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에 침낭을 챙겨다녀야 할지도 몰라
22살 인도여행을 처음 갔을 때의 준비물 중에는 침낭이 있었다. 더운 나라를 가는데 침낭이 왜 필요하냐 물으니, '숙소에 어떤 해괴망측한 벌레가 나올지 몰라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와 친구는 산악부였지만 한 번도 침낭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겨울 산행은 안 하기도 했고, 텐트에서 자도 불편을 느낀 적도, 벌레 때문에 곤욕을 치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숙소도 버젓이 있는데, 침낭이 필요하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가 흘려들었다. 필요하면 한국보다 물가가 훨씬 싼 인도 현지에 가서 사지 뭐. 인도에서의 첫날밤, 숙소에 나타난 한 무더기의 바퀴벌레 떼에게 한껏 농락당한 놀란 가슴을 이고 지고 '이래서 침낭 얘기를 한 거구나' 실감했다. 둘째 날 체크아웃 하기가 무섭게 인도 시내를 돌아다니며, 가벼운 여름용 침낭을 5000원인가 주고 구입했다. 이걸 사용할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인도 북쪽으로 가면 '스리나가르'라는 도시가 나온다. 히말라야 근처에 있어서 지대가 높고 풍광이 아름다우며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달 호수(Dal Lake)가 근처에 있다. 이곳은 호수이지만 마을이다. 상점, 공원, 모스크, 호텔이 다 있는 수상마을. 아침마다 새벽시장이 열리는데, '시카라'라고 부르는 나룻배에 상인들이 이것저것 싣고 와서 물건을 파는 모습은 장관이다. 평화롭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톡톡히 제 값을 하는 곳이다. 특이하게도 물에 떠 있는 하우스보트(houseboat)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하우스보트는 커다란 배를 호텔로 개조해 꾸며놓고 숙박을 하는 그 지역만의 특징적인 숙박 형태였다. 영국이 인도를 지배하던 시절, 영국 행정관들이 땅을 사는 것을 인도정부에서 막아 호수에 수상가옥을 지어 별장으로 사용했는데 그게 오늘날의 하우스보트가 되었다.
배에서 잠을 자는 거나 마찬가지니, 호텔 방에서 창문을 열면 바로 호수다. 여러 개의 하우스보트들이 밤이 되면 불을 밝히고 호수에 비치는 불빛과 함께 그 자태를 뽐내기 시작하면, 우리는 음악을 한껏 틀어놓고 감성에 젖었다. 시시때때로 시카라를 탄 상인들이 지나다니면서 인도 맥주인 킹피셔와 레이즈를 팔았다. 맥주 한잔에 감자칩을 먹으며, 창틀에 앉아 아래로 보이는 호수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해 보며 꿈같다, 아름답다를 연발했다. 우리가 갔던 때는 관광객들이 많이 없던 시기여서, 하우스보트 하나에 방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방 빼고는 거의 빈 방이었다. 무서움도 없이 덜컥 머무르며 그 커다란 하우스 보트에서의 하룻밤을 온전히 우리만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영국식의 궁궐 같은 커다란 방의 킹사이즈 침대에 친구와 둘이 누웠다. 천장도 높았고 어디 성에서 자는 듯한 기분이었다. 덥지도 않고 딱 좋은 날씨였던 걸로 기억한다. 아주 살짝 습기냄새 같은 게 났지만, 게스트하우스만 전전하다 처음으로 호텔 같은 곳에 온 우리는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자다가 뭔가 따끔한 느낌이 들어서 잠깐 깼다. 근데 맥주도 마시고 노곤노곤한 상태여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음날 아침까지 자고 일어났다. 아침은 전용 요리사가 해주는데, 그 당시 1박에 만원도 안 하는 돈으로 궁궐 같은 집에 전용 요리사라니. 가격을 생각하면 이런 호사가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감탄을 하며 아침을 먹는데, 친구가 말했다.
"여기 모기가 많나 봐. 밤에 잘 때 뭐가 자꾸 무는 것 같았어."
"어, 나도 뭐 물린 것 같아. 물가라 모기가 많은 가봐. 어머!! 왜 이렇게 많이 물렸지?"
가만 살펴보니, 벌겋게 모기 물린 자국이 한 다리에 대여섯 개는 되어 보였다. 뭔가 규칙적으로 정렬이 된 벌건 자국들이 보였다. 이렇게 차례차례 물었다고? 뭐 이런 군인 같은 모기들이 다 있나 깔깔 웃었다. 모기 가족을 배불리 먹였으니, 아침을 많이 먹자며 너스레를 떨었다. 물린디 같은 걸 바르고 가려움은 잊었다. 우리는 무지했다.
다음날 새벽에 친구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다.
"여기 뭔가 있어!"
"뭐가 있어?"
"이불속에 벌레 같은 게 있어. 뭔가에 물렸는데 모기는 아니야. 모기가 이불속에 기어 들어 올리는 없잖아. 정체를 모르겠어."
"으악 그게 뭐야. 우리 침낭 속에 쏙 들어가서 자자."
우리는 곧장 가방에서 침낭을 꺼내 머리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잤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보니, 더 이상은 물리지 않은 것 같았다. 근데 친구가 새벽에 새로 물렸던 자국도 약간의 지그재그인 일렬이어서, 여기는 벌레도 취향이 참 독특하다 얘기하고 넘겼다.
그로부터 한참 지난 후 우연히 만난 외국인들이 얘기하길 오래된 숙소에 가면 베드버그가 있단다. 그놈들이 일렬로 줄지어서 문다고, 피 빨아먹는 놈들이라며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를 문 게 베드버그란 놈들이었던 것이다. 당시엔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전이었고, 정보를 바로 검색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물린 적은 있어도 본 적이 없으니, 베드버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벌레였던 셈. 미국인들이 자기 전 인사로, "Don't let the bedbugs bite."라고 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침대에 있는 벌레라 베드버그인가 보네, 자기 전 인사를 저렇게 하는 걸 보면 미국엔 베드버그가 진짜 많은가 보다, 근데 인도에도 별별 물 건너온 벌레들이 다 살고 있구나. 역시 다이내믹하고 온갖 생명이 번창하는 신기한 나라였다.
그렇다면 베드버그는 인도에만 있었을까?
#1. 몇 년 전 남편, 아이와 제주도에 갔을 때 갑자기 간 여행이라 급히 숙소를 예약했다. 바다에서 노는 게 목적이어서, 바다 근처의 에어비앤비를 구했다. 급하게 구한 것치고 가격도 좋았고 숙소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침구도 깨끗해 보였다. 다만 해가 잘 안 들고 화장실에 습기가 많고 전체적으로 곰팡이 냄새가 난다는 게 걸렸다. 하루 잘 건데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예상대로 우리는 밖에서 놀다가 집에서는 씻고 잠만 잤다. 한참 잠든 새벽,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여름이라 모기가 무나 생각하며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렬로 6-7개의 물려있는 자국을 오랜만에 보았다.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있던 기억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우리나라에도 베드버그가 있다니. 베드버그는 서양벌레 아니었나? 어떻게 베드버그가 한국에도 있나 검색을 해보니, 베드버그는 빈대였다! 우리나라에 70년대까지 있었다가 지금은 사라진 줄 알았던 그 빈대. 아이 자연관찰 책에서나 보았던 그 빈대한테 물린 거였다. 빈대는 비위생적이고 방역이 제대로 안 되는 시절에 있었던 후진국형 해충이라고 들었는데. 충격을 받은 우리는 에어비앤비 주인에게 물린 자국을 찍어서 보내고, 방역을 요청했다.
#2. 빈대를 또다시 만난 건 작년 프랑스에서였다. 반고흐와 이우환의 작품들을 만나러 아를에 갔다. 소도시에서 숙소를 미리 예약하지 않았던 우리는, 아를에 거의 도착해서야 에어비앤비로 숙소를 찾아 바로 예약했다. 그곳은 작은 길가에 있는 해가 들지 않는 3층집이었다. 1층은 주방과 커다란 테이블, 2층과 3층은 다락방 같은 방들이 있는 프랑스의 젊은 감성이 넘치는 집이었다. 멋진 그림들도 여기저기 툭툭 걸려있고 조명이 어두워서 더 분위기 있어 보였다. 세탁기에 건조기까지 있는 숙소라 정말 마음에 들었다. 집에 들어서니, 약간의 습기 냄새가 났지만 분위기에 취해 별 생각이 없었다. 2-3층까지 짐을 들고 가기는 무거워서 1층에 짐을 풀고 2-3층에선 잠만 자기로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게 얼마나 잘한 결정이었는지.
첫날 아이가 덥다고 해서, 침대 이불 위에서 아무것도 안 덮고 재웠다. 더위가 시작되려는 날씨였다. 둘째 날엔 쌀랑했는지 아이가 이불속으로 쏙 들어가 자다가 땀을 뻘뻘 흘리길래, 이불을 걷어주었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던 첫날과 달리 둘째 날 자고 일어난 아이가 다리를 벅벅 긁고 있어서 모기에 물렸나 하고 보니, 익숙한 일렬이 또 보였다. 아, 이것은 빈대다! 무서워서 이불을 들춰볼 생각은 못하고, 우리가 입었던 옷들을 체크아웃 전에 얼른 빨고 건조기까지 다 돌렸다. 에어비앤비 주인에게는 사진을 찍어 보내고 방역 요청을 했다.
빈대에 노출이 되면, 일단 옷들은 세탁기+건조기를 돌리고 캐리어는 햇빛에 말려 잘 소독한다. 빈대는 열에 약하기 때문이다. 빈대에 물리면 가렵다. 하지만 물려보니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빈대가 물면 모기보다 많은 양의 피를 뽑아간다고는 하지만, 건강한 사람이면 괜찮다. 여러 군데를 한 번에 물리니, 가려운 게 가장 힘들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그래서 물린디 같은 항히스타민 물약, 약한 스테로이드 연고, 항생제 연고를 가져가 적당한 때에 바른다. 대부분의 가려움은 바르는 파스타입의 약이나 스테로이드 연고로 해결이 되지만, 아이들 같은 경우 긁어서 상처를 만들 수 있으므로 항생제 연고가 필요하다.
여행에서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생긴다지만, 빈대는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것 중의 하나였다. 침낭이라도 싸가지고 다닐까보다 하는 생각은 매번 하지만 또 매번 잊어버린다. 빈대를 만나면 여행 끝까지 이놈들과 함께 다녀야 하는거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생긴다. 1회성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 두려움의 가장 큰 부분이다. 생명력이며 번식력도 좋아 오죽하면 캐리어에 실려 한국까지 따라오는 놈들도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이미 3번의 빈대를 만났으니, 그걸로 족하지 않나. 이제 우린 더 이상 만나지 말자.
일기 일회 : 지금 이 순간은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 (법정스님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