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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에게 더 추앙 받는 안중근 의사, 대련(4편)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이야기

by 닐바나
관동법원으로 향하는 발길


뤼순형무소 관람을 마치고 저의 발걸음은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향합니다. 이곳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던 장소로,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뤼순형무소에서 이곳까지는 걸어서 약 20분 정도 거리입니다. 길을 따라 걸으며 문득 영화 『영웅』 속 장면들이 떠오릅니다. 재판정에 당당히 선 안중근 의사의 눈빛,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던 단호한 어조. 그 모습은 단순한 피고가 아니라 조국과 민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의 위엄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용한 뤼순의 거리를 걷다 보면, 일제 강점기의 그림자가 조금씩 짙어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이 가까워질수록 마음도 무거워지지만, 그 속에서 민족의 자존과 희생의 가치를 다시금 떠올리게 됩니다.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이란?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관동주에 설치한 식민지 통치기관인 관동도독부의 사법 부문으로, 1906년경 뤼순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은 표면적으로는 민형사 사건을 다루는 법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통치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도구였습니다.


법원의 판사들은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파견된 인사들로 구성되었고, 그들이 다루는 재판의 상당수는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조선인이나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 역시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재판을 받았고, 일본 제국의 논리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며, 안 의사는 그 안에서도 자신의 신념과 조선의 독립을 당당히 외쳤습니다.

지금도 이 법정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회색빛 벽돌 건물 안에 들어서면 목재로 된 방청석과 재판정, 증언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안중근 의사가 서 있었을 그 자리를 직접 마주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울려 퍼졌을 안 의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법정에서의 그날


이곳을 방문한 첫 느낌은 마치 안중근 의사의 추모관 같았습니다. 입구에 도착하면 한국어가 가능한 조선족 직원분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 한국인 단체나 개인 관람객들이 자주 찾는 듯했고, 직원분께서는 법정까지 직접 안내를 해주시며 간략하게 법원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안내의 대부분은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내용이었으며, 모든 설명에는 한국어 해설이 함께 제공되어 이해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한국어 해설에 더불어 조선족 직원분이 설명을 더 해주신다
법정 내부와 안중근 의사 상영물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 대한 간략한 전시 구역을 지나, 오늘 여정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 안중근 의사께서 직접 재판을 받았던 법정 내부로 들어섭니다. 이곳에서는 약 10분 정도의 영상이 상영되며, 직원분이 직접 재생을 도와주시고는 퇴장하십니다. 조용해진 법정 안에서 저는 방청석에 앉아, 1910년 그날의 재판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일본인 판사들을 향해 당당히 진술하는 안중근 의사의 호연지기가 이 공간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실제 재판 당시의 사진과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앉았던 자리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유죄!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도 엉망이란 말입니까!


영화 『영웅』 속 대사가 절로 떠오릅니다. 법정 안에는 실제 안중근 의사와 동지들이 앉았던 자리가 사진과 함께 보존되어 있어,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했던 순간이 고스란히 공간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묵직한 울림이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어떤 마음이셨을지 저도 판사석을 향해 서서 잠시 묵념을 해봅니다.

실제 자리에는 앉을 수 없지만 재판정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본다
안중근 의사께 드리는 인사


그렇게 법정을 나와 안중근 의사의 영정을 모신 기념실로 들어가 봅니다. 생전에 쓰셨던 붓글씨들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손수 지으신 수의를 입으신 영정 사진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과 영정


안 의사께서는 생전에 다양한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 중 하나는:


東洋大勢思杳玄(동양대세사묘현)

有志男兒豈安眠(유지남아기안면)

和局未成猶慷慨(화국미성유강개)

政略不改眞可憐(정략불개진가련)


"암담한 동양의 대세를 생각해 보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기개 있는 남아가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구나, 게다가 아직 동양 평화의 시국을 이루지 못한 것이 더욱 개탄스럽기만 한데, 이미 야욕에 눈이 멀어 정략 즉 침략정책을 버리지 못하는 일본이 오히려 불쌍하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또 다른 유묵, 지금 국군의 정신이 되는 말입니다.


爲國獻身 軍人本分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다."


이 짧은 한 문장에 담긴 결연한 뜻이, 그가 생의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길을 대변해 주는 듯했습니다.

방명록과 장부가

방명록에 정성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퇴장을 하려는 순간, 안중근 의사께서 쓰신 '장부가(丈夫歌)'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 구절을 조용히 읊조려 봅니다.


장부가 세상에 남에 그 뜻이 크도다 때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때를 만드는구나


장부가의 한 구절을 따라 읊으며, 이토를 저격하기 전의 안중근 의사의 맘을 다시 한번 느껴봅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이야기
안중근 의사와 같은 길을 걸으신 신채호 선생

이곳에서는 안중근 의사 외에도 또 한 분의 위대한 독립운동가가 재판을 받고 수감 생활을 하셨습니다. 바로 단재 신채호 선생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강점기 조선의 정신과 역사를 지키고자 붓과 펜으로 싸우신 분이었습니다.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통해 민족의 뿌리를 되살리는 데 헌신하였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셨습니다.


1936년, 일제는 신채호 선생을 상하이에서 체포해 뤼순으로 압송하였고, 이곳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미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였던 선생은 뤼순형무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며 그해 2월 21일, 결국 옥중에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신채호 선생 역시 이곳 뤼순에서 일제의 법정에 서셨고, 사라지지 않는 민족정신의 불꽃을 남기고 떠나셨습니다. 그분들이 걸어간 길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음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


법정을 나서며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이곳을 찾는 수많은 중국인 관람객들의 진지한 표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한 나라의 영웅을, 다른 나라 사람들이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한 울림이었습니다. 중국인들조차 안중근 의사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헌신한 위인으로 기리고 있음에도, 정작 우리는 안중근이라는 이름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또 얼마나 자주 그분의 뜻을 되새기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며, 바른 역사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안중근 의사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분의 신념과 용기, 평화를 향한 외침을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닌 지금 우리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정신으로 품어야 할 것입니다.

대한국인 안중근


다음 편에서는 대련에서 갈 수 있는 북한 국경도시 이야기에 대해서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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