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국민당, 민주주의, 타이베이 역사 기행
4월의 대만은 마치 여름의 입구에 막 도달한 듯, 뜨겁고 습한 기운으로 여행객을 맞이합니다. 타이베이에는 외국인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르게 되는 네 곳의 대표적인 명소가 있습니다. 바로 중정기념당, 국부기념관, 용산사, 그리고 타이베이 101입니다. 짧은 일정으로 인해 네 곳 모두를 다녀오진 못했지만, 그중에서도 국부기념관을 들르지 못한 것이 아쉽게 남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제가 직접 찾았던 중정기념당과, 그 공간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 장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중정기념당이란?
중정기념당은 타이완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이자, 한 시대를 지배했던 인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공간입니다. 이 기념당은 1975년 장제스 총통이 서거한 이듬해에 착공되어, 1980년 국민적 추모 속에 문을 열었습니다. '중정(中正)'은 장제스의 본명으로, 그를 기념하는 의미를 담아 명명된 것입니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제스는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는 개석이며 이는 그의 자입니다. 우리가 삼국지의 조운을 조자룡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국민당 정권은 그를 중국 대륙을 통일하려 했던 영도자이자 대만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인물로 기리고자 했고, 이 기념당은 그러한 공식 기억의 총체로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점차 갈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장제스가 남긴 업적 못지않게, 그의 권위주의 통치와 수많은 희생을 부른 백색테러의 기억도 점점 대만 사회에서 조명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2007년, 민진당 정부는 탈권위주의와 역사적 성찰을 이유로 이 기념당의 이름을 '국립 대만 민주 기념관'으로 변경하고, 입구 광장의 현판도 기존의 ‘대중지정(大中至正)’에서 ‘자유광장(自由廣場)’으로 바꾸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된 후인 2009년, 국민당 정부는 기념당의 명칭을 다시 ‘중정기념당’으로 환원시키며 장제스를 기리는 기존의 틀을 복원했습니다. 현재까지도 ‘자유광장’이라는 명칭은 남아 있지만, 건물 이름은 원래의 중정기념당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정기념당은 단순한 기념 건축물이 아니라, 대만 사회가 어떤 과거를 기억하고, 또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긴 논쟁이 응축된 공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정기념관 둘러보기
더운 날씨이긴 하지만, 여행은 항상 걷고 바라보는 것이라 믿는 저로서는 숙소에서 도보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약 30분 정도 걸어 중정기념관에 도착할 수 있어 천천히 걷기로 했지요. 아마 이때 너무 체력을 써버려 국부기념관에 가지 못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중정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에는 우리가 익숙한 중국식 성문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징푸먼(景福門)’이라 불리는 이 문은 청나라 말기 타이베이부성을 둘러싸고 있던 다섯 개 성문 중 하나라고 합니다. 고즈넉한 성문을 지나 조금 더 걷다 보면 중정기념당 내부에 위치한 국립극장이 보입니다. 중정기념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치된 국립극장과 국립음악당은 규모부터 압도적이며, 지붕은 마치 자금성의 기와를 연상케 할 만큼 장엄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대충문(大忠門)을 지나 본격적으로 중정기념당의 내부로 향했습니다.
참고로, 중정기념당은 장제스의 유해가 실제로 안치된 장소는 아닙니다. 그의 시신은 타오위안(桃園) 현의 츠후(慈湖)라는 곳에 임시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장제스는 생전에 "대륙을 수복하면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에, 그의 시신은 정식으로 매장되지 않은 채 냉동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고 합니다. 장제스의 고향은 중국 저장성 펑화(奉化)였으나, 대륙을 끝내 되찾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고, 그의 유해는 지금까지도 그 완결되지 못한 염원을 상징하듯 타이완 땅 위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그가 품었던 민족주의와 대륙 회복의 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시신조차 돌아가지 못한 현실은 어쩌면 오늘날의 대만이 겪는 정체성의 갈등과도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우선 중정기념당 내부에서는 장제스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들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가 타고 다니던 차량부터 시작해, 사용했던 집무실을 재현해 놓은 공간도 있습니다. 그곳에는 장제스의 실제 모습을 본뜬 밀랍 인형이 자리에 앉아 있어 마치 그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을 줍니다. 유물들 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하나의 훈장이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이 훈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수여한 ‘대한민국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남북으로 분단된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입장이었기에, 그 훈장은 당시 대한민국이 대만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료처럼 느껴졌습니다.
대한민국장은 독립과 건국에 기여한 외국 인사에게 수여되는 훈장으로, 장제스는 실제로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지원을 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중화민국 정부는 해방 이후에도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고, 장제스 개인 역시 한국의 반공 노선과 이승만 정부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정기념당 내부의 가장 중심에는 장제스의 좌상이 엄숙하게 놓여 있습니다. 높고 탁 트인 천장 아래, 묵직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듯한 위압감을 자아냅니다. 그 뒤편 벽면에는 세 개의 큰 한자가 나란히 새겨져 있는데, 바로 ‘윤리(倫理)’, ‘민주(民主)’, ‘과학(科學)’입니다. 이 세 단어는 장제스가 중화민국의 국가 운영 원리로 내세웠던 핵심 가치들입니다. 그는 도덕과 질서를 중시하며 국민의 자기 수양을 강조했고, 민주주의를 통해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를 추진했습니다. 동상 뒤의 이 세 단어는 장제스가 꿈꿨던 이상국가의 가치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장제스 동상의 시선을 따라 정면을 바라보면, 광장 너머로는 국립음악당과는 마주 보는 국립극장이 보입니다. 붉은 기둥과 황금색 지붕이 인상적인 이 건물들은 중정기념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며, 이곳이 단순한 기념관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문화·정치 복합 공간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광장 중앙을 가로지르는 바닥 패턴과 거대한 계단, 그리고 하늘을 향해 뻗은 푸른 지붕은 이곳이 단순한 추모 공간을 넘어 어떤 ‘질서와 상징’으로 구성되었는지를 말해주는 듯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의식 중 하나가 바로 근위병 교대식인데, 아쉽게도 제가 방문한 시간에는 타이밍이 맞지 않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격식 있는 의식이 펼쳐지는 모습을 사진으로만 봐야 했던 것이 조금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장제스는 어떤 인물인가? 출생에서 군벌로 자리 잡기까지
우리는 과연 장제스라는 인물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그의 이름은 중정기념당이라는 장소를 통해 익숙하게 들려오지만, 정작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떤 신념으로 나라를 이끌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륙의 군벌로 시작해, 중화민국의 최고 지도자, 그리고 대만으로 망명한 후에는 수십 년간 철권통치를 이어간 인물. 그는 어떤 길을 걸어왔고, 또 왜 여전히 대만 사회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걸까요? 지금부터는 중정기념당을 둘러보며 마주하게 된 그 인물, 장제스의 생애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장제스는 1887년, 중국 저장성 평화현(奉化縣) 시커우(溪口)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왕차오칭(王采靑)의 엄격한 유교적 훈육 아래 성장한 그는, 어려서부터 절제와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기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영향은 그가 훗날 금욕주의적 삶을 살고, 도덕 통치를 주장하는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큰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청소년기였던 1900년대 초, 장제스는 당시 약해진 청나라의 현실과 외세 침략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열망을 품고 일본 유학을 떠납니다. 일본에서 그는 군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고, 이 시기 쑨원(손문)의 삼민주의 사상과 혁명운동에 매료되어 반청(反淸) 혁명 세력에 가담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통해 그는 "무력으로 나라를 바로세우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됩니다.
귀국 후 장제스는 쑨원의 국민당에 깊이 관여하며 점차 핵심 인물로 성장합니다. 특히 1924년, 쑨원이 광저우에 설립한 황포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된 것이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학교는 단순한 군사교육 기관이 아니라, 장제스가 충성스러운 군 지지 기반을 확보하고 군사적 리더십을 인정받는 발판이 되었지요. 이후 쑨원이 사망한 뒤, 국민당 내부에서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권력 경쟁이 본격화되는데, 장제스는 군부를 장악한 힘을 바탕으로 국민당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당내 좌파, 특히 공산당 세력과의 긴장 관계를 점차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겉으로는 공산당과 협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국민당 우파 세력을 규합해 내부 장악에 힘을 쏟았습니다. 결국, 그는 북벌을 통한 중국 통일이라는 대의를 명분으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며, 국민당 내에서 군사력과 행정력을 모두 통제하는 인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북벌과 공산당과의 악연
쑨원의 사망 이후 국민당 내부는 혼란에 빠졌고, 각지의 군벌들은 여전히 독자적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는 국민당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도권을 잡고, 중국 통일을 목표로 한 ‘북벌(北伐)’을 개시합니다. 1926년에 시작된 이 군사 작전은 남쪽의 광저우에서 출발해, 장강 유역과 중원, 북부의 베이징까지 진격하며 군벌들을 차례로 제압해 나가는 대규모 통일 작전이었습니다. 북벌의 성공은 장제스를 단숨에 국민당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1928년 베이징에 입성하면서 명목상 중국을 통일했고,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석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 통일은 겉보기일 뿐, 실질적으로는 지방 군벌들과의 타협과 연합 위에 세워진 불안한 체제였습니다.
이 시기 장제스는 점차 공산당과의 갈등을 표면화시키기 시작합니다. 원래 국민당과 공산당은 쑨원의 ‘국공합작’ 아래 함께 협력하던 관계였지만, 장제스는 공산당의 세력 확장을 내부 위협으로 간주하고, 1927년 상하이에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합니다. 이 사건은 4·12 상하이 쿠데타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제1차 국공합작은 붕괴되고 양당의 대립은 내전으로 비화됩니다. 이후 장제스는 공산당을 지속적으로 탄압하며, 마오쩌둥을 포함한 공산당 지도부는 농촌으로 밀려나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외부로부터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입니다. 이 시기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이 우선, 일본은 나중’이라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내부 반발에 부딪히게 됩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1936년의 시안사변(西安事變)입니다. 동북의 군벌이자 장제스의 부하였던 장쉐량(張學良)은 일본과 싸우기 위해 공산당과 손잡자고 주장하지만, 장제스가 이를 거부하자 결국 그를 납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억류한 채 항일연합 전선을 요구했고, 장제스는 이를 수용하며 마오쩌둥과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뤄지게 됩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그 이후입니다. 시안사건이 마무리된 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했던 장쉐량을 용서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를 감금 상태로 대만까지 데려가 여생을 통제하며 살게 했습니다. 장쉐량은 이후 타이완에서 약 50년 넘게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고, 장제스 사망 이후에야 조금씩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 일화는 장제스라는 인물의 이면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이기도 합니다. 정치적 계산과 대의를 구분하되, 권력 앞에서의 용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는 그의 냉정한 성격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그리고 대만섬으로의 철수
1937년,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발발한 충돌은 전면적인 중일전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이미 만주사변(1931)과 상하이사변(1932) 등을 통해 침략을 확대하던 일본 제국은, 이번엔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무력으로 점령하려고 했고, 이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마침내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합니다. 시안사건 이후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시적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합니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협력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었습니다. 국민당은 정규군을 앞세워 주요 도시에서 일본군과 맞섰고, 공산당은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며 독자적인 기반을 넓혀갔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는 동안 국민당은 전쟁 피해와 물자 부족, 행정 부패 등으로 점차 민심을 잃기 시작합니다. 수도 난징이 함락되며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고, 장제스는 충칭으로 수도를 옮겨 전쟁을 이어갔지만, 전선은 넓고 자원은 한정적이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항일전쟁은 종전되었고, 장제스는 전승국의 지도자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UN 창설 회의에 참석하고, 미국·영국 등과의 연합국 협력 속에 중국의 대표 지도자로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그와 반대로 흘러갔습니다. 전쟁 동안 세력을 키운 공산당은 농촌과 민중 속에 깊이 뿌리내렸고, 이미 다음 국면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종전 직후, 장제스는 미국의 중재 아래 공산당과 다시 협상을 시도하지만, 타협은 오래가지 못했고 곧바로 2차 국공내전(1946~1949)이 시작됩니다. 초기에는 국민당이 군사력과 장비 면에서 우세를 점했지만, 장기전으로 갈수록 병력의 사기 저하, 내부 부정부패, 공산당의 민심 확보 등으로 전세는 급격히 기울게 됩니다. 특히 화이하이 전투, 랴오선 전투 등에서의 패배는 국민당에게 치명타였습니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공산당은 중국 대륙을 장악하게 됩니다. 장제스는 더 이상 대륙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약 200만 명의 국민당 엘리트, 군인, 가족들과 함께 대만으로 철수합니다. 이 철수는 단순한 패주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대륙을 수복하겠다"는 '반공복국'의 상징적인 시작이었습니다. 1949년 12월, 장제스는 타이베이를 임시 수도로 삼고, 중화민국 정부의 존속을 선언하게 됩니다. 그의 대만행은 한 편의 역사에서 퇴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통치 시기의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장제스는 대륙의 패권을 내려놓는 대신, 작은 섬에서의 절대 권력자가 되어, 또 한 번의 긴 시대를 열게 됩니다.
대만총통으로서의 장제스와 역사적인 평가
1949년, 중국 대륙을 떠나 대만에 도착한 장제스는 패배한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전쟁의 폐허 위에서 새로운 체제를 세워야 하는 국가의 유일한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타이베이를 임시 수도로 삼고, 여전히 자신이 ‘중화민국의 정통 정부’를 이끌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대륙을 수복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하며, 장제스는 대만에서 절대 권위와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지도자로 다시 자리매김합니다. 대만에 들어선 직후 그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일당 통치 체제를 확립합니다. 국민당은 정치, 언론, 교육, 군대를 완전히 장악했고,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어 탄압받았습니다. 수만 명이 정치범으로 체포되고, 고문과 처형이 이어졌던 이 시기를 대만 현대사는 ‘백색테러’라 부릅니다. 그의 통치는 철저한 반공 이념과 질서 유지에 기반을 두었고, 권력의 정당성은 ‘국가의 안보’라는 이름 아래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권위주의 체제 안에서 대만의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합니다. 장제스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 수출 중심의 산업 기반을 다지며 경제 구조를 재편합니다. 이 시기의 대만은 교육 확대, 공공 인프라 확충, 산업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훗날 ‘대만 기적’으로 불리는 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억압과 개발이 동시에 존재했던 이 시기, 장제스는 대만을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킨 섬’으로 만들고자 했고, 그것이 실제로 일정 부분 성공한 것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1975년 4월, 여전히 대만의 총통직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전에 “고향 땅인 중국 대륙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지만, 그 염원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의 시신은 오늘날까지도 임시 안치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대만 사회에서 장제스는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인물입니다. 누군가에겐 대만을 공산주의로부터 지켜낸 ‘건국의 아버지’이며, 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은 리더입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독재자이자, 자신이 떠나온 대륙을 끝내 잊지 못했던 시대의 망령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기념관인 중정기념당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그 이름을 두고는 지금도 대만 사회 내부에서 격론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결국 장제스는 단순히 한 사람의 생애로는 정리되지 않는 인물이며, 대만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도 풀어가고 있는 ‘기억의 문제’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무리하며
짧은 일정 속에 다녀온 첫 대만 여행이었기에, 사실 많은 곳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습니다. 중정기념당 하나만 보더라도,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수많은 역사와 감정이 겹겹이 쌓인 공간이었기에, 그저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발길을 돌리기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장제스라는 한 사람을 따라가다 보면, 대만이라는 나라가 지금까지 걸어온 복잡하고도 치열한 시간들이 함께 엿보이곤 합니다. 그는 한편으론 독재자였고, 다른 한편으론 국가의 근대화를 이끈 인물이었습니다. 그 이중적 모습은 어쩌면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계에서,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언제나 단선적이지 않았으니까요.
대만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물음 앞에 잠시 서 보기만 했지만, 다음에 대만을 다시 찾는다면, 그 물음에 더 오래 머무르며 스스로의 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