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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Feb 04. 2022

보고 싶은 외할머니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다. 할머니는 요양원 침대에서 낙상 때 얻은 고관절 골절로 인해 오랫동안 불편해하셨다고 했다. 미국에서 공부로 매진하던 나는 미국 비자를 갱신하기 위해 입국했던 그때,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뵌 지 이미 7년이 지나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할머니는 정정하셨고, 중년의 체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계셨었다. 하지만, 엄마가 보내온 사진 속 할머니는 못 알아볼 정도로 말라 있었다. 낙상 이후 입맛을 잃고 밥을 잘 못 드셔서 살이 무척 빠졌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 바쁜 농번기가 되면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자주 데려다 키우셨다. 할머니도 농번기 때에는 남의 밭일, 논일로 바쁘셔서, 아궁이에 뗄 나무를 하러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던 큰 외삼촌을 졸졸 따라다녔기는 했지만, 나의 주 보호자는 외할머니였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도시로 이사를 가셨다. 시골에서 남의 밭일, 논일이  남내를 키워내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여성에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기골이 장대했던 할머니는 목소리가 우렁차고, 성격이 대찼다. 자식이 많은 할머니의  벌이는 쉽지 않았다. 다방 산업이 한창일 70, 80년대에 다방 레지들의 빨래를 걷어다 대여섯 집이 모여사는 1 다세대 주택의 공동 빨래터에서 하루 종일 빨래를 해내고, 이끝에서  끝까지 빨래를 널고 개어 배달하는 일로 생계를 이어가셨다. 그래도 할머니는  번도 풀이 죽어 있는 법이 없으셨다. 그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고, 당신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지금으로 치면, 스타트 업의 여성 경영인으로서 걸어 다니는 빨래방의 주인이자 기계였던 셈이다.


일렬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가구 집들 맨 가운데 위치한 공동 빨래터에는 할머니의 일거리가 쓰레기장 쓰레기 더미처럼 높이 쌓여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자극적인 형형 색색의 빨강, 노랑, 파랑 속옷, 겉옷 빨래 거리를 보며 생각했다.


‘대체 저 많은 빨래를 어떻게 하루 만에 가능할까?’


하지만, 할머니는  많은 빨래를 하루 만에 끝내셨고, 그다음 날은 다림질과 빨래 개기, 빨래 배달로 일과를 보내셨다. 할머니는 그렇게 빨래 사업(?)을 하셨다.


바쁜 할머니는 이미 초등학생이 된 내가 방학에 놀러 가면 소금, 설탕, 식초, 고춧가루, 참기름을 넣은 무생채를 해주셨다. 오랜 빨래로 이미 뭉툭해진 할머니는 손으로 듬성듬성 무를 썰었다. 할머니의 손 무채는 채칼로 썰은 무채보다 더 아삭거리고 맛이 있었다. 그게 그때는 무슨 음식인지 잘 몰랐다. 서른에서 마흔으로 넘어갈 때쯤, 아주 우연히 할머니의 맛을 재연해 내고, ‘유레카!’를 외쳤었다. 그리고 눈물이 날뻔했다. 그때부터 할머니가 그리울 때면 손으로 듬성듬성 썰은 무채를 해 먹는다.  


외할머니는 내가 미국에서 영주권 수속을 하고 있을 즈음 돌아가셨다. 회사와 서류에 발이 묶여 할머니의 장례식에 올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나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리고 3개월 후, 한국 입국을 앞둔 일주일 전,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많이 울적했지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눈물이 별로 없기에… 할머니의 부고 소식을 듣고 눈물이 나지 않는 나 자신도 싫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자 갱신 이후, 8년 만에 입국을 하고 할머니의 납골당을 찾았다. 충남 보령군 어느 깊은 산중 언덕에 자리한 납골당은 흰색 페인트가 회색인가 싶을 정도로 얼룩져 조금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반짝거리는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가 이끄는 대로 할머니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옆으로 넓게 이어진 납골당 건물은 입구가 여러 개였다. 엄마는 중간 정도에 있는 입구로 들어섰다. 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또 작은 입구가 있었다. 자연 채광인지 형광등 조명인지, ‘낮인데 왜 이렇게 어두울까?’라는 생각과 함께 내 눈에 들어온 납골 칸들의 모습은 내 예상을 깨버렸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투명하고 앙증맞은 작은 유리문 안쪽으로 곡선을 자랑하는 하얗고 반짝이는 예쁜 도자기가 보이는 그런 그림을 상상했는데 아니었다.  어두 침침한 조명 아래, 나무 합판으로 만들어진 개인 사물함 크기의 납골 칸들은 중앙에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복도를 두고 천장에서 바닥까지  높이로 빼곡히 놓여 있었다. 찜질방 입구에서나 봤을법한 작은 신발장 만한 크기의 골분함들은 이름도 쓰여있지 않아서  앞에 사진이 없으면 누구의 것인지 알아볼  없었다.


엄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며, 철없는 생각 했다. ‘나가고 싶다. 이미 돌아가셔서 얼굴도   없고, 손도 잡을  없는데 내가 여기 온들 무슨 이득이 있을까?’ 기분이 언짢았다.  발작을  걷다가 엄마는 어느 지점에 멈추어 서서 말했다.


“울 엄마, 잘 계셨어?”


엄마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이 붙어 있었다. 뽀글 파마를 하고 분홍색 한복을 입은 할머니는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가 마지막에 보내준 깡마른 할머니의 모습과 다른, 내가 알고 있던 할머니 모습이었다. 할머니 사진을 보는 순간,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순간 다른 누군가가  안에 들어와 일부러 울게 만든 것만 같았다.


이제  이상 살아 있는 할머니를   없다는 생각, 기골이 장대한 할머니였는데 저렇게 작은 신발장 사물 함안에 갇혀 버렸다는 생각, 예쁘지도 반짝거리지도 않은 어두침침한 곳에 계시다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와 어울리지 않게 서럽게 울어버렸다. 예상치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내가 할머니 사진만 보고도 왈칵 눈물을 쏟아 내다니엄마, 아빠도 놀란 눈치였다. 난감해하는 가족들을 등지고 남편의 가슴팍에 묻혀 한참을 울었다.


아무래도 내가 아니라, 생전에 할머니가 내가 많이 보고 싶으셨는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7년을 못 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때는 할머니가 그렇게 빨리 돌아가실지 몰랐다.


2008년 겨울, 할머니가 혼자 사는 집은 자가도 전세도 아닌 월세였다. 육 남매를 키워냈지만, 누구 하나 시원스럽게 할머니를 건사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번은 엄마에게 핀잔을 줬지만, 할머니 자신이 싫어하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밑천 하나 없는 사람이   같은 작은 할머니의 보금자리는 노란색 얇은 싸구려 장판 밑으로 시멘트대충 발라 평평한 곳을 찾는  쉽지 않은 그런 곳이었다. 할머니는 작은  안에서 의미 없이 흘러나오는 TV 소리를 들으며 오래간만에  내가 어색해 눈을  마주하지 못하셨다.


그때만 해도  거동을 하셨지만, 성한 이가 하나도 없어 틀니를 끼고 계셨던 할머니는 밥을   셨다. 그래서 엄마 대신 신혼초  치트키였던 연어 고추장찌개를 해드리겠다고 소매를 걷어 부쳤다. 미국에서는 흔히 보던 연어를 생각했지만, 시골 마트에 진열된 연어는 멀리  건너오신 귀한 몸이셨다. 귀하신 살코기는 너무 비싸서 사지를 못하고 연어 머리만 사서 찌개를 해드렸다. 어두육미라지만,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생선 머리만 사는 심정은 쓸쓸했다. 이가 성치 않았던 할머니는 연어 머리에 붙은 살코기 조금을 떼어 하얀 쌀밥 위에 얼큰한 국물과 냄비 바닥에 아주  익은 무조각과 함께 박박 비벼 드셨다.  모습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잊히지 않을  같다. 그게 나에게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조금 비쌌어도 살코기를  덩이 사서 찌개 속에 넣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는  이상 연어 고추장찌개는 해먹지를 않는다. 머리 대신 살코기를 드시게  드렸어야 하는 후회가 마음을 후벼 파기 때문이다.


장수 집안의 친가 쪽의 기준에서 보면  외할머니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여든에 돌아가셨는데 조금  사실  있으셨다. 자식들, 손주들 건사하시느라 많이 지치셨나 보다.


제2 당뇨가 있으셨고, 살집이 많아 몸이 무거우셨던 할머니는 완벽한 은퇴 후, 작은 방 안에서 거동을 하시다가 결국 요양원으로 가셨다. 침대에서 낙상 후, 고관절 골절 이후, 제대로 회복을 못하시고 숨을 거두신 것이었다.


“나 올 때까지 삼 개월만 더 기다리지, 왜 그렇게 빨리 돌아가셨대?!”

라며 엄마에게 핀잔하듯 물었지만, 시원한 정답이 없는 질문이었다.


매년 할머니의 기일이 되면, 생생한 할머니의 기억이 다시 할머니와 나를 이어준다.

보고 싶다. 우리 외할머니…

‘아이씨, 또 눈물이 나려고 하네…’

내일은 무생채나 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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