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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 Feb 12. 2023

창백한 푸른 점에서 만난 작은 점

환영한다. 이 곳에 와주어.

상위 5퍼센트.


36주 차 3일째 검사에 기록된 아기의 피지컬 수치는 평균을 훨씬 웃돌았다. 같은 주차 태아 평균보다 700g이나 큰 3.5kg까지 자라났다. 불과 2주 전 검사 때보다 800g이 늘어난, 말 그대로 폭풍성장이다. 팔다리도 길고 몸무게도 많이 나간다는 아이가 벌써부터 자랑스럽다. 내 자랑스러움과는 별개로,  출산예정일인 3월 5일까지 기다리면 아기가 너무 커지기 때문에 병원에서는 예정일보다 이른 날에 아기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빠르면 일주일 후라는 소식에 설렘 반 걱정 반이다.


아내의 배는 이미 매끈한 달항아리처럼 차오를 만큼 차올랐다. 아이가 커지면서 움직일 공간이 점점 좁아져 태동은 예전보다 줄어들었다. 아내의 동그란 배에 튼살크림을 발라주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어젯밤엔 튼살크림을 바르며 아내에게 떨리지 않냐 물어봤다. 나와 달리 아내는 아직 실감 나진 않는다 답했다. 내가 아기를 낳는 것도 아닌데 난 벌써부터 속이 뜨끈하면서 울렁거리는 기분이 종종 든다. 차오른 아내의 배가 암전처럼 푸시시 꺼지고서 그곳에서 핀포인트 조명을 받고 태어날 아기를 처음 안아볼 순간을 수십 번 넘게 시뮬레이션했다. 자그마한 생명을 어떤 각도로 안아야 할지부터, 아기의 얼굴을 보며 도달할 나의 감정의 임계치는 어디까지일지 그려봤다. 적어도 내가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을, 생애 최고의 경이로운 순간이 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처음 만난 아기의 모습은 작은 점에 불과했다

5주 차 1일.

 아기가 생긴 걸 알고서 처음으로 초음파 검사를 통해 아기를 만난 날이다. 조그맣게 자리 잡은 아기집 안에 더 조그마한 점 하나만이 보였다.  이 조그마한 점이 생기기 위해, 수많은 우연과 인연이 켜켜이 겹쳐야만 했다. 아내와 프랑스로 신혼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고 대청호가 지척인 레스토랑에서 상견례를 했기 때문에, 선배의 소개로 처음으로 아내와 서울 강서구청 먹자골목에서 술을 마셨기 때문에, 시골에서 근무하다 별안간 인천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더 원초적으로는 나와 아내가 각자 엄마의 자궁에서 나와 이 넓은 세상에 태어나, 초음파에서 보이는 이 작고 검은 점이 생겨날 순간을 위해서 예비되었기에 가능했다.

The Pale Blue Dot, 우리가 살고 있는 작은 점

작은 점은 그렇게 모든 순간들이 겹쳐나 시작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구에 도달했다.  역사상 가장 철학적인 사진이라는 위 사진은 1990년 2월 14일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의 모습이다. 61억 킬로미터 떨어진 우주에서 찍은 지구는 말 그대로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 아기를 찍은 초음파 사진과 지구를 찍은 위성사진은 닮아있다. 광활한 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지구에서 아내의 뱃속에 자리 잡은 작은 점을 만났다는 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이 기적은 이제 작은 점에서 생명의 모습을 갖추고 곧 세상의 빛을 받을 날을 앞두고 있다.


이 작은 점 덕분에 난 세상을 다시 보게 됐고, 지금까지 겪어왔던 세상보다 더 큰 탐험이 펼쳐진 육아라는 바다로 출항을 앞둔 배에 올랐다.  아기가 태어나 힘껏 내지를 울음은,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을 알리는 경적소리처럼 내 귓전에 울려 퍼질 것이다.  나는 작은 점으로 시작된 존재의 손을 부드럽게 쥐고서, 어떤 인사말을 건넬지 고민한다. 작은 점이 여기까지 오는 데 필요했던 기적과 용기에 대해 존경과 경의를 담아 건넬 첫마디. 이 세상에 와주어서 고맙다는 그 말 한마디를. 이 창백한 푸른 점에서 함께 그려낼 찰나의 순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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