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릿터』 28
흔들리는 것은 불안하고 모르는 것은 혼란스럽다. 그래서 뭐든 붙잡아 고정시키려 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별종(queer)으로 취급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 구겨 넣으려 한다. 미지수는 용납되지 않고 풀리지 않는 방정식은 있을 수 없다. 정체성은 그렇게 탄생한다. '나'를 미지수라는 혼돈 속에서 건져 내기 위한 몸부림의 결과물.
이때 정체성(identity)은 동일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다른 것은 배제되고 같은 것만 동원된다. 그러므로 정체성 주변은 언제나 찌꺼기들로 지저분하다. 미처 호명되거나 소거되지 못한 것들로. 그리고 이것들은 늘 그늘 아래 사각지대에서 어떻게든 자생한다. 어떤 순간을 기다리면서.
시스젠더 헤테로가 대다수인 세상에서 트랜스젠더와 호모섹슈얼은 비정상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게이들은 그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집단을 열망한다. 거기에서 서로의 '같은' 부분을 확인하고 위로받고 안심한다. 그러나 세상은 헤테로와 호모로만 나뉘지 않는다. 가령 바이섹슈얼이나 에이섹슈얼은 어떤가. '퀴어'라는 명칭 속에 이들도 게이들과 함께 소속될 수 있나, 진정?
이쪽에서는 너희가 총기 난사를 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성소수자냐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저쪽에서는 안 하고 사는 게 무슨 대수라고 특별한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며 눈총을 받는 사람들. (164쪽)
단편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은 게이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퀴어 세계 속에서 타자로 밀려난 저 사람들에 대해 쓴다. 그러니까 소수 속의 소수, 타자들의 타자로 이중 소외되는 이들. 게이 정체성에도 완전히 수렴될 수 없고 이성애자 시스템에서도 계속 겉도는 사람들, 그래서 "어딘가 모자란 사람으로 취급받는 게 익숙한"(164쪽) 사람들, 어느 쪽에서도 제대로 호명되지 못해서 오해와 왜곡 속에서 반쯤 구겨진 채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다.
큰 곳이건 작은 곳이건 어느 테두리에 들어가도 끝내 완전히 포섭되지 못하고 밀려나는 무언가가 있다. 경계선 근처를 맴돌며 여기저기 부유하는 무언가. 이것들은 아직 언어화되지 못해서 으레 오인받는다. 제대로 호명될 수 없어서 늘 취약하고 결여된 채로 여기서도 저기서도 누락되고 만다.
그런 것들에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도리어 복잡해서 피하거나 이상해서 이해하길 거부하거나 그저 "제대로 된" 어떤 상태에 도달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들은 외롭다. 공통된 무언가를 완전하게 공유할 수 없어서 온전히 위로받을 수 없도, 있는 그대로 수용될 수도 없는 탓이다. 더 고립된 채로 더 외로워진다. 일명 "소수자"들 속에서도 실수와 과오는 반복된다. 동일성을 동력으로 삼는 정체성을 고집하는 한 부스러기는 언제나 주변에 남아 흩어지기 때문이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의 화자 윤범은 저 실수가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커밍아웃한 게이이자 소설가인 그는 게이 인권 단체 내 책 모임에서 만난 주호를 당연히 게이라 여겼고 그가 무성애자로 정체화했을 때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범은 주호가 에이섹슈얼 여성인 인주와 연애 중이라 말했을 때 충격을 받고 그와 거리를 두었다. 소설은 윤범이 주호의 끈질긴 초대에 인주와 동거하고 있는 그의 집에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도착했을 때 정작 집주인은 없고 인주만이 그를 맞이한다. 급하게 당근마켓에 올라온 고급 캠핑 용품을 사러 간 주호를 기다리며 윤범과 인주는 제법 긴 시간 어색한 대화를 나눈다. 소설은 윤범과 인주가 주호를 기다릴 때 했던 말들을 따라간다. 여기서 윤범은 주호와 자신에 대해 몰랐던, 어쩌면 그 대화가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몰랐고, 어쩌면 계속 모를 수도 있었"(172쪽)던 어떤 사실들과 실수라 부를 수 없는 잘못들을 깨닫는다. 가령 베란다를 테라스로 오인하는 것과 같은.
근데 이건 테라스가 아니고 베란다예요.
네?
아까 테라스라고 하셨잖아요. 테라스는 1층에서 확장된 공간을 말하거든요. 여기는 4층이고 또 천장이 없으니까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인 거죠. 베란다는 위층과 아래층 면적이 달라서 생기는 공간이거든요. 또 하나 헷갈리는 게 발코니인데, 그건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돌출 공간이고요. 사람들이 이 셋이 엄연히 다른 건데도 자꾸 퉁쳐서 말하죠. (159쪽)
집에 새로 생긴 공간을 보여주면서 인주는 윤범에게 이곳이 테라스가 아니라 베란다라고 고쳐준다. 그러면서 테라스, 베란다, 발코니라는 분명 각기 다른 공간을 사람들이 구분하지 않고 "퉁친다"라고 지적한다. 마치 윤범이 주호를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게이로 여겼듯이, 마치 "성소수자"라고 하면 무의식적으로 "동성애자"일 거라고 생각하듯이.
그러나 저 인주의 말에서 알 수 있듯 테라스와 베란다는 엄연히 다르다. "성소수자"라는 말속에는 거기에 수렴되지 않는, 혹은 될 수 없는 많은 얼굴과 복잡한 상황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 모든 걸 편의상의 이유로 한 단어에 귀속시키는 것은 폭력이다. 규정된 단어가 껄끄럽고 부대낄 때, 뭔가 부족한데 그게 뭔지 정확히 말할 수 없을 때, 그걸 구구절절 말하면 이상한 사람이 될 때, 이미 폭력은 실재한다. 완벽하게 포개지는 것은 없다. 뭐든 삐져나오고 차마 뭉뚱그릴 수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들을 잘라내고 단정하게 마름질하는 것은 분명 폭력이다.
그러니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정체성이라 부르는 것,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우리"의 모양을 더 크고 넓고 말랑말랑한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유연함이 필요하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래서 발화되지 못한 것들조차 그 상태 그대로 포용될 수 있도록. 쪼개지거나 구겨지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이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도록. 차별이나 멸시 없이. 그래서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에서 인주는 윤범에게 말한다. 쓰면 좋겠다고, "우리"에 대해 쓰면 좋겠다고 부탁한다.
아니요, 윤범 씨 제가 말씀드린 건 우리요. 저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에 대해서요. 오늘 윤범 씨가 왔잖아요. 여기 이 베란다에 저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윤범 씨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게 제 얘기예요. 우리 얘기지. 안 그런가요? (169쪽)
우리는 모두 "우리"를 갈구한다. 비록 반쯤 다리를 걸쳐 있더라도 '너'라는 단수로 소환되기보다 '우리'라는 복수 속에 들어가고 싶다. 어정쩡하게 걸려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그 상태 그대로를 "우리"로 받아들여 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니까. '나'로 서기 위해서는 '너'의 부름이 필요하니까. '나'와 '너'가 여기에 함께 있는 것이 곧 우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