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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Oct 11. 2024

내가 한강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한강의 허리 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마곡나루를 지나 DMC로 건너가는 구간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려 한다.


출퇴근길 기차 칸은 밀고 밀리는 사람들의 짜증과 피곤으로 분주하게 처져 있다. 차창은 좁고 내부는 더 좁다. 몸을 비틀어 대며 겨우 마련한 창가 앞 자리에 서서 창문 너머를 건너다본다. 적대와 무심을 넘치도록 싣고 달리는 기차가 화물을 무신경하게 흘리는 동안 강물은 너울거리며 악의를 담담히 흘려보낸다.


기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아침저녁으로 보는 풍경이 오늘은 조금 달리 보였다.






한강을 건너면서 한강을 떠올렸다.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를.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과 작가의 가물거리는 실루엣을. 깨어질 듯한 유리나 깨진 뒤의 유리 조각을. 그 조각을 들고 서 있는 표정 없는 여자를.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한강에게 인간은 부서지고 난 뒤에야 증명되는 것이다.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는 사후적으로만 자태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우린, 죽어야 한다. 죽지 못한다면?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


나는 한강은 좋아하지만 한강은 좋아하지 않는다.






한강은 폭력이 세상에서 사라지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건 사실이기는 하다. 존재는 언제나 폭력을 수반하고 우리는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내가 싫어하는 부분은, 한강이 이런 세상에 대처하는 태도다. 아니, 한강은 사실상 대응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폭력이 싫다면서 폭력에 탐닉하고 되돌린다. 자기 자신에게로. 그리고 독자에게로.


한강의 소설에는 농담이 없다. 바싹 말라 버린 식물처럼.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속 눈먼 노인은 웃음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에코의 주인공은 결말에 이르러 제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의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비웃게 하고, 진리로 하여금 웃게 하는 것일 듯하구나.”


한강의 진리는 세상은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작가가 어떤 진리를 추구하든 거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중요한 건 어떻게 쓰느냐다.


작가라면, 스스로의 진리를 비웃을 줄도 알아야 한다. ‘예술은 주체적 진리의 마지막 보루’이지만, 위대한 예술은 그 너머에서 온다. 비웃음이 진리를 웃게 한다. 때로는 독자를 웃게 할 수도 있고.


작가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다. 다시 한번 에코는 말한다. “나는 의사가 병을 고친다고 믿지 않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병을 비웃는 법을 가르칩니다.”






자살이 취미였던 사람치고 다자이 오사무는 유머감각이 있었다. 죄다 자조적이고 비극적인 유머긴 하지만. 어쨌든 유머는 유머다.


그는 아쿠타가와상을 달라고 안 그러면 죽어 버리겠다고 심사위원들에게 생떼를 썼다. 존경하는 선배였던 심사위원에게 4미터 길이의 간절한 편지를 부쳤다. 상 하나 달라고 그 정도까지 애걸복걸하는 인간이니까 우스꽝스러운 글도 쓸 수 있는 거다. (물론 상은 끝내 받지 못했다.)


한강은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상을 달라고 안 그러면 죽어 버리겠다고 떼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상에 초연할 것이다. 이제 와서 초연해진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누군가 그에게 수상 소식을 알려 줄 것이고 그러면 그녀는 가는 눈을 잠시 크게 뜨고 심심한 놀람을 전한 다음 별일 아니라는 듯 고독한 서재로 돌아가 버릴 것이다. 그리고 차를 마실 것이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방금 본 기사에서 한강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으로 사람이 이렇게 많이 죽는데 상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이게 내가 한강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P.S.1. 르네 지라르는 썼다. 언제나 가장 심하게 병들어 있는 자들이 타인들의 병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한다고. 물론 이건 그대로 나한테 돌려줄 수 있는 말이기도 한데, 아마도 진단명은 심술병일 것이다.



P.S.2. 이슬람을 비판하는 소설을 써서 평생 광신도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야 했던 살만 루슈디는 2022년에 실제로 피습당했고, 그간 미뤄 왔던 몫을 몰아 맞기라도 하듯 열두 번이나 칼에 찔렸다. 죽다 살아났지만 손의 신경이 손상됐고, 오른쪽 눈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뉴요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안대를 쓴 채로 농담을 던졌다. “글쓰기가 더 어려워졌다. 형편없는 타이피스트가 돼서!”


루슈디는 아직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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