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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점을 드러내어도 괜찮은 관계,
모두에게 필요하잖아요?

남원시 산내면 무검산방/꼼지락공방 운영자 최은주 님


휴가철도 아닌, 10월의 어느 날 일주일간 휴가를 내고 지리산으로 향했었다. 평소에 부리지 못했던 그런 계획을 단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귀촌 라이프의 메카로 소문이 자자했던 남원시 산내면에 대한 궁금증이 컸기 때문이다. 또 상대적으로는 현재의 내 삶과 주거지에 대한 애정이 좀 식어있기도 했다. 높은 호기심 덕분이었을까? 나는 민박집에 도착하자마자 주인장과 무작정 수다를 떨었다. 이상했다. 처음 만난 분인데 왜 내 마음과 입술이 무장해제되는 건지... 그분은 어떻게 자기 집의 방한칸을 여행객들에게 내어주며 도자기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며 살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나무처럼 춤추며 살고 싶어요.

 

 안녕하세요. 지리산 자락 <꼼지락공방>에서 도자기 빚으며 게스트하우스 <무검산방>을 운영하고 또 그림도 그리는 작가 최은주입니다. 계절별로 주업이 바뀌는데요. 봄부터 여름까지는 도예 작업을, 늦가을부터는 대봉 곶감 제조작업을, 겨울에는 그림 작업을 주요하게 합니다. 그 밖에 다른 일도 하고 있는데 그건 차차 얘기할게요. 



도자기에도, 캔버스에도 춤추는 나무를 그려요.


도예 작업을 하기에 너무 추운 겨울에는 저는 주로 매일 아크릴화를 그립니다.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워보지는 못했지만 작년에 1일 1 작품씩 100일 드로잉을 했던 것이 실력이 쑥 향상되었던 계기가 되었어요. 직전 겨울에는 1주 1 작품씩 작업하며 마음을 다져 잡았고요. 저는 대상물의 실체를 드러내기보다는, 그저 덧칠하며 느낌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면서 몰두할 수 있는 것이 좋아서 주로 나무를 그려요. 나무가 땅에 뿌리박고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습, 그런데 서로 부딪히지 않고 춤추듯 어울려 살아가는 가지의 모습이, 춤추듯이 살아가고 싶은 나의 바람을 드러내어 주기 때문이에요. 저는 나무에서 하늘을 향한 성장과 자유로움을 느껴요. 어떤 환경에 놓여도 그 주변을 멋지고 조화롭게 만드는 고목이 특히 참 좋고요. 제가 가진 자유에 대한 갈망, 생존의 의지, 조금씩 나아지겠다는 바람이 총체적으로 표현되지요.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춤추듯이 살고 싶은 마음으로 살고 있으니 나무를 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최은주님의 유화 작품들, 모두 춤추는 나무들이다.


인생의 4단계쯤 오니,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구나라고 느껴지네요.


저는 지금 인생의 4단계쯤 와 있는 것 같아요. 1단계는 대학에 입학해 23살까지, 교통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의 시간이에요.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열중하던 때, 세상은 너무나 강자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약자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겠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 졸업자가 되는 것을 거부한 후 노동 운동계로 들어가기를 준비하고 있었던 때에 사고를 겪었어요. 사고 전까지 저의 삶의 기조를 세웠던 시기죠.

 

2단계는 사고를 후 회복의 시간이에요. 다치는 순간부터 '아 나는 이제 직업이라는 것을 가질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죠. 그렇지만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사회변화를 위한 활동을 했던 1단계의 경험 덕분에 그래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어요. 특히 남편을 만나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있었고, '사고 전과 비슷한 관계와 직업생활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남편과 함께 출판사를 창업해 <오늘 예감>이라는 문화비평 계간지를 출간했었어요. 사고 보상금이 창업자금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20대의 열정을 태워 잡지를 발간하고, 그 계간지를 통해 유수의 평론가, 문학가, 활동과들과의 관계를 잇고 남겼어요.


3단계는 엄마로서의 삶의 시간들이에요. 저는 거의 독박 육아를 하고 있었는데 동네 친구들과 YMCA모임, 생협 모임을 하며 만든 엄마들 네트워크가 제 삶의 큰 위로였어요. 엄마살이의 무게를 나누기도 하고, 즐거움을 배가하기도 하고, 생협에서 독서모임 위한 도서 추천위원으로도 한 7년간 활동도 했어요. 그런데..  아이가 커가면서 서울살이가 여러모로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이전부터 남편과 자주 이야기해왔던 ‘지역에서의 삶’을 탐색하기 시작했어요. 당시 제가 탐색했던 생활 터전의 요건이 있었죠. 마을에 아이들이 있을 것, 이웃들과의 교제가 가능할 것, 나의 취미가 가능할 것이었어요. 그 요건에 맞게 원주-진안-봉화 지역 등을 검토하다, 실상사 도법스님을 연결고리로 이곳 남원 산내면을 알게 된 후 이 곳을 집중적으로 탐색했어요. 이 곳에 대학시절 함께 학생 운동하던 선배와 남편의 친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덕분에 새로운 적응이 참 수월했죠. 그분들께 참 감사해요.

 

4단계는 이곳 지리산 산내면에서의 시간인데요. 산내에 내려온 지 2년 차 즈음 <남원시민 도예대학>을 친구 소개로 다니며 도자기 만들기를 시작했어요. 주 2회의 수업이었음에도  저는 도자기 작업이 너무 재밌고 신나서 매일 다녔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내 삶의 포텐이 터졌던 시기가 아닌가 해요. 앞선 시간에 제가 꾸준히 해왔던 손작업이 도예라는 결정체로 만들어지며, 몰입감, 쓸모, 탐미, 경제력까지 충족해 주었던 거죠.  이제 도자기 작업을 10년 정도 하다 보니 제 눈도 높아져서, 정말 수준 높은 다른 작품들을 보며 내 작품을 비교하게 될 때도 있는데요. 그렇게 내 작품이 하찮게 보이려 할 때면 스스로 마음을 다져 잡곤 해요. 지구 상에서 흙을 만져 도자기를 구워내기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요. 장애인이 된 후 일종의 강박처럼 내가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을까 봐 긴장하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았던 시간이 있었어요. 어쩌면 그 덕분에 내가 그 쓸모의 내용을 찾아내고 규정하는 작업을 할 수 있었겠죠. 비단 경제적 환산가치가 아니어도, 나의 쓸모를 찾아보고 정리해보고 만들어 보는 작업을 하면,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을 주어서 스스로를 인정하고 힘을 주게 되는 시간이 되더라고요.


<꼼지락공방> 간판부터 도자기 작품이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쓸모 있는 작품들, 도구들 그리고 마을 펀딩으로 마련했던 가마

 

서로의 선의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있어요.


이 곳 산내면의 삶이 12년 차가 되는 지금도, 그때 우리 가족이 이 곳으로 내려와 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에요. 계속 서울살이를 했었다면 스스로 늘 쫓기는 마음이었을 거예요. 경제적으로도 빠듯한 생활이었기도 했겠고요.

 

이곳에 와서 나이 마흔 살에 도자기를 배우게 되고, 그렇게 배운 것을 내 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작업하려 도자기 작업장을 만들었어요. 동네에 없던 작업장 하나를 만들어 놓으면 또 하나의 문화공간이 되겠다 생각되어서 당시 수중에 생겼던 1천만 원으로 공방을 짓고, 추가로 필요했던 가마 비용 500만 원은 ‘지인 초대 크라우드 펀딩’을 했어요. 그렇게 이웃들과 함께 완성한 공간이 <꼼지락공방>이에요. 또 지인들이 지리산에 와서 편히 쉬어갈 수 있게 하려고 방 한 칸을 비워 게스트룸을 만들었어요. 빈손으로 오자면 그 또한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테니 소정의 금액을 받고 그만큼 맛난 음식을 대접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제가 모르는 분들도 검색해 찾아오는 게스트하우스 <무검산방>이 되었고요. 또 우리 아이들 먹이려고 굽기 시작한 쿠키가 지금은 산내면의 카페 2곳에서 판매가 되고 있어요. 제 기준으로 ‘영~ 이상하지 않은 최은주 표’ 레시피로 쿠키를 만들면, 마을 이웃들은 ‘더 건강한 재료로 덜 달게 만들어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최은주 표’라고 후하게 칭해주곤 하세요.


 제가 이곳에서 이렇게 자리 잡고 살아가기까지 이곳에서의 첫 집을 구해주었던 대학 선배의 덕이 컸어요. 그 선배가 귀농 1세대로서 먼저 자리 잡고 또 도와줬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요새도 집 어딘가가 고장 나거나 하면 저는 그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요. 처음엔 “네-네- 후배님” 하던 그 호칭이 이제는 “가스나야, 또 뭐?” 라며 대꾸하는 친밀한 표현으로 바뀌었고, 저는 선배의 그 수고와 마음을 받고 나면 종종 맛난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보답하곤 해요.


 우리 마을은요. ‘이 사람의 도움을 내가 이만큼 받았으니 내가 또 이만큼 줘야 해’라는 Give&Take 식의 교환적 관계로 움직이지 않아요. 새로운 누군가가 오면 그 사람이 잘 자리 잡을 수 있게 마음으로 또 눈빛으로 응원해주는 문화가 있어요. 그 문화를 1세대의 귀농 선배들이 잘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이런 문화가 있어서 저는 매우 감사해요. 누군가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면 기꺼이 도우려고 애쓰는 마을의 문화가 있어 내가 그걸 누릴 수 있었고, 그걸 받았던 나도 또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웃들과 나누려고 하니까요. 그런 일화는 정말 많은데요. 새롭게 마을에 들어와 사는 청년들을 위해 마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아 최저생계비를 지원해주는 ‘청년 활력 기금’도 그렇고, 얼마 전 화재로 집이 전소된 할머니 댁에  긴급지원을 했던 것도 그렇죠. 또 마을의 한 장애인 분이 거동이 불편 졌다는 소식에 이웃 5명이 모여 긴급회의라는 것을 했다더라고요. 마을 이웃들의 노화나 건강악화로 인해 상황이 이렇게 변하면 마을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책회의를 했다는데, 이런 노력의 주축이 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이뻤고, 또 따뜻했어요. 서로를 도우려 애쓰는 이런 모습 참 아름답지 않나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저는 이 마을에서 쭉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혹여나 내가 일찍 세상을 뜬다고 해도, 이웃들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주며 응원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렇게 선의를 서로 잘 보여줄 수 있는 삶, 그것이 시골살이의 장점인 것 같아요. 같은 이유로 인간관계의 적정거리와 사생활 보장이 안되어서 불편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서울에 비해 다소 더디게 발달하는 인식 부분도 있지요. (시골살이에 대해 너무 환상만 가지실까 봐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럼에도 저는 이렇게 이 곳에서 누리는 것을 더 크고 중하게 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마운 이웃들에게 맛난 음식으로 보답한다는 그녀의 솜씨. 무검산방에 묵으려면 살쪄서 나올 각오는 해야한다. ^^


약점을 드러내어도 괜찮은 관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말씀드렸듯이 제가 이곳 산내에 내려와 살면서 누린 것이 참 많지만, 정말 행복했던 순간을 꼽는다면요. 뱀사골 계곡에서의 물놀이 시간이에요. 그 학교 선배가 여름이면 뱀사골에서 살다시피 하길래 하루는 제가 “나도 가고 싶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며칠 후 내가 가보면 좋아할 만한 장소를 찾았다며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때부터 여름이면 두어 번씩 물놀이를 다녀와요. 휠체어 타고 계곡 물놀이를 어떻게 가냐고요? 우선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 물가에 이르면요, 이웃 4분이 저를 휠체어 앉힌 채로 입수를 시켜 제 허리 높이 이상의 물 깊은 곳으로 넣어줘요. 그러면 저는 구명조끼와 튜브를 끼고 물에 둥둥 떠서는 “아~ 좋아~ 좋아~”를 외치며 신이 나요. 물놀이도, 그렇게 저를 도와주는 관계도, 너무 힘이 되고 행복해서 절로 탄성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고, 또 그 사람이 내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손을 잡아주는 이런 ‘마음을 내어주는 관계’가 있어야 지역에서 장애인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언제 어디든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매끈한 도로와 출입로, 통로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잖아요. 지금은 공공시설이면 어디든 장애인 화장실을 갖추어 놓았듯 어느 정도까지는 제도적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그 이상은 관계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제도도 관계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지 어느 한쪽도 등한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본인의 약한 구석을 드러내어도 괜찮고, 그 약함과 같이 살아내는 이 모습이 존중받는 것, 모두에게 필요한 삶이잖아요.   

 

인터뷰를 마치고 이 손도자기 작품들을 보니 최은주님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정형화되지 않아도 괜찮아'를 보여주는 삶


정상 vs 비정상이라는 틀, 그 틀에 맞추기보다는 ‘내 삶의 지향점’을 찾아보세요.

 

최근 저는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들이 ‘정상’이라는 틀을 정해놓고 다들 너무 애쓰고 있지  아닌가? 하는요. 마치 정답을 정해놓고, 그 답이 아니면 ‘비정상’이라고 규정해 버리고, 그것을 불편해하는 마음을 쉽게 갖는 거요. ‘이 부분은 잘못되었고 틀렸고 미흡하니 고치고 보완해야 된다.’는 불편감을 자주 갖는 것 자체가 너무 내가 한쪽(정상)에만 비중을 두고 그 외의 부분은 비정상이라고 규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인생의 두 번째 라운드를 준비하며 이렇게 지역과 사람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있는 프로젝트 올라운드팀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은 것은 ‘나의 삶의 지향점이 무엇인가’를 짚어보는 작업이에요. 자기 나이를 기준으로 앞으로 삶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몇 년 정도 남았고, 그럼 그 시간들을 무엇으로  채울 것이냐를 생각해 보는 거죠. 그러면 내가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을 선택하느라, 내가 지금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많은 것을 놓을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것이 보일 거예요. 그렇게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들여다보고 나면 욕망과 욕구도 구별할 수 있게 돼요. 욕망은 타인에 의해 계속 자극받고 또 그것을 채우는 데 한계점이라는 게 없지만, 욕구는 내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서 그것을 충족시키는 데는 대부분 큰 재원이 들지 않거든요.


 그런 과정을 통해 선택한 지금의 제 삶이 저는 몹시 맘에 들어요. 휠체어 탄 52살의 최은주가 스스로 흡족해요. 마음대로 그림 그리고 흙 만지며 도자기 작품을 만들고, 마음 편히 가족들과 지내며 지인도 초대해 재울 수 있는 집이 있고, 마당에서 훤히 보이는 지리산의 풍광도 누리는 삶이지요. 그런데 지금의 내 모습은 아주 치밀한 계획과 치열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에요. 말씀드렸던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계속 던져보고, 타이밍이 왔을 딱 선택을 했던 것, 그게 전환점이었죠. 10여년전 마흔살의 내가 서울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며 이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겠어요? 그저 너무 쫓겨 살지 않고, 내 집 마당에 텃밭 가꾸며 동네 아줌마들과 친구 되어 놀멍 쉬멍 사는 정도를 상상했었어요. 그런데 친구 소개로 도자기를 배웠고, 그림도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어 그림을 그렸어요. 저는 이런 삶이 이곳에 오면서 시간이 많아졌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욕구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어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또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는 계기와 사람을 찾아서 제 곁에 두면서 연결하고 확장해서 현재의 모습이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저는 다른 분께도 그래서 이런 삶과 이를 누리기 위한 변화를 꼭 시도해 보라고 권하고 싶어요.

무검산방의 전경, 그리고 마당에서 보이는 지리산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체하고, 내가 가진 요만한 것을 타인 앞에서는 이따만하게 보여주어야 마음이 놓이는 우리의 모습... 그 생활이 고단하다 느껴질 무렵에 찾았던 무검산방이었나 보다. 여느 게스트하우스보다 화려하지도 편리하지도 않은 환경이었고, 그저 한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방 한켠에서 머무는 며칠이었는데 그 시간들이 내겐 참 편안했다. 최은주님이 만들어주는 맛난 음식을 함께 먹으며 그 날의 일정을 공유하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시간들이 좋았다. 신기하게도 이 분이 내려준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나면 , 오랫동안 꺼내지 못했던 마음속 질문들이 툭 하고 튀어나왔고, 그럼 그는 또 성심성의껏 그 답 찾기를 도와주었었다. 사회에서는 고민이 있다고 터놓기에는 다소 많아 보였던 사십 대 후반이라는 내 나이가 이 분 앞에서는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약점을 드러내도 괜찮다는 그분의 눈빛과 몸짓이 그저 분위기로 나를 감싸 안았던 것 같다. 그 며칠을 회고하고 나니, 이 집 이름의 의미가 새롭게 내 가슴에 와닿는다. 세상에서 휘두르던 검을 가지고 오지 않아도, 아니 그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그저 편히 머무를 수 있는 곳, 그곳은 진정한 무검산방(無劍山房)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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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by 함성
사진 by 올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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