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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앞에서 북한을 바라보다, 대련(5편)

단동에서 바라본 북한의 실상

by 닐바나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는 어디일까요? 일본일까요? 아니면 중국일까요? 아닙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정작 갈 수는 없는 그곳. 미디어나 다큐멘터리 속에서만 접할 수 있는 가장 궁금한 땅. 그런 북한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국경 도시, 단동(丹东)입니다. 단동은 중국 랴오닝성 동남쪽, 압록강 너머에 북한 신의주가 보이는 도시에 위치해 있습니다. 대련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약 2시간 3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이지요. 이번 대련 여행의 마지막 여정으로, 이곳을 찾기로 했습니다.


최근 들어 유튜브를 통해 단동이 소개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기억에 오래 남은 영상이 하나 있었습니다. ‘레리꼬’라는 유튜버가 단동의 한 한식당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었는데요. 식당 직원이 북한 국적의 분이셨고, 유튜버의 말투를 듣고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괴뢰입니까?”


같은 말을 하지만 어투가 다른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그 잠깐의 정적과 당황스러운 공기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그 순간은 단동이 단순한 국경 도시를 넘어, 정말 북한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군사지역으로 접근이 제한되며, 실제로 북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기란 어렵습니다. 반면, 단동은 상황이 다릅니다. 국경도시인만큼 실제 북한 사람들의 왕래가 잦고, 때로는 식당이나 거리에서도 그들의 존재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어쩌면 한국보다 더 생생하게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도시일지도 모릅니다.


두 세계가 만나는 도시, 단동에서


단동역과 마오쩌둥 동상


단동역에 도착하니, 거대한 마오쩌둥 동상이 관광객인 저를 반기고 있었습니다. 첫인상은 여느 중국의 중소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쉴 새 없이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 소리, 혼란 속의 나름의 질서를 갖춘 거리 풍경은 대도시와는 또 다른 ‘날것’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또 있습니다.

한국어로 되어 있긴 하지만 뭔가 내용은 이질적이다

곳곳에 보이는 한국어 간판들. 알고 보니 이곳은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렬하게 ‘여기가 북한과 맞닿은 도시’ 임을 실감하게 해 준 간판 하나가 있었습니다.

“단동 <-> 평양, 동남운송”


순간, 대학교 시절 새터민 누나가 들려줬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온 그녀는 계절마다 한국 상품을 브랜드 라벨을 지운 채로 택배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단동에는 아마도 그런 물류를 담당하는 회사들이 여러 곳 있는 듯했습니다. 그 문구 하나로 이 도시가 단순한 국경 도시가 아니라, 실질적인 교류의 창구라는 사실이 와닿았습니다.

대부분 한국식 메뉴이나 개고기 수육처럼 이질적인 음식도 판매중이다

아침을 먹지 못했던 터라, 근처 ‘고려인 거리’로 불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조선족들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서니 반갑게도 한국어로 된 메뉴판이 저를 맞이합니다. 익숙한 메뉴들 사이, 한편에는 ‘개고기 수육’이라는 이름도 눈에 띕니다. 그중 냉면 한 그릇과 두부김치수육을 시켜 보았습니다. 맛은 한국에서 먹던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일하는 종업원들은 모두 중국인이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이질감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압록강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압록강 단교, 그리고 ‘관광’이 된 분단


중국 쪽의 압록강변은 마치 한강공원을 연상케 합니다. 강을 따라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곳곳에는 노점을 펼친 상인들이 기념품과 간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차가운 강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평온하게 거닐고, 아이들은 웃으며 뛰어놀고 있었지요. 이국적인 듯 낯설지 않은 풍경입니다. 그 길 끝에 압록강 단교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미군의 폭격으로 끊겨버린 압록강 단교와 압록강 표지석

본래는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동을 이어주던 다리였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다리의 중간이 끊겨 지금은 끝이 허공으로 향한 채 멈춰 있습니다. 현재는 입장료를 내면 끊긴 지점까지 걸어가 볼 수 있는 관광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제가 방문한 날은 보수 중이라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다리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중국 가이드들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발음을 반복하며 관광객들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챠오션, 챠오션(朝鲜, 조선)!”


그들은 작은 팜플렛을 나눠주며 북한을 ‘들어가 볼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 저려옵니다. 그들이 팔고 있는 이 ‘조선 여행 상품’이 마치 사파리 투어를 권유하듯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은 불편함을 넘어서 분노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이렇듯 ‘구경거리’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북한을 만든 건 그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인민을 도구처럼 이용해 온 김 씨 일가와 그들을 떠받드는 체제일 뿐이지요. 언젠가 그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의 모든 이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훗날 한 유튜버가 해당 여행상품을 체험한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중국 가이드들이 데려가는 장소는 실제 북한 땅이 아닌 중국 내의 특정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에 북한에서 파견된 공연단이 와서 노래를 부르고, 기념품을 판매하며 ‘북한식 체험’을 흉내 내는 일종의 쇼였습니다.


진짜 분단은 강을 경계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강을 대하는 태도와 시선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람선을 타고 바라본 북녘의 풍경
체제 선전용으로 만든 호텔과 놀이공원

단동에는 아주 특별한 관광 상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을 따라 북한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여행 상품입니다. 마치 국경을 따라 짧은 시간을 항해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배를 타고 출발하면 곧 압록강 단교 아래를 지나게 됩니다. 그리고 곧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북한 쪽의 동그란 형태의 호텔. 겉으로 보기엔 제법 웅장하지만, 영업을 하고 있는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체제 선전을 위한 과시용 건물인 듯 보였습니다. 호텔 바로 옆으로는 놀이공원도 있습니다. 대관람차가 눈에 띄지만,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풍경이 마치 시간의 흐름을 멈춰버린 듯 정지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위화도의 집들,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하다

배는 강을 따라 조금씩 북쪽으로 향해 갑니다. 어느 순간, 작은 섬 하나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지도를 켜서 확인해 보니, 바로 위화도인 것 같습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가 회군을 결심했던 그 위화도. 수백 년 전 역사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는 감회가 잠시 밀려왔습니다. 그러나 곧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섬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조차 없는 낡은 집들, 그리고 오래된 외투를 입은 사람들이 집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집들은 최소 40년은 넘은 듯했고, 그 어떤 삶의 온기나 활기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단동의 고층건물과 북한의 초라한 건물이 강을 사이로 대조적이다

분단 75년, 우리는 시간의 강을 따라 빠르게 미래로 향했지만, 그들의 시계는 그 자리에 멈춰 있는 듯했습니다. 유람선의 갑판 위에서 이 풍경을 바라보는 제 모습이 마치 사파리 차량에서 동물들을 내려다보는 관광객처럼 느껴져, 마음 한편이 몹시 무거워졌습니다.


북한 관련 기념품을 판매하는 노점들

약 30분 정도의 짧은 항해가 끝나고, 다시 단동 쪽 선착장으로 돌아왔습니다. 강가 주변에는 북한 관련 기념품을 파는 노점들이 여럿 눈에 띕니다. 총알 모양의 탱크와 비행기 장난감, 북한산 담배, 그리고 눈에 가장 크게 들어왔던 북한 지폐.


그 지폐를 보는 순간, 예전 난징에서 겪었던 작은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업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공항으로 향하던 중, 북한 억양을 쓰는 한 중년 남성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남조선 사람입네까?”


동포라며 다가온 그는 반갑다며 담배며 지폐며 이것저것 챙겨주려 했고, 마침내는 “동포끼리 돈이나 좀 교환합시다”라며 김일성 얼굴이 인쇄된 100원짜리 지폐를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제 지갑을 향하더군요. 처음에는 한국돈을 달라했지만 그의 관심은 100위안짜리 중국돈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100위안을 내줄 수는 없어 한국 돈 만 원을 건네며 사기인 걸 알면서도 당해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건네받았던 그 지폐와 똑같은 것을 오늘, 이 노점에서 다시 마주하니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더군요. 이런 아이러니한 장면들이 국경 도시 단동의 풍경 속에는 가득합니다.


한 발자국 그 너머의 나라, 호산장성과 일보과


기사님과 약속 때문에 장성을 뛰어올라 갔다 ㅠ

단동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호산장성입니다. 이곳은 과거 고구려의 박작산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나, 지금은 명나라 시대 스타일로 축조된 성벽이 남아 관광지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곳을 찾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일보과(一步跨)’, 한 걸음이면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뜻의 장소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단동 시내에서 택시를 타고 “호산장성”이라고 이야기하니, 기사님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출발시킵니다. 가는 길 내내 기사님께서 중국어로 여러 말을 건네시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후이라이(回来)”, 어렴풋이 들리는 단어 하나.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할 거냐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거리다 보니 저도 택시를 다시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고, 기사님 역시 빈차로 돌아오는 게 부담스러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고, 위챗을 주고받으며 돌아오는 조건으로 2시간 30분 기다리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성벽을 향해 빠르게 올라갑니다. 관광을 온 중국인들이 저를 다소 이상하게 쳐다보기도 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망설일 여유가 없었습니다. 성벽 위에 올라서니 압록강 너머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드넓은 논밭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트랙터 한 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왜 이곳의 이름이 ‘일보과’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습니다.


장성에서 바라보는 북한, 강폭이 좁은 곳은 2미터 정도로 보인다


강폭은 고작 2미터 남짓. 물이 얕아 보이고, 흐름도 느립니다. 겨울이면 강이 얼어붙고, 10초도 채 걸리지 않아 강을 건너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입니다. 과거 요나라나 청나라 같은 북방 민족들이 겨울철을 노려 한반도로 쳐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어쩌면 바로 이 지형 때문이었겠지요.


일보과 비석과 펜스 뒤로 보이는 북한

성벽 아래로 내려오니 ‘일보과’라는 이름이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는 철제 펜스가 길게 이어져 있었습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엔 펜스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 얕은 강을 건너 자유를 찾아 떠났고,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지금은 모든 국경이 철저히 통제되고 감시받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참을 둘러보다가 약속했던 시간이 되어 다시 택시 기사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생각보다 주변에 빈 택시들이 꽤 보여 괜히 꾐에 넘어갔나 싶기도 했지만,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빠듯하게 움직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았습니다.


그렇게 단동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대련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들이 교차합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음식을 먹는 동포들이지만, 체제의 선택 하나로 이토록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분단 75년.

우리는 빠르게 미래를 향해 달려왔지만, 그들은 아직 과거의 시계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통일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북한 사람들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길, 그저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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