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가족이다. 남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코로나 기간동안 꽤 오랜 휴직을 부부가 함께했기 때문에 은퇴체험을 했다는 것 정도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마스크를 쓰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 아이는 몇 달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유치원으로 돌아가 친구들과의 일상을 되찾았다. 우리 부부는 2달 후면 품으로 안길 둘째 아이를 기다리며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생각하며 낯선 설렘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함께하며 가정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겠다. 우리 부부의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를 찾으라면 망설임없이 선택할 그 단어, 그것은 바로 '여행'이다.
첫 만남부터 우리는 마치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대화가 편안했다. 아마 그 사이에 '여행'이라는 공통 분모가 우리를 단단하게 이어줬던 것일 것이라 믿는다. 생각해보면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 나와, 사람들을 세계 어디론가의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일을 하는 남편의 일도 '여행'과 아주 가깝다 할 수 있겠다.
미신을 믿지 않지만, 한번 봐서 나쁠 것 없다는 어른들의 말을 듣고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점집에 한번 간 적이 있다. 우리 둘에게서는 남들보다 유별난 역마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결혼 후 가만히 생각해보면 주기적으로 우리 부부의 혈관 속에서 샘솟는 역마 바이러스는 이따금 여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행을 하지 못할 현실적인 이유는 끝없이 많다. 달리 말하면 여행을 떠날 이상적인 핑계도 끝없이 많다는 것이다. 이 중 우리 부부는 여행을 떠날 핑계를 아주 잘 찾는 성향에 가깝다. 그것도 준비되지 않은 여행을 갑작스럽게 설렘만 가지고 떠나는 충동적인 스타일이다.
이렇게 충동적이고 역마적인 성향으로 우리는 30대 초반의 나이부터 함께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인 이유로 하와이 신혼여행이 아마 부부의 일생에서 손꼽는 해외여행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안되면 되게 하리라' 라는 좌우명은 우리 부부에게 여행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여러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이 아니면 절대 떠날 수 없다'는 남편의 말은 아내를, 그리고 3살난 아들까지 결국에 비행기에 태우는 결말을 낳게 되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오키나와, 뉴질랜드, 괌, 하와이에 다녀왔다.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아오신 양가 부모님께서는 '너희가 아니면 이 세상이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지 모를 뻔 했다.'는 말로 세계여행의 행복을 표현하셨다.
그 후 여러번 모시고 갈 기회가 있었으나 '나이가 들면 결국 집이 최고다'는 말로 고사하셨다. 아마도 입맛에 맞지 않는 식사와 잠자리, 고단한 이동, 여기저기 헤매는 불확실함이 패키지 여행보다도, 집보다도 불편하셨기 때문이 아닐지 짐작해본다. 아프신 데 없으실 때 또 같이 떠나시자고 친정엄마에게 징징대며 졸랐을 때,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다. "계속 그렇게 놀러 다니면 남들이 뭐라 생각하겠노. 욕한다 욕해"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무슨 말로 설득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그런데 남편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쓰지 말아요.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고 살면 되요. 실속만 차리면 되죠" 감성적 사고에 집단주의에 익숙한 하는 나는 상위 상여자인 반면, 해답 찾아 돌진하고 개인주의적 사고에 익숙한 남편은 상남자다. 여행 다녀와서 집이 최고다 외치다가도, 짐 다 풀고 나면 다음 여행을 계획한다. 그렇다고 곳간에 차도록 돈이 넘치느냐, 그것도 아니다. 남편은 말한다. 여행가려고 돈 버는거야. 아기들 어릴 때 젊어서 떠나는 여행이 제격이지.
부모님은 동행을 거절했으나,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우리 부부는 일단 넓은 세계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먼저 탐방해보고, 좋은 곳은 부모님과 함께 꼭 다시 찾아 편안한 시간을 만들어 드리자고 다짐했다. 걷고 뛸 수 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표현하기 시작하는 4세 때 우리는 아이와 함께 떠났다.
미국 동부와 남부를 자동차 여행으로 다녀온 후 우리는 미대륙의 광활함과 자연의 신비를 깨닫게 되었다. 워싱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로 점프해서 플로리다를 한 바퀴 도는 여행은 그야말로 인생 여행이었다. 호텔 숙박비보다 더 저렴한 비용의 크루즈 티켓을 막판에 영화처럼 구해서, 바하마까지 크루즈 여행도 떠났다. 예상보다 빨리 플로리다 일주가 끝나자, 지도를 보다가 칸쿤여행까지 도전하게 되었다. 저가항공편은 티켓은 저렴한데 모든 짐에 항공료만큼 비싼 수수료가 부과되었다. 캐리어 무게를 줄이려고 전날 밤을 새워 늘어난 짐들을 정리, 겨우 캐리어에 구겨넣었다.
큰 계획없이 무모하게 떠났던 미국 동부, 남부 여행이 계획 없어서 더 좌충우돌했고, 덕분에 눈부시게 환상적인 추억으로 자리잡았다. 자녀가 귀여우면 또 다른 자녀를 낳듯이, 좋은 여행은 또 다른 여행을 낳는다. 머 않아 우리는 다시 미국 서부 곳곳을 찾아 자동차로 누볐다. 다음날 어디에서 무엇을 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멘땅에 헤딩' 자유 여행은 손에 땀을 쥐게 할만큼 흥분으로 가득 찼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고되기는 커녕 행복 그 자체였고 할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지도를 펼쳤다. 하루 전에 짐을 싸는 건 이제 기본이다. 이탈리아행 티켓 3장을 들고 가빠른 숨을 고르며 비행기에 올라탔다. 아이는 장거리 여행에서 마음껏 볼 수 있는 만화에 신이 났으며, 우리는 이코노미 기내식을 호텔 식사보다 맛있게 음미했다. 좁은 좌석에 몸을 우겨넣고도 넓은 집보다 안락함을 느꼈다. 도착해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나는 유럽 여행 안내서를 뒤적뒤적하며 뒤척였고, 남편은 결국 발 끝이 닿는대로 가는 것이 여행이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와 꿀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무계획으로 시작된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마음 속에 심어주었다.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프랑스 어딘가를 2달 가량 헤매이다, 적당한 아쉬움과 적당한 향수병이 생겨날 때 다시 집이라는 안식처로 돌아왔다.
아내에겐 '집이 최고다'라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남편은 두바이행 티켓으로 마음을 흔들었고, 난생 처음본 사막의 화려한 도시에 매료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국적인 정취에 대한 동경은 몰디브의 에머랄드 바다에 머물렀고, 언제 결정했나 싶을만큼 생각보다 빨리 우리의 몸은 몰디브 바다 한 가운데에 도착해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치 소설같은 일이 일어난다. 코로나가 세계를 강타했다. 우리의 여행은 예고없이 사라지는 주인공처럼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 했다. 희한한 형태의 삶이 찾아왔다. 3인 가족이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집에서 딱 붙어서 시간을 보냈다. 돌이켜보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기억이었다. 자정 전에 주문하면 다음날 일어나기도 전에 도착한 장바구니가 주는 배송 혁명으로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다 같이 잠을 자는 가족만의 일상을 보냈다. 영화에 보면 좀비가 출몰해 세상을 종말로 몰아갈 때, 가족들이 밖에 안나가고 비상식량을 까먹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가. 코로나는 어떤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좀비음에도, 영화처럼 극적으로 인류는 답을 찾았다.
결국 우리 가족도 코로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주었다.
첫째. 서로간의 잔소리와 집안일의 노동이 필요한 것을 제외하면, 내 집이 낙원이다.
둘째, 우리나라가 이렇게 넓고 아름다운 것들로 꽉꽉 차있었는데 미처 몰랐다.
여행을 시작한 3세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어느덧 6살이 되었고 코로나 이전 시절의 사진을 보면서, "이 때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구나. 빨리 코로나가 없어져서 마스크를 벗고 싶다." 라는 표현을 곧잘 하는 큰 어린이로 성장했다.
아이의 말대로 코로나 팬데믹 속 우리는 어딜 가더라도 마스크 없이는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코로나가 주는 나름의 선물은 차고 넘칠만큼 가지게 된 가족의 시간이었다. 사회가 허락하는만큼 나름의 소소한 국내 여행도 만끽했다.
한달의 여유를 가지고 바다와 바람의 섬 제주에서 보낸 시간도 꿈만 같았다. 2달 후 동생이 생겨 큰 변화를 맞을 첫째 아이에게 천천히 가는 시간의 여유와 온전한 부모의 사랑을 선물했다. 나중에 한글을 떼고 엄마가 쓴 제주 일기를 펼쳐볼 첫째 아이의 웃음도 함께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