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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꽃이 지던 자리, 뤼순형무소 대련(3편)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길을 따라 걷다

by 닐바나
뤼순이라는 이름 앞에서


뤼순이라는 지역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한자로는 旅順, 우리식으로는 ‘여순’이라 읽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교과서에서 접했던 안중근 의사께서 순국하신 여순형무소가 있는 곳입니다. 사실 뤼순은 지리적으로 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죠.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거리만큼이나 멀고도 아득한 장소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처음으로 뤼순이라는 이름을 가까이에서 마주했던 건 2018년의 일이었습니다. 출장으로 다롄을 방문했을 당시였죠. 그때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업무에 밀려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작년부터 제 나름의 프로젝트를 하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출장으로만 스쳐간 도시들을, 이제는 천천히 다시 돌아보자.’ 그렇게 다시 찾은 다롄, 그리고 가장 먼저 방문 목록에 올린 곳이 바로 뤼순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뤼순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마지막을 되짚는 여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이 조용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어쩌면 제게 주어진 작은 숙명이 아닐까 생각하며 조용히 길을 나섰습니다.


뤼순 형무소


뤼순역과 뤼순형무소를 이어주는 버스, 대중교통으로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뤼순은 대련 시내에서 약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지하철 12호선이나 시내버스를 이용하면 되며, 부모님이나 자녀와 함께라면 디디츄싱(중국판 택시 앱)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차로는 40~50분이면 도착합니다.


뤼순형무소 전경과 옥사 입구

이곳에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두 곳의 유적지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뤼순형무소와 일본 관동군 지방법원입니다. 저는 그중 먼저 뤼순형무소를 찾았습니다. 입장료는 따로 없고, 여권을 제시한 뒤 손으로 방명록을 작성하면 입장할 수 있습니다. 관람객 대부분은 중국인이었지만, 낯익은 한글도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 심지어 북한 국적의 방문객도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남과 북을 떠나 한 사람을 향한 존경심이 공통으로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검신실

입구를 지나 처음 마주한 곳은 검신실이었습니다. 수감자들이 매일 공장으로 부역하러 나가기 전, 몸수색을 받던 장소입니다. 안중근 의사께서도 이곳을 지나셨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이어지는 감방들, 7~8평 남짓한 공간에 수감자들을 가득 밀어 넣었던 그 자리는 차디찬 콘크리트의 침묵으로 가득했습니다. 감옥 규칙은 한·중·일 세 나라의 언어로 적혀 있었습니다.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항일 운동가들이 이곳에 다수 수감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부에는 화장실조차 없어, 당시 일본군이 독립운동가들을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대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감방의 내부


안중근 의사의 독방과 동양평화론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 당시에도 외신들도 관심을 갖은 큰 사건이어서 안중근 의사는 독방에 따로 수감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은 안중근 의사의 독방이었습니다. 입구에는 “조선 애국지사 안중근 감방”이라는 소개문이 붙어 있었고, 그분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한 안내문이 함께 놓여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작은 책상 하나와 침대가 놓여 있었고, 그 책상 위에서 안 의사께서는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셨습니다. 그가 꿈꾼 평화는 조선의 독립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주의로 고통받던 중국, 그리고 그 야욕의 중심에 있었던 일본까지 포용하는, 아시아 전체의 평화를 위한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법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안 의사께서는 동양평화론을 끝까지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동양평화론을 집필한 감방 내부

사형 선고를 받은 뒤에도 그는 항소하지 않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할 시간을 허락해 달라”라고 재판부에 요청했고, 판사 역시 이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를 더 오래 살려둘 경우 한반도 내부의 항일 여론과 세계적인 동정 여론이 고조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었고, 결국 사형 언도 후 불과 40여 일 만인 1910년 3월 26일, 뤼순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동양평화론은 끝내 미완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상의 깊이는 지금 다시 돌아보아도 놀랍습니다. 안 의사께서 제안한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자유주의 국제정치이론에서 말하는 초국가적 협력, 국제 통합의 개념과도 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그가 주창한 사상은 현대 국제기구들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나온 진일보한 평화 철학이었고, 단순한 이상주의를 넘어 실천적 가능성을 가진 구조였습니다.


독방 설명문의 마지막 구절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습니다.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04분, 뤼순감옥 교수형장에서 영웅적으로 순국하였다.”


중국인들 또한 그를 단순한 조선의 의사로서가 아니라, 아시아의 평화를 염원한 진정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고 진 곳, 사형장
암방, 밥을 가지고 사람들을 괴롭힌 치사한 일본

안중근 의사의 독방을 지난 뒤, 형무소 안의 여러 공간들을 둘러보았습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방은 징벌과 고문의 용도로 사용된 공간이었습니다. 일본은 수감자들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식사의 양에도 차등을 두었다고 합니다. 원하는 진술을 하지 않으면 식사량을 줄여가며 압박했다고 하니,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마저 무시된 현장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습니다.


형무소 내부의 고문실 그리고 감방을 감시하기 위한 간수의 자리

고문실과 간수의 감시 창구 앞에 서자, 조국을 위해 울려 퍼졌을 수감자들의 고통과 절규가 허공을 맴도는 듯했습니다. 단상에서 쭉 늘어선 감방들을 감시하던 간수의 자리는, 이미 차가운 공간을 더욱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형장으로 향하는 길의 만개한 이름 모를 꽃들

형무소 내부를 따라 걸으며 사형장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길목에 핀 꽃들이 유독 아름다웠습니다. “이토록 고귀한 생명들이 이곳에서 피고 졌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습니다.


안중근 의사께서 최후를 맞이한 사형장 내부


사형장 안은 햇살이 들고 있었지만 공기는 싸늘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을까요. 그중에서도 안중근 의사께서도 이곳에서 마지막 순간을 의연하게 맞이하셨을 것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릿해졌습니다. 교수형을 위한 줄이 걸린 형틀, 그리고 시신을 담기 위해 바닥 아래 설치된 작은 통까지 모든 것은 고인에 대한 예우가 아닌, 오직 일본의 행정적 편의만을 위한 구조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픈 건, 그분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내가 죽은 뒤에 하얼빈 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하라


그는 죽음 앞에서도 조국과 아시아의 미래를 걱정하며, 마지막까지 품격을 잃지 않았습니다. 형이 집행된 뒤 두 동생이 시신을 인수하려 했지만, 일본은 그의 무덤이 독립운동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해 인근에 비밀리에 매장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안 의사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고, 그분은 끝내 독립된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잠들어 계십니다.


최근 한 유튜버가 그의 유해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찾아가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대련을 찾게 된다면, 저도 그곳을 찾아가 그분께 술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그날은 말없이,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을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관동법원 이야기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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