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그 아내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싸구려 호텔에 가족들 몰래 방을 하나 구해요. 그리고 가끔 몇 시간씩 그 방에 혼자 머물러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방에 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면서. 그 방은 완벽하게 혼자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니까." -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지호가 세희에게 책 '19호실로 가다'를 언급하며
내 인생에는 두 번의 가출이 있었다. 첫 번째는 15살 때였고, 두 번째는 18살 때였다. 18살 때의 가출을 정확히 말하자면 독립 겸 가출인데, 내 인생은 아무래도 두 번째 가출부터 새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가출의 계기는 역시 아버지의 폭행이었다. 그날은 하교를 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버지께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두들겨졌고, 거기서 아버지가 "너 나가. 호적에서 파버릴라니까. -사실 호적에서 파는 건 불가능하다. 나도 참 많이 찾아봤는데 호적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게 한이라면 한이다- 너 같은 놈한테 돈 1원도 못쓰니까 연 끊고 나가 살아."라는 말을 하자마자 그 말을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여행용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계속 나를 말렸다. 아버지가 홧김에 하신 말씀이시라고, 아들 없이 내가 어찌 살겠냐고. 그렇게 다 커버려 어느새 어머니보다 힘이 세진 아들의 손을 붙잡으시고 짐을 싸는 나의 뒤로 여기저기 끌려다니시며 애원하셨지만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나가야 해요. 난 여기서 나가야만 해요" 같은 말을 반복하며 계속 짐을 쌌다.
뭐 별다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고, 단지 다시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각오만 하고 감행했던 가출이었다. 하지만 내 나이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거니와 이 나이로는 아직 사회에서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학교도 졸업은 해야 했고! 그래서 어머니께 부탁드렸다. '학교 근처에 방 하나 잡아서 혼자 살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는 일절 연락을 하지 않으려고 하니 그렇게 하게 해 달라' 고.
어머니께서 내 부탁을 그렇게 단번에 들어주신 적은 처음이었다. 소중한 아들을 남들보다 이른 나이에 안 좋은 일로 독립을 시키게 되는 어머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아직도 간혹 가다 그때의 마음을 느껴보고자 노력은 해보지만 내 주제에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2013년 12월 중순 즈음, 18살의 나이로 고시원에서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진이 다 이런 것밖에 없는 이유는 넓은 사진 찍을 구도가 안 나올 정도로 좁기 때문!
고시원은 학교 근처의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며 가장 깔끔해 보이는 곳으로 잡았다. 월세는 50만 원, 보증금은 10만 원 -드럽게 비싸다-. 창문은 없었지만 방 안에 화장실도 있는 1.5평 남짓의 작은 방이었다. 학교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 되는 거리에 있었기에 등하교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화장실은 좁아서 변기에 앉아 샤워를 해야 했고, 창문이 없어 환기가 되질 않아 환기를 하려고 치면 방문을 열어두어야 했으며 방이 내 키보다 작아 올곧게 누울 수도 없었던, 아는 게 많아 불편해진 것도 많아져버린 지금에야 와서 보니 사람이 편히 살 곳이 아녔지만 '내 인생 첫 나만의 공간'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나의 고시원은 어떠한 불편사항도 다 이겨낼 수 있는 무적의 방이었다.
나는 1.5평 남짓한 그 공간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먹고 싶은 메뉴가 생기면 나가서 사와 냄새 풀풀 풍기며 먹어도 되고, 실컷 방귀를 뀌며 볼일을 보아도 되었다. 잠이 들 때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려도 되고 누군가가 내가 자고 있나 감시를 하진 않을까 싶어 긴장하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나에게 누가 행복하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 있었겠는가! 인생 첫 자유라는 것을 만끽한 18세 소년은 25살이 된 지금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꺼내 먹고 살아가는데.
집이었으면 못할 것들을 다 해보며 살았다. 새벽에 나가서 산책을 하고 온다거나, 피자를 시켜 나 혼자 먹는다던가. 콜라 안에 멘토스를 넣어 보는 장난을 해본다던가!
다만 학우들에게는 딱히 내가 고시원에서 독립생활을 하는 사실을 알리진 않았다. 원체 학교 생활을 잘하지 않아 이런 걸 말할 친구도 없었거니와,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뭐 좋은 일이라고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겠는가! 그렇게 약 3개월가량은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감추고 지내다가, 학교에 내가 고시원에 산다는 것이 만 천하에 알려지는 일이 생겼다. 친하지는 않았던 같은 반 여학우가 나와 같은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던 것이었다! -무슨 사정때문에 혼자 지내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별로 친하질 않아서..-
그렇게 반에 이야기가 퍼진 것을 기점으로 온 학교에 내가 고시원에서 산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뻔하지. '나의 302호'는 금방 '우리의 302호'로 변해버렸다.
고시원에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다. 하교한 친구들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모여 노는 장소가 되기도 하고, 친하지 않았던 학우가 성적을 망친 후 혼날 게 두려워 피신처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에는 지방에서 서울로 출장 온 지인들이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찾아오기도 했다. 그렇게 내 방은 자연스레 다양한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그 작은 고시원에서 우리는 우정을 싹틔우기도, 발전시키기도. 친하지 않아 잘 몰랐던 서로를 알아가기도 했다. 누군가는 침대에 앉아, 누군가는 바닥에 앉아 '온전한 휴식'을 취하면서 웃으며, 울며 지냈다.
작은 방에서 참 알차게 잘들 놀았다.
간혹 나의 사랑방을 찾아와 주었던 당신들에게 '302호'는 무슨 의미였을까 궁금해져 시간이 좀 지난 요즈음 혹자들에게 그때의 기억을 되물으면 좁은 방으로 인해 불편했을 법도 한데 누구도 불편했던 기색은 내지 않는다. 오히려 행복했던 추억의 하나로 남아있다고 해주곤 한다.
추후에 연을 끊고자 일절 연락하고 있지 않았던 아버지가 고시원을 찾아내며 나만의 사랑방은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1년 남짓을 2곳의 고시원에서 지낸 후 20살이 되어 서울의 오피스텔로 이사를 하게 되며 나의 사랑스러운 고시원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도리스 레싱 작가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책이 있다. 주인공은 평범하게 결혼하여 네 아이가 있는 주부이다. 육아를 하며 본인의 삶 없이 살아오던 그녀는 육아에서 벗어날 순간을 기다리며 살았지만, 막상 육아에서 벗어나고 할 것이 없어지자 집에서 본인의 의미를 찾으려 이것저것 손대어 보게 된다. 그렇게 그녀가 답답해하자 가족은 방 하나를 따로 '엄마의 방'으로 이름 짓고 그녀의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지만, 휴식이 될 리가 없었을 터. 목이 죄여 오던 그녀는 가정부가 아이들을 맡기고 지방의 한 호텔방 19호실을 빌려 머물게 된다. 그녀는 19호실 에서 별다른 것을 하진 않는다. 그저 창가에 앉아 명상을 하며 몇 시간을 보내다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는 것뿐.
그녀에게 필요했던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어떠한 것들에게서 벗어나 그녀로서 완벽해질 수 있는 '19호실'. 방이 작던 크던 혹은 시설이 예쁘던 더럽던 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19호실은 온전히 그녀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나의 사랑방 고시원처럼.
나는 당신들이 힘들고 지쳐 위로를 해주고자 할 때 당신만의 '19호실'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당신만의 그 무언가.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당신이라는 존재 하나만으로써 완벽해질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보라고. 나에게는 '302호'가 그런 의미였으니까. 그리고 아직까지도 '302호' 덕분에 이렇게 잘 살아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받은 질의응답
Q: 넌 이렇게 좁은데 사는데 안 불편하냐? 차라리 가족이랑 화해하고 넓은 집에서 사는 게 낫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