로 커진 적이 많았다. 한번 불안감이 소용돌이 몰아치듯 떠오르면, 잘 다져왔다고 생각했던 길에 금이 난 것처럼 내 마음이 쩍쩍 갈라지곤 했다. 그리고 24시간 중 오후 3시처럼 나는 내 나이가 애매하다고 생각했다. 20대에는 '그냥 하는 거지, 뭐 어때' 싶고, 40-50대에는 살아온 연륜과 경험이 어디로든 날 이끌어줄 것만 같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나는 어렸을 적 잠자리에 누워 하루가 4에 뭘 하고, 6시에 뭘 했고를 세지 않았다. 그냥 하루가 너무 즐거웠고, 속상했고, 지금 내 발 끝자락에 느껴지는 포근한 이불의 사그락 거림이 좋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잠자리에 누워 생각이 많아진 것이. 멋모르던 때를 지나서 자연히 따라오는 삶의 무게들은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람을 물 먹은 솜처럼 눌렀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하루가 완성된다라는 걸 잊고 사는 걸까. 4시에 무얼 했든, 6시에 무얼 했든 하루가 완성되는 것처럼 40대에 어떤 삶을 살았든, 60대에 어떻게 살든 간에 내 인생이 완성되어 간다. 다만 완이의 대사처럼 그 길 초라하지 않게 가기 위해 너무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이것저것 하는 것일 뿐. 그것이 '무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상관없이 지금도 완성되어가는 것일 뿐이다.
이 오후 3시 일기를 마칠 때 사실 '내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놀라운 기승전결의 드라마'를 바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포장하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안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고(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심리상담사 프리랜서의 월급은 상당히 적으며, 이 세상 집은 많으나 우리 집은 없고, 나이는 자꾸 먹기에 아이를 계획해야 한다. 이 현실은 석사 때 공부했던 심리학에 나를 도입해가며 '나'를 이해하려 애쓰고, 불안함을 풀어내기 위해 글을 쓰는 것으로 그다지 나아지진 않는다. 하지만 지난날의 일기를 읽어보고 있노라면 마치 살아온 삶을 회상하는 우리 할머니가 된 것 같다. 살아온 삶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안심시켜주는 톡톡한 효자 역할을 하는 건 사실이었다. 할머니를 만나고 난 후 나는 내가 살아가는 삶에만 관심 가졌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며 어떻게든 인생은 완성되어간다라는 걸 느꼈다.
살아갈 삶에 매여 보지 못한 '지금-여기의 것'에 충실하고
나를 이해하며 잘 다뤄주면서 살아가다 보면 하루의 완성처럼 어쨌든 이 인생을 완성되겠지.
이제는 조금의 여유를 가져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