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 그때 내가 말한 서동빈이라는 학생 말이에요? ”
“ 누구지? 서동빈이? ”
“ 경주에 사는 남학생 말이에요, 공부를 아주 잘한다는
우리 재단에서 후원해주고 있는 장학생이요. 기억하세요? “
“ 기억하지.
그 학생 동생이 잡지에 사연을 올려서 네가 도와주자고 했잖아? “
“ 네, 아빠
그 학생 이번 전국 수학경시대회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하던데
서동빈이라는 학생 서울로 유학을 오게 하는 건 어때요? “
“ 서울로? 갑자기 왜? ”
“ 아무래도 서울로 와서 공부를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지방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 정도라면,
서울에 오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서요.
대학 진학에도 유리하고, 나중에 유학을 보낼 수 있을 거고.
우리 회사에서 채용할 명분도 있고요.
미리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놔요. 분명 서로들 데리고 가려할 거예요. “
“ 그래,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 연우가 앞도 내다볼 줄 아는구나.
좋은 인재를 가지는 건 회사의 경쟁력이지.
내가 정 비서한테 말해 놓으마. “
“ 아니, 아빠
저 이번 주말에 엄마랑 저랑 경주에 내려갔다 올게요.
날이 따듯해져서 지금 여행 가기도 좋으니까 바람도 셀 겸 엄마랑 다녀올게요.
그 학생 서울로 오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엄마랑 여동생을 남겨두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만나서 설득을 해야 할 거예요.
엄마 같이 다녀오자. “
“ 그래, 오랜만에 경주여행이라 마음이 설레네.
여보 우리 다녀올게요.
가서 우리 연우가 그렇게 말하는 동빈이란 학생도 한번 보고, 여동생도 보고 싶네요. “
“ 그래요. 가서 푹 쉬고 와요.
겨울 동안 답답했을 텐데 "
연우와 엄마 윤희는 정 비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주로 내려갔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연우는 대학시절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동빈을 생각했다.
자신이 친구 강우의 약혼녀라는 걸 알면서도 동빈은 연우를 사랑했다.
과거 동빈을 알아보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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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우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강우가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어.
결혼을 한다고 해도 행복하지 않을 거야.
연우야, 나랑 같이 우리 고향에 한 번 다녀오자.
가서 차분히 생각해봐.
이렇게 억지로 서둘러서 하는 결혼은 하는 게 아니야.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괜찮아.
다시 한번만, 제발 한 번만 생각해봐.
너를 위해서
나는 네가 불행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
너를 정말 사랑하고, 네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해야 하는 거야.
결혼이라는 건 “
경주는
동빈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나중에 결혼을 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와
살고 싶다고 말하던 고향이었다.
어린 동빈이 커다란 능을 미끄럼틀 삼아 내려오고,
친구들과 왕릉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던 곳
첨성대에서 별을 지켜보던 신라인들처럼
동빈 자신도 밤에 첨성대에 자주 가 별을 바라봤다고
연우의 결혼식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함께 가보자고 애원했던 곳이다.
연우는 강우와 살면서 가끔 동빈이 생각났다.
강우가 자신에게 무심히 대할수록
냉랭하고 차갑게.
자신을 여자가 아닌 두 아이의 엄마로만 바라볼 때
그녀를 항상 따듯하고 다정하게 바라보던 동빈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놀 때
동빈과 얼핏 닮은 남자를 바라볼 때 가슴이 철렁해졌다.
‘ 내가 만약 동빈이 말한 데로
결혼 전 경주에 그와 함께 내려갔다면
강우에게 억지로 매달려 한 결혼이 아니었다면
나를 좋아했던 동빈과 결혼했다면 행복할 수 있었을까? ‘
동빈은
강우와 같은 대학 건축학과 동기로
연우가 강우를 찾으러 강우의 대학으로 갔을 때
우연히 만난 남자
대학교를 입학하자 연우는 수업을 빠져가며 강우의 대학교로 강우를 찾으러 자주 갔었고
강우는 화란과의 연애로 수업이 끝나면 화란을 찾아갔다.
그날도 연우는 건축학 원론 수업이 있는 강의실로 강우를 찾아갔었지만
강의실에는 남학생 한 명만 남아있었다.
“ 여기 최강우 학생 없어요? ”
“ 강우? 수업 다 듣고 다른 수업 들으러 갔을 텐데요. 누구세요?
강우 동생인가요? “
“ 아, 네. ”
“ 강우 동생이구나. 나는 과 친구 동빈이라고 해요. 서동빈
아마 강우 서양건축사 들으러 갔을 텐데.
내가 강의실로 데려다 줄게요. “
“ 네, 감사합니다. ”
마침 서양 건축사 수업은 휴강이어서
강우는 학교에 없을게 분명했다.
연우와 동빈은 분수대를 지나 정문으로 향했다.
“ 강우 동생인데 강우랑 닮지 않았네요. ”
“ 아, 사실은 친동생은 아니고 어릴 때부터 알던 동생이에요.
마침 오빠 학교 옆을 지나다가 생각이 나서 들렀어요. “
“ 그렇구나. 강우랑 많이 친한가 봐요. ”
" 네? 아니요. 사실은 아니에요. "
" 그게 무슨 말이에요? "
“ 어렸을 때부터 제가 오빠를 좋아했어요.
부모님들끼리 다 크면 결혼시키자고 약속도 하신 사이예요. ”
놀란 동빈은 연우를 쳐다보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 놀라셨죠? 처음 보는 여자애가 별소릴 다 한다고.
날 이상하게 생각할 거지만 지금은 제 맘을 숨길 수가 없어요.
왜 이렇게 제 마음이 서러울까요? "
"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어요.
잘 모르는 사람한테 비밀을 털어놓고 싶을때가 있어요.
오히려 더 편하잖아요.
저도 술에 취해서 택시를 타고 가다
기사 아저씨한테 별 소리를 다 한 경험도 있는 걸요.
다만 좀 놀라서
요새도 그런 게 있어요?
정략결혼 뭐 그런 거 말이에요? “
“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부모님이 서로 친구 사이셔서
그냥 얘기만 하신 거예요.
강우 오빠는 사실 저를 별로 안 좋아해요.
아직도 날 애기로만 동생으로만 보는 것 같아요. “
“ 아, 그럼 연우 씨
내가 연우 씨라고 해도 돼요? “
“ 강우 오빠 친구니까 그냥 연우라고 부르세요. ”
“ 연우 씨도 다른 남자 친구를 찾아보는 게 어때요?
남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더 좋아해요.
연우 씨도 충분히 예쁘고 매력이 있는데 강우만 바라보지 말아요.
아직 어리잖아요. “
“ 에, 저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요.
너무 어려서부터 좋아해서 그런 것 같아요.
동빈, 서동빈 오빠라고 했죠?
저 오빠 부탁이 있는데...... 좀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
“ 뭔데요?
저 이거 제 PCS 번호인데
강우 오빠가 학교에 있을 때나 제가 알아야 할 일이 있으면 전화를 좀 주시겠어요?
오빠가 힘든 일이 있다거나 제 도움이 필요할 때 말이에요. “
“ 아? 미안한데.
나는 PCS가 없어요. 하숙집에 있는 전화나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있거든요. “
“ 어, 그럼. 저 이거 가지세요. “
“ 네? 이걸 제가 왜 가져요? 연우 씨걸 ”
“ 어, 우리 집에는 이거 많이 있어요.
가지고 계시다가 제가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
“ 아, 강우가 알면 기분 나빠할 텐데요.
강우랑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그런데. “
“ 절대, 절대, 절대 제가 말 안 할게요.
이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거예요.
제가 동빈 오빠한테 PCS 폰 까지 주고 스파이까지 했다는 걸 알면
오빠가 화를 많이 낼 거예요. 그래도 궁금해서 오빠를 볼 수가 없어서 너무 답답해요.
한 번만 도와주세요. 딱 이번 겨울방학 전까지만요. “
“ 아....... 그래요. 그럼. 겨울 방학식 때 돌려줄게요. “
“ 고마워요. 동빈 오빠 저 갈게요. ”
“ 그래요. 잘 가요. ”
정문이 보이자
연우는 자기의 부탁이 쑥스러웠는지 얼른 사라져 버렸다.
동빈은 연우에게 강우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할 연우를 보고 싶지 않았다.
연우가 더 나이가 들어 다른 남자를 좋아하거나
연우를 좋아해 줄 남자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연우의 마음이 식을 거라 믿었다.
처음 본 연우는 한눈에 봐도 충분히 사랑스러웠다.
화란은 강우의 학교로 차를 운전해 강우를 데리러 종종 왔었고
과 친구들과의 술자리에도 자주 참석했다.
화란과 연우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자였다.
강우보다 5살 연상이라고 했지만
이름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자였다.
이름만큼이나 성격도 화끈해서 남자들과의 술 대작에도 지지 않았고
유머 감각도 좋고, 성격도 좋아서 강우의 과 친구들은
‘ 누나 ’ 하면서 화란을 좋아했다.
사실 마음으로는 모두 화란을 애인으로 둔 강우를 부러워했었다.
AGT 건설 비서실의 사장 개인비서로 능력을 인정받아
화란이 신입사원 채용이나 직원들 승진에도 영향을 준다고
AGT 건설에 입사한 선배들은 이미 화란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무로 있는 CH건설, 애인이 있는 AGT 건설
두 군데 모두 취업이 보장되어 있는 강우를 친구들은 내심 질투도 했다.
동빈은 화란이 있는 술자리는 왠지 싫어 핑계를 대고 화란을 피했었다.
강우와는 친한 사이였지만 화란과 동석하는 자리는 무엇인지 모르게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화란은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사람 같았다.
특히나 뚫어지게 사람을 쳐다보는 화란의 두 눈에는
순수함이나 선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빈은 화란의 눈이나 표정에 탐욕과 거짓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 화란이란 여자보다 연우가 더 예쁜데
아이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더 순수해 보이고 선해 보이는데
강우가 여자를 보는 눈이 없네.
화란이란 여자를 보면 왠지 기분이 서늘해.
그래도 강우랑 서로 좋아하는 사인데. 내가 뭐 할 말은 아니지. ‘
동빈은 화란을 마주치면 눈인사만 하고 도서관이며 과 사무실로 가버렸다.
“ 저 친구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봐.
네 친구들은 다 나를 좋아하는데. “
“ 시골에서 올라온 아이라 낯을 많이 가려.
여학생들하고는 말도 잘 안 섞어. 수줍어서 그래. “
강우는 그런 동빈이 그저 수줍음이 많아 화란을 피하는 거라 생각했다.
밤마다 연우는 동빈에게 전화를 해서
강우가 학교 수업은 자주 들어오는지. 요즘 집에도 자주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고 걱정을 했다.
화란과의 밤을 보내고 있을 강우지만
동빈은 과제가 많아 친구들과 밤샘 작업이 많고
공모전을 준비해야 해서 집에 갈 시간이 없다고
학생들 대부분이 집에 가지 못하고 있다고 핑계를 댔다.
동빈의 얘기를 들으면
연우의 우울한 목소리는 금세 밝아져서
다음 날 맛있는 도시락을 들고 과 사무실로 강우를 찾아오곤 했고
이를 본 강우는 연우를 피해 달아나 화란에게로 갔다.
강우를 대신해 동빈은 연우와 학생식당이며 잔디밭에 앉아
연우가 싸온 도시락을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곤 했다.
연우와 얘기를 할 때마다
동빈은 고향 경주가, 경주에 있을 여동생이 생각났다.
연우보다 4살이나 어린 동생
동빈은 그런 연우가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연우의 머리를 쓰다듬다
깜짝 놀란 연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 오빠, 왜 내 머리를 쓰다듬어요? ” 묻자 동빈은 웃으며
“ 연우야, 너는 네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모르는 것 같다.
강우도 너를 잘 모르는 것 같고
그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