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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Mar 05. 2024

헤엄치기, 헤어나오기, 물에 빠져 죽기, 또는…

서머싯 몸, 베른하르트, 리디아 데이비스, 글렌 굴드

헤엄치기, 헤어나오기, 물에 빠져 죽기, 또는…

 

Paul Gaugin, D'où venons-nous ? Que sommes-nous ? Où allons-nous ?, 1897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우리는 우리에게서 왔고, 우리는 우리이며,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으로 갈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G7EEACEefH0



글쓰기의 메커니즘은 사랑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 뭐가 어떻게 비슷하고 다른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말은 뱉기 시작하면 구구절절해지고, 그럼 사람은 구질구질해지는데, 그럴수록 속내는 비참해지는 법이니까. 아님 우스워지거나.


소설을 쓰는 사람은 우스워지거나 비참해질 운명이고, 그나마 괜찮은 경우라도 조금 덜 비참해지거나 나빠 봤자 조금 더 비참해질 따름이다. 그러니까 비참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괜찮거나 괜찮지 않거나.


왜냐하면 비참하지 않은 사람은 소설을 쓸 수 없고, 쓰더라도 잘 쓸 수 없으며, 소설을 써야 하는 사람이 더는 비참하지 않아서 소설을 못 쓰게 되면 그로 인해 다시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에.


쓰지 못하는 비참과 쓰게 만드는 비참 중 어느 쪽이 나은지는 따지지 말기로 하자. 어차피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뭐를 쓰고 말고 같은 건, 누구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누구를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처럼.


그러니까, 글쓰기의 메커니즘은 사랑의 그것과 아주 유사하다는 거다.


아, 벌써 구질구질해지는 기분이다.






소설을 쓰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 안타깝게도, 라고, 서머싯 몸은 언젠가 말했다는데, 그런 것치고, 몸은, 그럭저럭 괜찮은 소설을 썼다. 그렇다고 남몰래 숨겨 놓은 비결 따위는 없었을 거다.


어떻게 아느냐고? 비결 운운할 정도는 아니니까…


서머싯 몸을 처음 읽었던 건 몇 해 전의 여름이었다. 『면도날』이라는 소설이었는데 두께에 비하면 꽤 빠르게 읽어 치웠다. 나는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이 아니다. 하루 만에 수백 쪽짜리 책을 다 읽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면도날』은 술술 읽혔다. (여기서 잠깐, 이지리딩은 좋은 소설의 조건인가 아닌가? : 아님. 좋은 소설은 읽히지 않는다. 왜? 난 힙스터니까.)


그래서인가. 이사벨이 귀여웠다는 것밖에는 그닥 떠오르는 게 없다. 소설에서 이사벨은 적당하게 속물스럽고 평범하게 사랑스러운 여자로 나온다. 그 여자는 래리라는 소꿉친구 남자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이 남자는 이사벨과는 정반대다. 쥐뿔도 가진 게 없는 주제에 도를 닦으러 돌아다니는 인간이다. 특이하게 눈길을 끄는 소설의 주인공.


몸은 그들의 지인이자 화자로 등장해서 이사벨과 래리,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일상사를 관찰하며 이런저런 코멘트를 틈나는 대로 얹는데, 그게 뭐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나는 그게 조금 편의적이고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조금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저 재미나게만 읽었다. 지나고 보니 그렇더라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은 화자의 속내가 뒤틀리고, 신세는 비참하고, 악의가 부글부글 들끓거나, 따분해하는 냉소와 시니컬함이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유머러스한 소설들이다. 자기비하와 자기혐오가 만연하며, 타인에 대한 경멸과 사회질서를 향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러다 가끔씩 인간에 대한 애정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나며, 그래서 하염없이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그러다 다시금 희망과 절망을 엿보는. 벌거벗은, 아니 벌거벗겨진 작가가 엿보이는, 어깻죽지에 담요를 둘러주고 싶어지는 소설들.


왜? 나도 그런 인간이니까.


사실, 소설은 냉소의 발명품이다. 냉소는 적당한 거리감에서 오고, 거리를 조금 두고 보면 세상사는 뭐든 다 우스꽝스럽기 마련인데, 타인과 거리를 두고 그들을 비웃거나 하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도 우스워 보이게 된다. 스스로와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비웃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도 몇몇만이 소설을 쓰게 된다. 어떤 사람들인가 하면은, 할 줄 아는 게 별달리 없는 사람들. 서머싯 몸 가라사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종종 작가가 된다…


누구? 할 줄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범람하는 자의식에 절여진 젓(갈) 같은 사람들. 그러니까 자의식이라는 건 자기 삶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관찰하는 아주 좆같은 버릇,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야릇한 취미가 아닐 수 없다.


그 덕분에 인간은 인간이 되었는데,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테니까. 인간은 차라리 인간이 되기 전이 나을 뻔했다. 동물들은 먹이를 뺏기든 여자를 뺏기든 강간을 당하든 두들겨 맞든 간에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진 않는다. 아파하기야 하겠지. 슬퍼하기도 할 거다. 동물들에게도 느낌과 기분은 있을 테니까.


사람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고 충만한 감정을 느끼겠지. 좋은 쪽으로도 그럴 거다. 동물들의 섹스에는 관능만 있다. 사랑은 없다. 그리고 사랑은 인류의 가장 좆같은 발명품이다. 『달과 6펜스』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말하듯이. 그가 말하지 않은 게 있다면… 글쓰기는 가장 좆같은 발명품보다 살짝 더 좆같은 발명품이라는 거다. 나는 왜 이런 걸 쓰고 있지?


아. 아주 좆같은 새벽 네시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서머싯 몸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했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라는 건 원래가 아무렇게나 중단되고 아무 데서나 이어지는 법이니까. 제멋대로 사라졌다가 다른 데서 튀어나오는 산길처럼, 몇 해 전에 덮고 치웠던 책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면도날』을 떠올리고 있다.


그런데 소설의 제목이 왜 ‘면도날’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인터넷을 켜서 찾아봤다. 교보문고의 책 소개글에는 이렇게 써 있다: “『면도날』은 날카로운 면도날을 넘어서는 것처럼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을 선택한 한 젊은이를 통해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음… 난 ‘고되고 험난한 구도의 길’ 같은 데엔 별 취미가 없다. 그런 걸 믿기엔 이미 너무 시니컬해졌다.


아, 이제 하려던 얘기가 생각난다.


내가 『면도날』 이야기를 꺼낸 건, 래리나 찰스 스트릭랜드 같은 인간들이 더이상 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다.


예전보다 조금 멀어졌다는 얘기다. 서머싯 몸의 세계에서.






고갱과 찰스 스트릭랜드의 차이점: 고갱도 스트릭랜드처럼 느지막이 화가 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는 가정을 버리거나 직장을 때려치우거나 하지 않았다. 직장이 그를 치워버렸고, 아내와 아이들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 고갱은 얼떨결에 전업 화가가 됐다.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살다 보니.


몸 스스로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다고 『달과 6펜스』에서 공언한 인간적인 사정들과 사연들, 그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하고 또 성질을 더럽게 만든 계기들이 고갱에게도 있었을 거다. 아내로부터 딸의 죽음을 전해 들은 고갱은, 아내에게 보내는 답장에서 이렇게 썼다:


“어린 시절부터 불행은 늘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행운은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고 기쁨 같은 것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운명은 항상 내게 적대적이었지요. (…) 신이여, 당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저는 당신의 부당함과 심술궂음을 고발하려 합니다…”


그런데 서머싯 몸의 스트릭랜드에게는 그런 인간적인 구석이 조금도 없다. 그건 그가 인간이 아니라 몸이 동경하는 관념의 화신이기 때문이다.


인물이 아니라 화신을 그리는 것, 그게 뭐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장편소설엔 불가피하게 작가의 형이상학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고 어떤 작가가 그랬다. 소설이란 어차피 픽션인바, 되도 않는 속류적 리얼리즘의 기준으로 딴지를 걸 생각은 없다.


단지 몸의 형이상학이 이제는 조금 유치해 보인다는 얘기다.






남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래리나 스트릭랜드 같은 기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 몸은 마치 그런 것처럼 쓰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남들을 이해할 수도 없다.


고갱은 우스꽝스러워리만치 자기확신에 가득 찬 무명화가였지만, 남들의 평가에 전적으로 무관심할 수 있는 초연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에게도 인정욕구가 있었다. 그는 미술계에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고갱과 스트릭랜드는 다른 사람이다. 둘 다 머리가 좀 돌아버렸고, 성격이 유별나기는 했겠지만.


몸은 고갱의 삶에서 모티프를 얻었지만 전기적 재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뭐, 소설을 쓰는 데 실제인물을 계속 참고하다가는 방해만 되긴 했을 테다. 그는 찰스 스트릭랜드를 낭만주의적 예술가-영웅상의 전형으로 그린다. 그는 특이하고 비범한 사람에게만 관심이 있다.


순진하다. 순진한 생각이다. 몸은 예술가에게 신성을 부여하려 하지만, 현대소설에는 신성 따윈 어울리지 않는다. 『달과 6펜스』의 기획은 시대착오적이다. 낭만은 원래 얼마간 시대착오적이기 마련이지만.


물론 재능으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인간 같지도 않은, 그런 초인적인 쓰레기-영웅들이 아주 드물게나마 실존하는 건 사실이다. 우리 시대가 더는 그런 영웅담을 요구하지 않는단 거지.


마블영화 같은 게 주기적으로 유행하는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가.


모르겠다.


아무튼 몸은 요구한다. 래리나 스트릭랜드 같은 기이한 영웅을.


그건 본인이 현실의 문제에서 얼마간 자유로웠던 부르주아였기 때문일까? 이건 그에게 조금 부당한 평가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가 낭만주의적이고 연극적인 기질의 소유자였음은 사실이지 싶다. 괜히 영국 정보부 스파이 노릇까지 해본 게 아닐 테니.






요즘엔 한 자도 쓰지 못하고 있고, 그런 와중에 베른하르트를 읽었다. 비참한 기분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보다 글을 훨씬 잘 써서? …라기보다도 그런 걸 써낼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러웠다. 요즈음 나는 아무것도 써내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니까.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는 재능의 모자람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다 못해 자살하고 만 어느 예술가의 열등감에 관한 소설이다. 『달과 6펜스』와 마찬가지로 실존하는 예술가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여기선 글렌 굴드가 고갱처럼 모델 역할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 소설에서 글렌 굴드는 본명으로 등장한다는 점. 찰스 스트릭랜드 같은 가명이 아니라.


음악을 조금 들어본 사람이라면, 방금 전의 문단에서 잠깐 멈칫했을 것이다. 글렌 굴드는 열등감이나 재능의 부족을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잘나고 뛰어났던 불세출의 천재였다. 음악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라도 글렌 굴드의 천재성에 관한 신화는 들어봤을지 모른다. 못 들어봤다면 지금 당장 유튜브를 켜고 51분 21초짜리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라.


그는 살아있을 때 전설이 됐고 사후의 추락이나 망각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따위 것들엔 아예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글렌은 오래 생각해보지도 않고 지껄이는 사람들을 혐오했는데 그건 온 인류를 혐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뭔가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러움의 축복을 받은 예술가였다. 아마도 그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오직 자기 예술을 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는 음악이나 피아노에 복종하거나 경배하지 않았고, 차라리 그것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게끔 길들였다.


그에게는 자기확신이라는 재능이 있었다. 고갱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지만, 아무래도 굴드가 한술 더 떴지 싶다. 그는 쉰 살이 넘으면 피아노를 그만두겠다고 늘상 입에 달고 살았고, 쉰 살을 넘긴 지 열흘 만에 뇌졸중으로 죽었다. 그는 죽음까지 길들일 만큼 강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재능을 갉아먹는 독극물이나 다름없는 완벽주의적 성향도 그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완벽했으니까. 적어도 피아노 앞에 쪼그려앉아 있을 때만큼은.


굴드는, 정말로 남들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았다. 그는 스트릭랜드 유형의 실존인물이다. 그도 꽤나 많은 기행을 남겼다. 양순한 후견인의 뒤통수를 치고 NTR을 자행한 스트릭랜드만큼 비인간적이지는 않았지만.





『몰락하는 자』에서 작가의 ‘오너 캐’는 글렌 굴드가 아니다. 이 소설에는 세 친구가 나온다. 그중 한 명은 물론 글렌 굴드다. 나머지 두 명 중 한 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소설의 화자다. 나머지 한 명은 자살한 예술가 베르트하이머다. 어쩐지 베른하르트와 철자가 겹치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베른하르트는 글렌 굴드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쪽이다. 그가 소설로 쓰려 하는 건 비범한 천재의 예술 이야기가 아니라, 천재를 맞닥뜨린 범재 쪽의 부숴지고 들끓는 뒤틀린 마음이다.


왜? 그가 그런 사람일 테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글렌 굴드나 고갱처럼 굳건하게 믿지 못한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는,

어떤 해결책이 없다. 다만 쓸 뿐이다, 베른하르트는. 가능한 솔직하게.


소설의 화자와 베르트하이머는 거의 삼십 년 전에 글렌 굴드를 처음 만났다. 그들은 호로비츠에게 피아노를 사사했다. 베르트하이머와 화자도 상당한 재능을 지닌 연주자였지만, 그들은 글렌 굴드의 연주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그래서 둘 다 피아노를 때려치운다.


동병상련의 처지지만, 소설의 화자는 친구 베르트하이머와 계속 거리를 두고 그를 비웃는다. 그는 그칠 줄 모르는 자기연민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라고 글렌 굴드는 말했다. 베르트하이머 스스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예술가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건 커다란 착각이었어,


하지만 예술이 아니라면? 뭐가 다르기라도 할까? 그는 다른 뭐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에서 도망쳐 나온다 해도 곧장 다른 것에 휘말려 우리 자신을 망치는 거야, 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는 끝까지 떠나는 일만 반복한다구, 라고 그는 말했다.


따지고 보면 나는 피아노 대가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세상이 정말 지루해서 죽을 지경이었고, 또 일찍부터 삶에 넌더리가 나 있던 나 자신을 구제하기 위한 핑겟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베르트하이머도 사실 나와 비슷했다, 우리 두 사람은 애당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출세'를 못 했던 것이다, 라고 소설의 화자는 말한다…


그들에게는 애당초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들에게 예술은 삶에 넌더리가 나 있던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각자는 작가 베른하르트를 얼마씩 나눠 갖고 있다. 그들은 두 사람 같은 한 사람이다.


베른하르트는 쓴다, 가능한 솔직하게.


핑곗거리로서의 글쓰기.






글쓰기는 스스로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그건 원천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글은 실재의 대리보충이다, 물론 우리는 실재에도 다다를 수 없다, 글쓰기나 예술은, 모두는 아니라도 거의 전부, 핑곗거리일 따름이다, 세상이 지루하고 스스로가 지겨워 죽일 것 같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사랑도 어느 정도는 그런 셈이다…


글쓰기와 사랑은 그런 불가능 속에서 지속되고, 불가능할 때에만 가능하며, 이 시퀀스는 결코 중단되거나 종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러기에 말했지 않나. 글쓰기의 메커니즘은 사랑의 그것과 유사하다고…






낭만주의적 천재 신화와 천재가 될 수 없는 작가의 비참함이 담긴 현대소설… 나는 병적인 낭만주의자의 기질을 지니고 있고, 그게 병이라는 걸 자가진단할 수 있을 만큼은 건강하지만… 여전히, 조금은,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다. 아마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듯싶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는가?


‘낭만주의’에서 ‘-주의’-ism를 떼기. 적당한 정도의 낭만을 품고 좆같은 현실을 살아가기. 어떻게?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소설 「글렌 굴드」가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다. 이 소설에서 글렌 굴드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이야기로만 등장한다. 그러니까 글렌 굴드가 어떤 시트콤을 좋아했다더라, 또는 그는 정말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 하는 식으로. 여기서 글렌 굴드는 기호다.


소설의 화자는 평범한 주부다. 남편이 밖에 나가서 일을 하는 동안 여자는 아이와 집안 살림을 돌본다. 여자는 <메리 타일러 쇼>라는 시트콤을 좋아하는데, 그런 자신을 조금 한심하게 여긴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우연한 소식을 접한다. 글렌 굴드도 그 시트콤을 좋아했더라는 것이다. “그 사실에 나는 엄청나게 놀란다. 내가 서로 최대한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두 세상이 내 눈앞에서 하나가 된 것이다.”


글렌 굴드는, 화자가 피아노를 배우던 어린 시절 내내 그녀의 영웅이었다. 여자는 “음악을 업으로 삼을 마음은 없었지만, 여느 전문가만큼이나 열심히 피아노를 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그건 더 힘든 다른 일들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피아노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라고 말한다.


고상한 취향과 빛나는 지성과 괴팍한 성미를 지녔던 글렌 굴드가 평범하기 그지없는 화자와 같은 시트콤을 좋아했던 이유는, 소설이 끝난 뒤에도 밝혀지지 않는다.


글렌 굴드를 이해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소설의 화자에게 그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글렌 굴드와 그녀가 같은 시트콤을 좋아하더라는 사실만이 의미 있는 것이다. 물론 그건 내용 없는 의미다. 그녀는 굴드가 왜 그 시트콤을 좋아하는지 잘 모른다. 그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 뭐 어때?


좋은 건 그냥 좋은 것이다. 재능이고 성공이고 인정이고 따지기 전에.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더라도. 그리고 우리는 가끔 서로 같은 것을 좋아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우리는 단지 약간의 동료애를 품고, “이해하려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그걸로 그만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서머싯 몸을 비웃을 수가 없다. 그의 소설이 순진하고 유치하더라도. 그렇다는 건, 찰스 스트릭랜드를 마냥 무시하거나 미워하지도 못하겠더란 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나는 어느 정도 그들과 동류의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이따위 글이나 밤새도록 끄적이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밤에는, 스트릭랜드의 퉁명스런 한마디에 몸을 기대는 게 좋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는다.


나도 헤엄을 치고, 허우적거리고, 또 헤엄을 치며 달아나 보기도 했다. 그만 읽고 싶었고, 읽을 만큼 읽었다 싶었고, 그만 쓰고 싶었다. 가끔, 아니 자주, 아무것도 안 써지기도 했다. 쓰더라도 맘에 들지 않았다. 한심하게 읽혔다. 열등감에 쪼그라들었다. 인정욕구에 달아 있는 내 자신이 싫었고, 냉소에 절여진 내 코웃음 소리도 싫었다. 앞으로도 자주 그럴 테고.


그러거나 말거나.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 뭐 어떤가. 글에 빠져 죽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그러다가 다시 쓰고 싶어지면? 일주일간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던 류노스케처럼 아무 거라도 쓰고 싶어서 못 견딜 지경이 되면?


그럼 그냥 몸을 던지면 된다. 풍덩.


아무래도 헤어나오긴 글렀다.





https://www.youtube.com/watch?v=08h8u8Z9i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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