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만에 갈 수 있는 중국 속 유럽도시 이야기
오래 비행기 타기 부담스러우신가요?
멀리 유럽까지 가고 싶지만, 긴 비행 시간이 부담스러운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께 저는대련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유럽의 감성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생소할 수도 있는 도시 ‘대련’은, 알고 보면 러시아와 일본, 유럽 건축 문화가 어우러진 매우 독특한 도시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중산구 일대는 대련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곳으로, 오래된 근대 건축물과 운하가 어우러져 유럽의 분위기를 물씬 풍깁니다.
왜 중국에 유럽풍 건물이 많은지는 아래 글을 참조해주세요.
https://brunch.co.kr/@nirvana/33
‘동관지’의 옛 골목부터, 중산광장의 웅장한 건축물들, 러시아 거리의 이국적인 정취, 마지막으로 마치 베네치아에 온 듯한 동방수성까지 짧은 하루 동안 유럽 감성으로 가득 찬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이번 화에서는 중산구 중심으로 하루 동안 다녀온 여행 코스를 소개드릴게요. 잠시나마 유럽을 거닐듯한 기분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동관지, 시간 속을 거니는 골목
대련 중산구 여행의 시작은 동관지(东关街) 골목이었습니다. 이 골목은 20세기 초, 정확히는 1920~30년대 무렵 형성되기 시작한 오래된 거리입니다. 대련이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을 받아 근대 도시로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 동관지는 주민들의 삶과 상점, 여관, 상사들이 밀집해 있던 중심 골목이었지요. 오랜 시간이 흐르며 한동안 잊혀졌던 이 거리는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젊은 예술가들과 디자이너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마치 서울의 성수동처럼, 감각적인 가게와 카페, 전시 공간이 들어선 대련의 힙한 골목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습니다.
동관지를 걷다 보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201번 트램이 유유히 지나갑니다. 이 순간을 잘 포착하면, 마치 근대 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어요. 오래된 건물, 철길, 그리고 트램모두가 한 프레임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이 골목 곳곳에는 최근 설치된 트렌디한 조형물과 감각적인 벽화, 아기자기한 포토존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덕분에 요즘은 대련의 젊은이들이 중국판 인스타그램인 샤오홍슈(小红书)나 웨이보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해요. 역사와 감성이 공존하는 이 공간이, 이제는 ‘SNS 성지’로 다시 태어난 셈이죠.
중산광장, 유럽식 건축물로 둘러싸인 시간의 원형
동관지를 지나 도보로 10분쯤 걷다 보면, 갑자기 도시의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 곳을 만나게 됩니다. 넓게 트인 원형의 공간, 그리고 그 둘레를 둘러싸고 있는 고풍스러운 유럽식 건물들. 이곳은 바로 중산광장(中山广场)입니다. 중산광장은 원래 1899년, 러시아에 의해 ‘니콜라이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조성되었습니다. 이후 일본 점령기를 거치며 ‘대광장’으로 불리다가, 중국이 해방된 이후에는 중국 근대의 아버지, 쑨원(孫文)을 기리는 의미에서 중산광장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중국 곳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산로(中山路)’, ‘중산공원’, ‘중산대학교’ 등의 이름도 모두 쑨원의 호(號)인 ‘중산(中山)’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광저우의 중산대학, 상하이의 중산공원, 타이베이의 중산구, 그리고 이곳 대련의 중산구와 중산광장까지 ‘중산’이라는 이름은 쑨원을 기리는 상징처럼 중국 전역에 퍼져 있습니다.
광장의 형태는 원형이고, 직경만 해도 200미터가 넘습니다. 그 둘레에는 1900년대 초반부터 1930년대 사이에 지어진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방사형으로 둘러싸고 있는데요, 마치 한 장의 유럽식 엽서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지금도 그 건물들 중 다수는 은행, 우체국, 호텔 등으로 사용되고 있고, 중국 정부에 의해 문화재로도 보호되고 있습니다.
광장 중앙에는 잔디와 비둘기, 까치들 그리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민들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아침에는 태극권을 수련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저녁이 되면 음악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추는 ‘광장무(广场舞)’가 펼쳐지며 또 다른 장면을 연출합니다.
시간의 층위를 품고 있는 이 광장은, 단순히 ‘보기 좋은 관광지’를 넘어 대련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소였습니다.
러시아 거리, 우리가 상상하는 러시아와는 조금 다른
중산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다시 골목을 따라 이동하니 이국적인 색감이 풍기는 거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은 바로 러시아 거리(俄罗斯风情街)입니다. 이 거리는 19세기 말, 러시아가 대련을 조차지로 삼았던 시기에 조성되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이 지역을 ‘달니(Dalny)’라 부르며 항만과 철도 개발을 본격화했고, 그 과정에서 이 거리 역시 러시아풍의 건축물과 함께 형성되었지요. 지금도 거리 양 옆에는 19~20세기 유럽풍 양식이 반영된 벽돌 건물들이 남아 있어, 역사의 한 조각을 걷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러시아 거리’라는 이름에서 떠올렸던 화려한 정교회 양식, 모스크바의 동글동글한 양파 지붕, 금빛 돔 같은 화려한 장면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거리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러시아라기보다는, 조금은 익숙하지 않은유럽의 작은 도시들에 더 가까운 인상이었습니다. 거리는 생각보다 짧고, 대부분이 기념품 가게나 카페로 채워져 있어 한 바퀴 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물론 사진을 찍기 좋은 포인트는 꽤 있었고, 아기자기한 감성이 곳곳에 녹아 있었지만—상상 속 ‘러시아’를 기대하고 간 제게는 조금 덜 채워진 한 페이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 거리에는, 대련이라는 도시가 겪어온 시간의 결이 서려 있었습니다.
그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이 단지 예쁜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가진 장소임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동방수성, 짝퉁의 도시에서 만난 진짜 감성
대련 시내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였던 동방수성(东方水城)에 도착했습니다. 가장 제가 독자 분들께 추천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매번 대련에 올 때마다 가보는 곳으로, 처음에는 ‘중국이 또 어디서 뭔가를 베꼈겠지’라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런 선입견을 뒤집을 만큼, 꽤 공을 들인 공간이었습니다.
동방수성은 ‘동방의 베네치아’를 콘셉트로 조성된 인공 수로 도시입니다. 4km에 이르는 물길을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유럽풍 석조 건물 200여 채가 운하 양옆을 따라 늘어서 있고, 중세 유럽의 광장과 다리, 둥근 아치 창, 고딕풍 첨탑이 마치 영화 세트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물길은 크지 않지만 곳곳에 석조 다리와 곡선이 살아 있는 건물들이 이어져 있어서 걷는 것만으로도 유럽의 도시를 산책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이곳의 중심은 단연 곤돌라 체험입니다. 수로 위를 전기 곤돌라가 다니며 승객을 태우는데, 곤돌라 탑승은 유료이고 탑승 시간은 약 10분 남짓입니다. 저는 당연히 로맨틱하고 여유로운 풍경을 기대하며 탑승했는데, 막상 타보니 생각보다 곤돌라의 속도가 꽤 빠른 편이었습니다. 물살을 천천히 가르며 노를 젓는 대신, 엔진을 장착한 곤돌라는 분주하게 나아갔고, 기대했던 그 감성적인 분위기와는 살짝 거리가 있었습니다. 곤돌라 체험보다는 운하 주변을 걸으며 즐기는 산책이 이곳의 진짜 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수로 옆에 늘어선 카페와 음식점들이었습니다. 대부분 야외 테이블을 운영하고 있었고, 날씨가 좋을 때는 운하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커피 한 잔, 혹은 저녁 한 끼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입니다. 곤돌라가 수시로 지나가는 풍경과 석양이 어우러질 때, 그곳의 분위기는 단순한 ‘복제 공간’이 아닌 감각적 도시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낮에 보는 동방수성도 아름답지만, 밤이 되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곳곳에 조명이 들어오고 건물 외벽이 부드럽게 물들며, 운하에 반사되는 불빛들이 공간 전체를 한층 더 낭만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야경을 감상하며 산책하거나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여기가 대련인지 유럽의 작은 도시인지 혼동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낮과 밤, 두 번 모두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각각의 시간대에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분명하게 다릅니다.
물론 이곳이 진짜 베네치아는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아는 사람들에게 이곳을 소개할 때, 농담처럼 ‘짭네치아’라고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면서도, 한편으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완성도가 있습니다. 중국에는 해외 도시를 모방한 공간이 많지만, 이곳만큼은 진심을 담아 잘 만들어졌다고 느껴졌습니다. 적당히 흉내만 낸 게 아니라, 진짜로 그 분위기를 구현하고자 애쓴 흔적이 보였고, 그래서 단순한 복제 도시를 넘어 도시적 감성을 즐기는 공간으로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여행의 첫머리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유럽의 감성을 느끼고 싶지만 먼 비행이 망설여지는 분들께 이곳은 꽤 괜찮은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는 가볍게 떠나는 유럽 여행의 착각을, 잠시나마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습니다.
바다가 준 하루의 마지막 풍경
동방수성에서 나와 해안가 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지는 동강음악분수 방향이었지만, 사실 이 길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대련에 올 때마다 꼭 다시 찾게 되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풍경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이 해안길에서는 항상 갈매기들이 분주히 날아다니는 장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누군가 던진 먹이를 받기 위해 선회하며 날아드는 갈매기들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바다가 시야를 가득 채웁니다. 그 풍경은 늘 역동적이면서도, 한편으론 묘하게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이곳이 진짜 아름다워지는 시간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해가 저무는 석양 무렵입니다.
작년에 찍은 한 장의 사진 속에는 조선소의 크레인 실루엣과 함께 내려앉는 태양이 담겨 있습니다. 강철 구조물 너머로 붉게 물든 해가 스르르 가라앉던 그 순간, 공업지대의 풍경마저도 하나의 회화처럼 느껴졌습니다. 기계와 자연, 산업과 낭만이 묘하게 겹쳐지는 대련만의 일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주말, 같은 자리를 다시 찾았습니다. 날씨는 흐렸고, 바다 건너편 대련 개발구는 뿌연 운무 속에 잠겨 있었습니다. 물기 어린 하늘 아래로 갈매기들이 낮게 날았고, 수평선 위로 도시의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놀이공원 뒤편 구조물 위로 해가 걸리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 풍경은 마치 우연히 연출된 한 편의 드라마 같았습니다. 그림 같은 하늘, 흐린 바다, 그리고 짧은 붉은 빛. 그날의 대련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게 해주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동강음악분수 앞 광장은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밤이 되면 성해대교 라이트쇼처럼, 이 일대 건물들에서도 다채로운 빛의 연출이 시작됩니다. 거대한 미디어 파사드처럼 조명이 반짝이고, 바다 위로는 그 불빛이 물결치듯 퍼집니다. 분수와 빛, 음악, 바다가 어우러지는 이 장면은 마치 도시가 준비한 마지막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화려하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낯설지만 따뜻한 대련의 밤입니다.
이곳을 걷다 보면 문득, 이 도시가 보여주는 풍경의 결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낮에는 유럽풍 골목에서 산책을 하고, 저녁에는 운하에서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바닷가에서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여행. 그 모든 감정이 하루라는 시간 안에 촘촘히 녹아드는 곳, 그게 바로 지금의 대련이었습니다.
다음편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 뤼순형무소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